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칠 줄 모르는 창작열은 조국에 대한 그리움에서 나와”
모스크바 유학생 망명사건의 주인공 10진(眞)중 한 명
지난 12월 26일, 알마티
시내의 모 식당에서는 올해 86회 째 생일을 맞이한 동포 작곡가의 조촐한 생일잔치가 열렸다. 20세기 격랑의 한국 현대사를 몸에 간직하고 계신 분 중에 한 분인 정추 선생이 이날의 주인공이었다. 반세기도 훨씬 전에 일어난 ‘모스크바 유학생 망명사건’의 공범(?)들 중 한명인 김종훈(당시
모스크바국립영화대학 카메라학과 재학)선생과 평소 그와 가깝게 지내던 지인들이 마련한 자리였다.
12일 EBS를 통해 방송될 HD다큐 '未行(미행), 망명자 정추’의 실제 주인공이기도 한 그는 “이 방송이 나가면 카자흐에서 보다
한국에서 더 유명해지는 것 아닌지 모르겠다”며 농담을 하기도 했다. 이날
그는 “이홍기 감독이 2008년 8월부터 지난해 5월까지 10개월
동안 나를 따라 다니며 일거수일투족을 영상으로 담느라고 고생이 많았다”며 촬영도중의 에피소드와 제작진들의
노고를 들려주었다. 또 그는 카자흐스탄에서 망향가를 부르는 늙은이로서의 삶의 출발점인 모스크바 유학시절을
생생하게 들려주었다.
6.25전쟁이 한창이던 당시, 전선으로 끌려가 총알받이가 되던 친구들과
달리 김일성에 의해 선택 받아 모스크바국립영화학교와 음악대학 등지에서 유학을 할 수 있는 특혜를 받은 그에게 망명 결정을 할 당시 갈등은 없었는지
묻자, “무사히 유학을 마치고 평양으로 돌아갔으면 오늘의 정 추는 아마 없었을 것예요. 대신 북한에서 잘 나가는 음악가 또는 당 간부가 되어 있었겠죠. 이때
갑자기 스탈린이 사망하는 사건이 발생합니다. 이 사건으로 인해 우리들은 운명의 갈림길에 서게 되었습니다.” “운명의 갈림길이라니요?” 궁금증을 참지 못하고 필자는 그 다음
말을 재촉했다. “독일 나찌와 맞서 2차 세계대전을 승리로
이끈 스탈린이 죽자 마자 소련 사회에서는 스탈린 격하 운동이 거세게 일어났었죠. 이때 우리들은 철권
통치와 1인 우상화의 끝은 바로 저런 것 이구나를 생생하게 보게 되었습니다. 그 후 허진 선생의 모스크바국립영화학교 기숙사에 모인 우리들은 평양으로 돌아가는 것을 포기, 정치망명을 결정했습니다”고 담담히 회고했다.
10진(眞)
그때 함께 행동을
한 유학생들에 대해서 그는 “허진, 최국인, 김종훈, 한진, 이경진, 이진환, 정인구, 최선옥, 양원식과 저가 바로 그 10명의 청년 유학생들이었습니다.”며 “이들은 대부분 사회주의 혁명이론에 따라 당시 북한 사회주의
정권의 토대를 닦는데 절대적으로 필요한 대민 교양사업에 요긴한 수단이었던 공연예술과 영화를 전공한 학생들로서 주로 모스크바 국립영화학교와 음악대학
등지에서 유학을 했었죠. 나중에 항일독립운동가 왕산 허위 선생의 종손인 허진 선생의 제안에 따라 각자의
이름에 진리 진(眞)자를 넣어 이름을 짓고 자신들을 10진(眞)이라고 부르며 영원히 진리를 추구키로 다짐하기도
했었습니다. “
그러나 이후 그들
앞에는 망명객으로서의 고단한 삶이 놓여졌고, 또 소련시민으로서 살아가는 고려인 동포사회나 현지사회에도
끼여 들지 못하는 ‘경계인’으로서의 삶이 강요되었다. 이런 와중에 카자흐스탄에 정착한 이들은 70년대가 되어서야 무국적자의
설움을 씯고 카자흐스탄 국적을 받게 된다. 정 추도 이때부터 비로소 본격적인 창작활동에 돌입하게 된다.
1961년 유리 가가린의 첫 우주선
발사현장에서 그의 곡이 연주
“당시 고려인 동포사회는 구소련 소수민족들 중 모국어 상실의 속고가 가장 빠른 소수민족이었고 이는 동포문화단체에서
일할 수 있는 인력의 부족을 가져왔습니다다. 이런 상황은 완벽한 모국어와 러시아어를 구사하는 우리들에게
‘끼’와 ‘능력’을 발휘할 수 있는 기회가 되었어요. 고려인 동포사회의 대표적인 언론기관이었던
고려일보와 고려극장에 취직을 할 수 있게 되었던 것입니다.”정 추 선생은 “시나리오학과를 졸업한 한진선생(원래 이름은 한 대용)은 고려극장의 시나리오 작가로서 훌륭한 작품을 무대에 올려 전 소련을 순회하며 공연을 다닐 수 있었고 양원식선생은
고려일보에서 구소련 붕괴후 한국에서 진출한 기업의 통역으로 떠나버린 기자들의 빈자리를 거의 혼자서 지켰내었다.”며
동료들을 회고했다. 정 추 선생도
러시아의 작곡가 차이코프스키의 직계 4대 제자로 20여 년간을
구소련과 카자흐공화국 작곡가동맹의 이사로 활동하며 수많은 곡을 작곡하였고 또 현재까지도 왕성한 음악활동을 하고 있다. 1961년 가가린의 첫 우주선발사현장에서 그의 곡이 연주되었고 카자흐스탄 음악교과서에 무려 60곡, 피아노 교과서에는 20여
곡이 올라 있을 정도이다. 이런 그의 활동을 인정한 카자흐스탄 정부는 그에게 카자흐공화국 ‘공훈문화일군’명예칭호를 부여했고, 조국으로부터 KBS재외동포상, 국민훈장 ‘동백장’ 등을 받기도 했다.
이렇듯 정 추와 10진(眞)들은 모국어를 상실한 동포사회에 새로운
문화적 자양분을 공급하였고 실제로 고려인 동포문화단체는 이들이 이끌어 나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정
추 선생 역시 아흔을 바라보는 고령임에도 불구하고 소년과 같은 순수한 호기심과 왕성한 창작욕을 가지고 계셨다. 외계인의
존재를 믿고 그들과 대화를 시도하는 순수함을 아직도 간직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남북의 통일을 기원하며
북한 관련 기사와 정보는 지금까지도 꼼꼼히 챙겨 읽고 있다.”고 밝힐 정도로 왕성한 활동을 하고 있다.
조국이 통일되는 날 ‘조국 교향곡’이 연주되는 게 소원
1923년 전남 광주에서 태어나 광주고보를 다니던 중 일본인 교관과 싸우다 퇴학을 당한 후 평양과 모스크바를 거쳐
알마티에서 살고 있는 노 망명객 정 추. 그에게 한국으로의 영주 귀국 의향을 묻자 “아동 음악가로 활동하고 있는 친동생 정근이가 서울에 살고 있어요. 그리고
제 호적도 아직 아직 살아있어요. 한국국민인
셈이죠. 그러나 이 나이에 한국에서 산다는 게 자신이 없긴 합니다.”며
여운을 남겼다.
20대에 떠난 조국을 90세가 가까운 나이에도 돌아가지 못하는 비극적
인생의 주인공을 탄생시킨 원인은 어디에 있을까? 정 추 선생을 인터뷰하면서 그의 음악적 업적보다 현대사의
격랑속에서 살아온 정 추에 주목했다. 그리고, 그의 얼굴에서
20세기에 엉켜버린 역사의 꼬인 실타래를 아직도 풀지 못하고 있는 분단조국을 발견했다. 특히나 한국전쟁 60주년을 맞는 올해, 조국에 대한 그리움을 음악으로 승화시켜 주옥
같은 많은 곡을 쓴 그의 음악적 업적과 함께 그를 그렇게 만든 조국에 대해서 생각하는 시간을 가져볼 필요가 있음을 느겼다.
조국이 통일되는
그날 ‘조국 교향곡’이 연주되길 간절히 바라는 정 추 선생의
소원이 꼭 이루어지기를 기원하면서.(2010.1.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