랫썸삐리리 네팔 3!
뉴스로=강명구 칼럼니스트
나는 지금껏 맛보지 못했던 낯선 감정들과 마주설 마음의 자세가 충분히 돼 있다. 그것이 당혹감이라든가 나의 가치관을 송두리째 바꾸어버리는 것이라도 좋고 경건함이라든가 혹시 혼돈(混沌)에 속에 방황할 지라도 그것을 충분히 즐길 마음의 준비가 되어있다. 그러나 나는 미국 대륙횡단 마라톤을 하면서도 그랬고 대한민국을 일주할 때도 그랬듯이 언제나 처음에는 조금 낯설고 약간 이질감을 느꼈어도 조금 시간이 흐르면 잃었던 기억을 되찾듯이 전생의 어느 한순간 다녀간 듯한 친숙함을 느끼곤 했다. 스쳐지나가는 많은 여자들이 친숙하게 느껴지는 것도 어느 전생에 지고지순한 사랑을 나누어 본 듯한 기억 때문일 지도 모른다. 그래서 내겐 여행이라는 것이 더 이상 처음으로 가는 곳이 아니라 잃었던 고향을 찾아가는 고향 찾기 같은 것으로 다가온다. 경계 너머의 실체 밖에 있는 실체라든가 경치 밖에 있는 경치도 언제나 겸허하게 마주대할 수 있는 내성(耐性)이 생겼다.
입맛에는 내성이 잘 생기지 않는다. 무글링에서 락바르가 해준 김치찌개로 이른 아침을 먹고 출발한다. 입맛에 안 맞는 달밧을 먹고 뛰는 것보다 훨씬 기운이 난다. 52세의 락바르는 셰르파 족이다. 그는 8,000m의 고봉을 수도 없이 큰 짐을 지고 올랐다고 한다. 지금도 30kg의 짐을 지고 6,000m의 고봉을 너끈히 오를 수 있다고 큰 소리를 친다. 셰르파는 티베트계 네팔인으로 산악지역에 모여 사는 씨족이다. 그러므로 락바르의 성은 당연히 셰르파이다. 세르파는 에베레스트 남쪽 기슭인 쿰부 지방에서 오랫동안 살아온 티베트 민족이다. 현재 히말라야 산악등반 안내인을 뜻하는 대명사로 굳어져 버렸지만 단순한 안내인이 아니다. 등정루트 선정부터 정상공격 시간의 최적을 설정까지 거의 모든 것을 조언해준다고 한다.
무글링은 네팔의 중부에 위치하는 교통의 중심지이다. 카트만두와 포카라 룸비니를 잇는 삼각지에 자리를 잡은 비교적 큰 도시이다. 우리는 룸비니를 향해 발걸음을 재촉한다. 이 구간은 도로공사를 하기 때문에 교통통제를 할 것이고 가뜩이나 엉망인 교통상황이 차량통제로 극심한 정체(停滯) 현상을 이룰 것이고 먼지와 매연이 더 심할 것이기 때문에 이 구간을 건너뛰면 좋겠다는 이구대장의 조언도 있었다. 달리는 사람은 생래적으로 어떤 장애물이던 피해가는 것에 강한 거부반응을 일으키기 때문에 우리는 어떤 어려움이 있어도 그 길을 달리기로 하였다.
달리면서 한국에 근무했던 많은 사람들을 만날 수 있었다. 달려와서 한국말로 “안녕하세요!”하고 인사하며 다가와서 손을 잡으면 얼마나 반갑고 고마운지 모르겠다. 한국에서의 기억이 꼭 좋은 일만 있었을 리 없건만 나쁜 기억은 다 묻고 환영해주고 한국에서의 추억을 잘 간직해주어서 고맙다. 큰 마을에는 영어학원 간판보다 한국어 학원 간판이 더 많은 것도 기분 좋고 한국어가 일본어 위에 더 큰 글자로 자리 잡고 있는 것도 기분이 좋다. 네팔에 올 때 광저우 공항에서 두 네팔 청년을 만났는데 한 명은 정치외교학을 전공하고 한국의 거제도에서 배 청소하는 일을 하다 요즘 일거리가 없어 두 달간 휴가를 얻어 집에 가는 중이고 한 명은 전남 대학교에서 건축구조를 공부하는 학생이라고 했다. 네팔에서 한국에 오는 사람들은 나름 수재에 가깝다. 6만 명이 시험을 봐서 겨우 2천명이 합격하여 한국비자를 받을 수 있다고 한다.
길은 예상보다는 달리기에 좋았다. 교통을 통제하여 오히려 차량 통행은 적었고 매연은 지난 며칠보다 반으로 줄어든 기분이다. 언제나 어제보다 오늘이 좋으면 그건 아주 좋은 것이다. 이제 내리막길도 거의 다 내려와 네팔의 얼마 안 되는 평원을 달린다. 얼마 안 된다는 표현이 맞는지 모르겠다. 지평선(地平線)이 저 멀리까지 뻗쳐있는 게 우리의 곡창인 호남평야보다도 넓어보였다. 땅은 기름졌고 평야지대의 삶은 산간지방보다는 훨씬 윤택(潤澤)해보였다. 집도 이곳은 크고 깨끗하며 사람들의 표정도 피곤해보이지 않았다.
네팔의 아침 해는 보리수나무 위에서 뜨고 저녁노을은 보리수나무 위에서 진다. 사람들은 보리수나무 그늘 아래서 쉬고, 서로 만나 이야기를 나눈다. 현자들은 그곳에서 깨달음을 얻는다. 마을 한가운데 넓은 그늘을 드리우고 사당 옆에서 사당보다도 더 크고 경건하게 서있는 나무가 보리수나무이다. 부처님도 보리수나무 아래서 깨달음을 얻었고 수많은 수행자들의 거처가 되기도 한다. 네팔의 평원지대는 기후가 온난하여 집을 짓지 않고도 살 수 있으니 보리수나무 밑에는 해로운 벌레도 접근을 안 한다고 한다. 수백 년 묵은 보리수나무는 네팔 사람들의 신앙이기도 하다. 여인들이 나무 둘레를 돌며 실타래를 감는 의식을 자주 목격한다. 나무에 실타래를 감으며 소원을 빈다고 한다. 여인들의 소망은 대개 어느 시대 어디를 가나 비슷하다. 자식이나 지아비의 무탈을 빌고 자손이 번성하기를 소원할 것이다. 보리수나무 아래서는 청춘남녀의 사랑의 언약도 맺어진다고 한다. 그뿐이겠는가. 희미한 달밤이면 우리네 옛날 물레방아간에서 이루어지던 사랑인들 못 나누겠는가.
평원 속에 원시림 지대를 만난다. 온통 초록으로 덮인 숲을 바라보면 실제로 맥박이 느려진다고 한다. 신경과 근육의 긴장이 풀리고 마음을 안정시키는 것이다. 한적한 숲길을 쾌적하게 달리는데 인적소리에 놀란 원숭이 한 마리가 도망치니 갑자기 숲속이 요동(搖動)을 친다. 원숭이 수백 마리가 움직이는 모습이 장관을 이룬다. 야생의 원숭이를 보기는 처음이니 반가움이 컸다.
길옆에는 거대한 개미왕궁을 자주 볼 수가 있었다. 건기와 우기가 확실한 지역은 생물이 살아가기에 고달픈 환경이다. 특히 더위와 건조함에 약한 흰개미들은 이렇게 집단지능을 발휘해 거대한 왕궁을 지어 살기에 쾌적한 환경을 스스로 만든다고 한다. 개미의 크기와 인간의 크기를 비교한다면 내가 보고 있는 개미집은 지금 짓고 있는 롯데월드에 비견될 것이다. 친환경 건축가들은 이 개미왕궁에서 해답을 얻는다는 것이다. 흰개미집처럼 건물 옥상에 통풍(通風) 구멍을 뚫어서 뜨거운 공기를 배출하고 지표 아래로 구멍을 뚫어서 찬 공기는 끌어들여 에어컨 없이도 아프리카 같은 나라에서도 실내온도를 24도로 유지한다는 것이다. 생물들의 집단지능이 경이로울 때가 많다.
한낮의 온도는 39도를 넘어가고 있다. 습도도 높아서 달리면서 얼마나 땀을 많이 흘리는지 모르겠다. 종한 형이 콜라를 마시다 반은 남겨서 달려와 전해준다. 평소에 콜라를 마시지 않지만 시원하고 달콤한 콜라가 목젖을 타고 식도를 타고 내려가자 내 몸에 기쁨이 넘쳐난다. 콜라를 다 마시고 빈병을 들고 뛸 수가 없어서 갓길에 놓고 한참을 달려왔는데 오토바이를 탄 건장한 청년 두 명이 쫒아온다. 콜라병을 내놓으란다. 콜라를 사면 당연히 콜라병까지 소유가 되는 줄 알고 목이 마를 후배를 위해 남겨가지고 온 형이 졸지에 콜라병 도둑이 되었다. 기름 한 방울 나지 않는 나라에서 콜라병 도적을 잡으러 오토바이를 타고 쫒아온 셈법을 어쩔 수 없이 콜라병 값으로 20루피를 물어주고도 이해할 수가 없었다. 지금껏 맛보지 못한 낯선 감정들과 당당히 맞설 준비가 되어있던 나도 이 당혹감과 혼돈에서 마음을 추스리는데는 시간이 한참 걸렸다.
알리바바와 5인의 도적들이 진정으로 훔치고 싶었던 것은 콜라병이 아니라 네팔사람들의 마음이다. 네팔사람들의 마음을 훔치려고 ‘열려라 참깨’라는 주문 대신 ‘렛썸삐리리’를 사람들을 만날 때마다 흥겹게 불러대면서 율동도 같이했다. ‘렛썸삐리리’는 네팔사람들의 마음을 훔치는데 마술처럼 주효(奏效)했다. “렛썸삐리리 렛썸삐리리 우레라 정키 다라마 번장 랫썸삐리리, 바람결에 휘날리는 비단처럼 내 마음 두근두근 흔들린다오. 날아가는 게 좋은지 언덕 위에 앉는 게 좋은지 모르겠어요.” 네팔사람들은 우리 앞에서 뒤비졌다.
* 이 글은 '글로벌웹진' 뉴스로(www.newsroh.com)의 강명구의 마라톤문학에 실린 글입니다. 강명구 칼럼니스트는 지난해 최초로 미대륙을 손수레를 끌고 횡단했고 독도와 제주도를 포함한 한국일주마라톤을 완주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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