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젠가는 한국계 대통령도

 

뉴욕=노창현 특파원 newsroh@gmail.com

 

 

90년대 초반 종로의 어학원에서 만난 미국인 강사에게 물었었다. 흑인과 여성 중 어느쪽이 먼저 미국의 대통령이 될 것 같으냐고 말이다.

 

그는 잠시 생각하더니 “여성이 먼저 될 것”이라고 답했다. 그 강사는 백인이었지만 인종적 편견(偏見)이 있어서가 아니라, 미국의 솔직한 현실을 이야기했을 것으로 짐작됐다. 사실 그의 예측대로 미국에서는 여성대통령이 먼저 나올 뻔 했다.

 

대선 경선이 시작될 때만 해도 민주당의 강력한 대권주자는 힐러리 클린턴이었다. 부시의 8년 실정으로 인해 민주당으로 정권이 바뀔 가능성이 유력한 상황에서 민주당 조직을 장악(掌握)한 힐러리가 미국의 첫 여성 대통령이 되는 것은 실현될 법한 현실로 보였다.

 

하지만 여성 대통령 대신 오바마가 역사상 첫 흑인대통령이 됐다. 물론 오바마는 백인 어머니에게서 태어난 혼혈인이니 ‘유색인종 대통령’이라고 해야 정확하다. 그러나 흑인의 피가 조금이라도 섞인 이들을 ‘흑인(African American)’으로 부르는 관행이 미국에는 있다.

 

수 많은 군중 앞에서 연설하는 오바마를 보면 떠오르는 인물이 있다. 바로 마틴 루터 킹 Jr. 목사이다. 지금으로부터 45년 전 그가 워싱턴 D.C.에서 행한 ‘나에겐 꿈이 있습니다(I Have a Dream)’는 연설은 깊은 감동을 주는 명문이다.

 

그의 육성 연설 동영상 통해 목청껏 "I Have a Dream"을 외치는 장면을 봤을 때 그야말로 온 몸에 전기가 오르는 듯한 짜릿한 느낌이 밀려 왔다. 그가 연설을 한 1963년은 흑인민권운동이 노도(怒濤)와 같이 올라왔을 때였다.

 

그만큼 흑인들의 현실은 척박(瘠薄)했다. 킹 목사의 말대로 링컨 대통령이 노예해방에 서명한 지 100년이 지났음에도 많은 지역에서 흑인들은 사람대접을 받지 못했다. 킹 목사의 연설이 감동을 주는 이유는 매끄러운 명문으로 만들어졌기 때문이 아니라 행간 하나하나마다 평화와 평등의 진솔한 메시지가 담겨 있기 때문이다.

 

그는 자신의 형제들에게 ‘절망의 계곡’에서 뒹굴지 말라고 격려했다. "미시시피의 흑인들이 투표권을 행사하지 못하고 뉴욕의 흑인들이 마땅히 투표를 할 이유를 찾지 못하는 한 우리는 만족할 수 없다"고 외쳤다.

 

킹 목사는 정의가 실현되는 밝은 날이 오기 전엔 이 나라의 기반(基盤)을 뒤흔드는 폭동의 소용돌이가 계속될 것이라고 경고하면서도 폭력은 결단코 배격했다. “창의적 항거가 폭력으로 변질되어서는 안 된다”고 힘주어 말했다.

 

고난과 좌절의 순간에도 그는 “아직 꿈이 있다”고 했다. 불의와 억압의 열기에 신음(呻吟)하던 저 황폐한 미시시피가 자유와 평등의 오아시스가 될 것이라는 꿈, 자신의 자녀들이 피부색이 아니라 인격에 따라 평가 받는 그런 나라에 살게 되리라는 꿈, 흑인 소년소녀들이 백인 소년소녀들과 손에 손을 잡고 형제자매처럼 함께 걸어가는 꿈을 그는 그렸다.

 

오바마는 지난 1월 23일 사우스 캐롤라이나의 항구도시 찰스턴에 있었다. 그곳은 미국의 부끄러운 역사가 배어 있는 곳이다. 아프리카에서 붙들려 온 흑인노예들이 거래되는 노예시장이 보존돼 있기 때문이다. 발목에 쇠고랑을 차고 동물만도 못한 대접을 받으며 아프리카에서 잡혀온 흑인들은 사유물로 거래됐었다.

 

바로 그 역사의 현장에서 오바마는 연설을 했다. 찰스턴의 온순한 흑인들은 백인 앞에서 기를 펴지 못하고 주눅이 들어있다. 오랜 노예 역사의 후유증(後遺症)이다.

 

그날 그곳에 모인 흑인들은 오바마라는 흑인 상원의원이 대통령이 되겠다고 연설하는 모습을 보면서 눈물을 하염없이 흘렸다. 도저히 믿을 수 없는 일이 벌어진 것이다. 감히 흑인이 미국의 대통령이 되겠다니?

 

그러나 오바마는 거짓말처럼 대통령이 되었다. 찰스턴의 흑인들이 내민 5 달러, 10 달러의 푼돈으로, 연방 상원의원 4년 경력의 풋내기 정치인이, ‘버락 후세인’이라는 이상한 이름을 가진 흑인이, 하와이에서 태어나 인도네시아에서도 살았고 시카고에서 사회운동가와 인권변호사로 활동한 만 47세의 사내가 미국 대통령 역사상 최초의 유색인종 대통령이 된 것이다.

 

바야흐로 미국은 ‘인종차별’이라는 해묵은 멍에를 벗어던지려 하고 있다. 마틴 루터 킹 Jr. 목사가 35년 전 워싱턴 D.C.에서 수많은 군중 앞에서 피 토하듯 외친 ‘나에겐 꿈이 있습니다’는 버락 오바마 대통령 당선자가 시카고 그랜트 공원의 수십만 군중 앞에서 ‘우리가 사는 세상에 불가능은 없다’는 대답으로 꽃을 피웠다.

 

흑인대통령이 나왔으니 언젠가는 여성 대통령도 나올 것이다. 히스패닉 대통령도, 아시아계 대통령도, 언젠가는 한국계 대통령도 나올 수 있다. 비록 그것이 꿈일지라도 오늘의 우리는 오바마를 보고 희망을 얻는다.

 

 

과학자메달 오바마 연설.jpg

 

**이 글은 2008년 11월 10일 뉴시스통신에 송고한 특파원칼럼을 전재한 것입니다. 미국의 첫 흑인(유색인종) 대통령이 탄생한지 8년만에 첫 여성대통령이 탄생할 수 있을지 가늠해 보면서 다시 한번 독자 여러분께 소개합니다.

 

* 뉴스로 칼럼 '노창현의 뉴욕편지' 링크

 

http://newsroh.com/bbs/board.php?bo_table=cno&page=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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