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정물에 삶은 달걀
냉장고를 열어보면 속이 한산하다. 중형이라서 가득 채워놔도 며칠 못가서 바닥이 나기 때문이다. 달걀 두 꾸러미가 창고지기처럼 덩그러니 남아 있다. 그런데 냉장고를 채우려고 샤핑 다녀오는 아내의 장바구니에 달걀이 한아름 들어있다.
“브라운달걀 올가닉달걀하며 아직도 많이 남아있는데 웬 또 달걀이오?”
“봐요. 1달러에 35개예요. 달걀세일인데 이런 대박을 놓칠수 없지요.”
“하긴 달걀은 많을수록 좋지. 달걀만 보면 난 부자가 된 기분이 드니까.”
내가 달걀을 좋아하는 건 달걀에 대한 추억 때문이다. ‘구정물에 삶은 달걀’.
41년생인 난 해방을 전후하여 어린시절을 보냈다. 우리집은 소작농이었다. 당시 국민의 80%가 농민인데 농민의 80%가 소작농이었다. 부자지주(富者地主)의 논을 빌려 소득의 절반을 바치고 절반을 먹는게 소작(小作)이다. 절반을 바치고 나면 쌀농사를 지으면서 보리밥 먹기도 힘들었다. 요즘 유행하는 ‘개돼지’처럼 살았다.
가난한집의 양자로 오신 아버지는 동내서 제일 부지런하셨다. 예절바르고 한학에 능통하셔서 인정을 받으셨다. 동내서 갑론을박(甲論乙駁)이 생기면 토론에 지친사람들은 맨 나중에 아버지를 쳐다봤다.
“봉헌이, 침묵하지 말고 자네도 의견을 말해보게나”
아버지는 대법원장이 판결문을 낭독하듯 조목조목 짚어 내려갔다.
“양쪽 의견이 이렁저렁하고 따져보면 암만암만 하니, 결국은 그렇게 저렇게 하여 이렇게 하는게 좋을성 싶습니다.”
“맞아 맞아! 자네야 말로 황희정승의 명판결 이랑께.”
아버지는 지주영감의 신임을 받아 소작농을 20마지기(3천평)나 얻었다. 10마지기 받기도 힘든 때였다. 추석이 지난 어느날 벼타작을 했다. 동내사람들이 몰려와 잔치 분위기였다. 지주영감이 왕림하셨기 때문이다. 면장을 지낸 지주영감의 행차는 김일성의 농장시찰처럼 위엄이 대단해보였다.
아침과 점심사이에 일꾼들은 겻둘이(간식)를 먹는다. 막걸리를 마시고 담배를 피우는 휴식시간이다. 지주면장님은 안채마루에서 주안상을 받았다. 청주처럼 맑은 동동주에 삶은달걀 세개를 송송 쓸어 흰접시에 담아 내왔다.
달걀하나 깨뜨려 소금 새우젓을 넣고 물을 부어 짜게 끓이면 10식구가 먹고도 남았다. 그게 어쩌다 먹는 우리집 달걀요리다. 통통하게 살찐 삶은 달걀맛은 얼마나 고소할까? 나는 동생과 술상근처를 배회하면서 군침을 삼켰다. 옛날 어른들은 다 먹지 않고 반드시 두세숫갈을 남긴다. 아니나 다를까? 지주영감님은 삶은 달걀 세쪽을 남긴채 일어났다.
난 동생과 달려들어 삶은 달걀한쪽을 입에 넣었다. 생전 처음 먹어보는 삶은 달걀맛. 입안이 노른자향기로 가득했다. 지주영감이 마시다 남긴 동동주를 퍼마시자 취기가 올랐다. 여섯 살짜리 주정뱅이는 어머니 아버지에게 대들었다.
“아부지 엄니, 우리가 못 사는건 지주들이 우리것을 수탈해가기 때문이에요. 왜 우리가 부잣집의 노예처럼 살아야 하나요?”
“그래도 지주님 덕분에 우리가 먹고 사는거다. 조선시절에는 80%를 지주에게 바치고 20%로 살아야 했단다. 지금 반반씩 나누는 건 그나마 고마운 일이지.”
긍정적인 어머니는 늘 그나마를 감사했다. 아버지는 아무말도 안하셨다.
아버지는 평생 단 한번도 여당을 찍으신 적이 없다. 신익희 조병옥 윤보선 김대중은 물론 국회의원이나 면의원도 야당만 찍으셨다. 속은 정의파셨다. 겉으로는 내색하지 않으셨지만 평생을 정의파로 살다 가신 아버지.
그날이후 난 삶은달걀 훔쳐먹을 궁리를 했다. 그게 지주영감의 삶은달걀을 뺏아먹는 복수로 생각했기 때문이다. 우리집에 닭이 열 마리나 있지만 달걀은 모아뒀다가 5일장에 내다 팔았다. 어머니가 매일 알을 세는 터라 삥땅이 불가능했다.
윗집 황씨집에 8마리의 좀 늙은 암탉이 있었다. 수탉이 있지만 늙은 영감이라 인기가 없었다. 젊고 우람한 우리집 수탉이 잘익은 벼이삭으로 정력을 돋군후 꼬끼요! 하고 사랑의 찬가를 불렀다. 황씨네 늙은 암탉들이 뒤뚱거리며 달려와 납작 엎드리면서 꼬랑지를 반짝 올려줬다. 그러면 우리 수탉은 관운장이 적토마에 올라타듯 가뿐이 암탉위에 올라타면서 그대로 찍어 눌렀다. 그게 전부인데 뭐가 그리 좋은지? 황씨네 늙은 암탉들은 젊은 임금에게 성은을 입은 늙은 후궁처럼 머리를 조아리고 머뭇거렸다. 그러다 타작하고 쌓아놓은 짚터미 사이를 쑤시고 들어갔다. 5분후에 튀어나오더니 꼬꼬댁! 외치고는 황씨네 집으로 줄행랑이다. 수상한 생각에 가보니 이게 뭔가? 뜨끈한 달걀이 들어 있었다. 여기저기 네 개나 됐다.
어린 나는 자청하여 저녁 쇠죽을 끓였다. 가마솥에 풀이나 벼집을 썰어 넣고 설거지한 구정물을 두 바케츠 붓는다. 쇠죽사이에 달걀 두 개를 넣은 후 한 시간동안 불을 땐다. 김이 올라오고 솥뚜껑사이로 눈물이 흘러내리면 불을 끄고 쇠죽을 뒤엎어준다. 그때 달걀을 꺼낸다. 남은 달걀 두개를 신문지에 둘둘말아 물을 흠뻑 적신후 아궁이 불속에 찔러 넣고 꼭꼭 덮어둔다.
뒷간(화장실)으로 들어가 삶은 달걀을 먹었다. 굴뚝 밑이나 울타리 아래를 찾아봤지만 좀 냄새가 나서 그렇지 안전하기는 뒷간이 제일이다. 신기하다. 생선토막 음식찌거기 설거지를 한 더러운 구정물에 끓였는데도 깨끗하게 잘도 익었다. 인분 썩는 냄새가 진동하는 뒷간에 쭈구리고 앉아 몰래 훔쳐먹는 삶은 달걀 맛이 기가 막히다. 여봐라, 게 없느냐? 지주면장이 된 기분이었다.
삶은 달걀 두개를 먹어치우고 쇠죽을 퍼준다. 그리고는 아궁이에 넣어두었던 군 달걀을 꺼낸다. 물에 젖은 신문지가 다 타버리고 껍질도 살짝 타기직전이다. 잘 구어낸 이조백자처럼 아름답다. 꿀 바른 과자 맛이다. 난 매일 삶은달걀 2개, 군달걀 2개를 먹었다.
정부가 들어서자 조봉암농림부장관이 농지개혁을 실시했다. 정부는 소작농을 자작농으로 바꿔줬다. 우리집은 20마지기의 자작농을 소유한 동네부자가 됐다. 나는 지금도 달걀을 좋아한다. 구정물에 삶은 달걀맛을 잊지 못하기 때문이다.
*구정물에 삶은 달걀맛에 비하면 어림도 없다!
* 뉴스로 칼럼 ‘등촌의 사랑방이야기’ 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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