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 한데 잠을 자본 기억이 있나요? 바닷속 어느 나라에도 너무 춥고 쓸쓸해서 단 한 시각 잠들지 못하고 이리저리 떠도는 늙은 해파리 같은 영혼들이 있나요?’<곽재구, ‘포구 기행’ 머리말 일부>
땅이 꺼지고 바다가 솟아오르는 곳. 두고 온 그 언저리를 떠올린다. 포구(浦口)는 오고 가는 이들이 묵는 어귀다.
‘동해 포구사(東海浦口史)’.
내륙이라고만 생각해온 경상북도가 상상력을 발휘해 땅과 바다는 이어지는 곳이라며 지리(地理)가 가진 무한 포용을 발휘, 여럿을 모셔 통섭과 융합이라는 거대 담론을 이끌었다.
동해(東海)에 한정시켜 닻처럼 묶어두지 않고 인문학해(人文學海)로 인도한다.
울산대학교 허영란 교수가 이 무거운 짐을 지기로 하고 여기에 역사, 민속학자를 비롯 소설가 시인, 미디어 전문가 등이 힘을 모으고 독려하며 고난 행군을 마친 멋진 꾸러미다.
동해는 영화 ‘고래 사냥’에서 청춘들이 방황했던 시절을 슬쩍 밀쳐두고 ‘인문 지리’라는 ‘버드 뷰’(bird view) 관점으로 조망한다.
최대한 넓게, 최고로 길게 가로누운 동해, ‘한데 잠’을 자는 포구(浦口) 속살을 씨줄과 날줄로 엮었다. 사람 냄새나는 공간, 그 속에서 전해져 오는 수많은 삽화들을 역사로 만들었다. 아마 이 책이 새로운 시각으로 해석한 ‘동해 인문학’ 첫걸음이지 싶다.
바다를 끼고 사는 삶은 밀물과 썰물처럼 때로는 풍성하게 때로는 홀로인 듯 외면받기도 한다.
하지만 그 땅이 발현(發現)한 역사와 문화는 하나도 버릴 것 없는 물고기, ‘명태’처럼 반짝이는 비늘이 살아있다. 파도에 쓸려간 동해안 그 망각과 유실을 복원한 튼실한 자료집이자 생생한 보고서다.
총 3권으로 만들어진 묵직한 그물 같은 책은 1권에서는 선사시대에서 현대 동해 포구 역사를 시대순으로 훑고, 2권에서는 민속, 설화 등 요긴한 역사 주제를 직접 밟아가며 썼다. 3권은 동해가 가진 역사, 문화적 풍경, 상상력을 발휘한 스케치가 매우 인상적이다.
수록된 글들은 발품 판 흔적이 고스란히 드러나 있어 그들 노정(路程)을 따라가다 보면 땅과 그 땅을 딛고 사는 사람들이 보인다.
이 인문 지리서에 함께하고 동해 별신굿을 평생 과업 삼아 연구하는 김구한 교수(울산대학교)가 취재한 ‘과메기’ 풍경에서 책이 가진 무게를 물고기 한 마리로 명쾌하게 설명한다.
청어가 과메기로 몸을 바꾸는, 그 기름기 좔좔 흘려 기절케 하는 맛을 담고 있는 바자르(bazzar‧시장)에서 한 말.
‘청어는 혼자 빛나는 물고기가 아니다. 실파, 생미역, 마늘, 고추, 김, 배추, 미나리 등속이 어울려야 제맛이라는. 벚꽃은 ‘홀로’ 화려하지만 살구꽃은 ‘함께’여야 아름답다. 초가집과 흙담, 장독대 등이 풍경이 되어야 더욱 빛나는 꽃이다’.
동해 포구사(東海浦口史)는 그런 소담한 글을 담은 소쿠리다. 거룩해서 부담스러운 모습이 아니다. ‘잠들지 못하고 이리저리 떠도는’ 영혼들을 한데 모은 불빛이다. 이들이 켜 논 흔들리는 가난한 배, ‘간데라’ 불빛에 마음이 정화(淨化)된다. 글 끝에 그 포구에 여태 사는 시인이 남긴 시를 걸어둔다. 두 쪽 낸 ‘배지기’ 과메기처럼.
‘나 오늘 기필코/ 저 슬픈 추억의 페이지로 스밀라네/ 눈 감은 채 푸르고 깊은 바다/ 흉어기 가장 중심으로 들어가/ 목단꽃 붉은 이불을 덮고 / 왕표연탄 활활 타오르는/ 새벽이 올 때까지/ 은빛 다방 김 양을 뜨겁게 품을라네/ 작은 창 가득/ 하얗게 성에가 끼면/ 웃풍 가장 즐거운 갈피에 맨살 끼우고/ 내가 낚은 커다란 물고기와/ 투둘투둘 비늘 털며/ 긴 밤을 보낼라네’
<권선희 시, ‘매월 여인숙’ 전부>
은빛 다방 김 양과 내가 잡은 커다란 물고기, 눈 감은 채 푸르고 깊은 바다는 사람을 위로하고 삶을 독려하는 아름다운 어울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