글: 이덕일 기자 / 코리안 뉴스
쿠바의 이 선생님, 아리랑 그리고 강남스타일
내가 쿠바로 여행 간다고 하자 “거긴 공산주의 아냐?” 아직도 우리에겐 이런 이념의 골이 남아있다. 모든 대화의 단절을 가져오는 이런 스테레오 타입의 인식은 이제 없어져야 한다고 그때 생각했다. 아무튼, 기존 <코리안 뉴스> 독자라면 이미 잘 알겠지만, 이번이 나의 3번째인 쿠바 여행은 언제나 그렇듯이 같은 도시에 살고 있어도 서로 모른 채 흩어져 있던 쿠바 한인들을 그곳에서 살면서 한글학교를 열고 한글과 한국문화를 가르쳤으며 그리고 지금까지 16년간 쿠바 한인들을 돌보아 온, 밴쿠버 교민 이일성, 이진남 씨 부부의 16년간의 긴 여정에 동행한 짧은 9일간의 기록이다. 쿠바의 한인은 한국 이민 역사상 가장 슬픈 삶을 산 이민자들이다. (www.hankookin.ca 에서 쿠바 기사를 검색하면 그동안 코리안 뉴스가 기록한 밴쿠버 한인들의 쿠바 여행의 기사를 볼 수 있다.)
이번 여행에 동행한 14명의 밴쿠버 교민은 (우린 짐꾼이라고 부른다.) 자신의 짐은 비행기에 들고 올라갈 작은 가방에 담고 각 한 명에 한 개씩 이민 가방 보따리를 받아 비행기로 부친다. 이 보따리에는 그동안 밴쿠버/ 한국에서 모은 쿠바 한인들에게 줄 선물이 들어있다. 쿠바 3개 도시 (까르데나스, 마탄사스, 아바나)의 한인 가정의 가족 구성원을 다 알고 있는 이진남 씨는 어느 집에 어떤 선물이 가야 할지 잘 아는 유일한 분이다. 그래서 모든 선물은 각기 이름이 적혀있는 가방에 담겨 건네준다. 쿠바 출발 10일 전부터 선물을 싸기 시작한 이진남 씨는 수첩에 빽빽이 적혀있는 쿠바 한인 가정의 이름을 하나하나 확인하면서 포장을 한다. 누구도 도와줄 수 없는 일이어서 나도 교민들로부터 받은 선물을 날라 주는 정도의 일만 했을 뿐이다.
카를로스의 애국심
건강한 이 선생님을 본 쿠바 한인은 더 반겼다.
사실 이일성 씨는 3년 전 갑작스런 뇌졸중으로 왼쪽 반신이 마비되어 거동할 수 없을 정도였다. 다행히 지금은 (거의) 불편함이 없을 정도로 회복되었다. 2년 전 방문했을 때 쿠바 한인들이 얼마나 이 선생님을 염려했는지 알고 있기 때문에 지금 이들의 기쁨을 잘 알고 있다. 2년 전 열 번도 넘게 이 선생님을 끌어 안으며 보고 또 보고 하였던 파블로 박 씨도 여전히 반갑게 맞이했지만, 이 선생님이 아직 건강한지 확인하는 눈빛을 감추지 못했다.
6년 전 처음 쿠바 한인을 찾았을 때는 쿠바에서 강남 스타일 노래를 들으리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이젠 쿠바에서조차 한국이 친숙해 졌음을 알 수 있었다. 쿠바 한인뿐만 아니라 쿠바인들도 강남 스타일을 춤춘다. 특히 쿠바의 최대 방송국인 카날 아바나를 포함해 쿠바 비시온 등 공영 방송이 한국 드라마를 방영하지만 대부분 쿠바인은 아바나 시내에서USB에 담겨 판매되는 한국 드라마를 본단다. 이것이 그렇게 인기라고 한다. 쿠바의 한인들도 이 드라마를 본다. 그리고 강남 스타일 춤을 우리에게 보여 줬다. 지금까지는 볼 수 없었던 변화된 모습이었다. 아무튼, K-Pop을 통해 한국의 인지도가 높아진 것은 사실이다.
괴성에 모두 깜짝 놀랐다. 카를로스 아내 셰일라의 목소리다. 딸을 가진 그녀 옆에는 카를로스가 자석처럼 붙어 꼼짝 못 하고 있다. 우리가 준 선물 더미에서 아기 옷과 아기 장난감을 꺼낼 때마다 내는 카를로스 아내의 목소리이다. 카를로스는 곧 딸 아빠가 된다. 아내의 동네가 떠나갈 듯이 내는 괴성에도 약간 상기된 그의 얼굴에는 종일 미소를 머금고 있었다. 사실 카를로스는 한국에 대해 지금까지 그리 깊이 생각하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오늘 그는 달라 보였다. 나는 그에게서 애국을 보았다. 카를로스의 애국심을.
애국이 별거겠는가? 밴쿠버의 한국교포가 가져다준 곧 태어날 아기 옷이 너무 예뻐 어쩔 줄 모르는 아내를 보면서 아빠 카를로스 가슴 속 깊은 곳에서부터 우러나오는 감정 그것이 아니겠는가? 별것 아니다. 작은 것에 소홀히 하지 않는 것이 진정한 치정(治政)이며 그 작은 마음에 화답하는 것이 애국일 것이다. 애국도 주고받는 것이다. 주지도 않고 애국만을 요구하는 고국이 되어서는 안 된다. 특히, 쿠바의 한인들은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어려운 생활 속에서도 꼬깃꼬깃 돈을 모아 대한민국 임시정부로 독립 활동 자금을 보내지 않았는가. 대한민국이 6·25 참전 용사를 끝까지 책임지고 복지를 위해 노력하는 것처럼 이들을 끝까지 책임져야 했다. -하지만 거의 100년이 되도록 포기하였고 지금도 특별한 실질적인 지원이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아이들은 훌쩍 자란다. 내가 처음 6년 전 방문했을 때와 비교하면 장난감을 갖고 놀던 아이가 나를 알아보고는 큼직한 손을 내밀어 악수를 청한다. 청년이 다 되었다. 이일성씨는“처음 한글학교를 시작했을 16년 전에는 무릎에 앉아 재롱을 떨던 아이가 이젠 결혼을 했다.”며 새삼 세월의 빠름에 놀라워했다.
곧 아기 아빠가 될 카를로스는 이젠 달라질 것이다. 아니 벌써 다른 모습이 보였다. 여느 때 같았으면 한 손 악수로 안녕히 가라는 메마른 듯한 인사를 했겠지만, 오늘은 이 선생님을 꼭 껴안았다. 이 선생님을 안은 손에 더 힘을 주어 안는다. 그리고 아무 말을 하지 못한다. 모습에서 그의 마음이 고스란히 전해졌다. 이제 그에게 대한민국은 더 이상 할아버지들의 나라가 아닐 것이다. 카를로스의 나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