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순신장군, 명량에서 12척이 아닌 13척으로 싸워
뉴스로=혜문 칼럼니스트 newsroh@gmail.com
시민단체 문화재제자리찾기(대표 혜문)는 문화재청에 보물 531호 명량대첩비의 설명 오류를 정정(訂正)해달라고 신청했습니다. 이순신장군은 명량해전(鳴梁海戰)에서 13척의 조선수군을 지휘, 133척의 일본군에 승리한 역사적 사실에도 불구하고, 문화재청은 명량대첩비 표지판 과 홈페이지에 ‘12척의 배로 133척의 왜적함대를 무찌른 상황을 자세히 기록하였다.’고 잘못 기술하고 있습니다. 명량해전과 관련된 아산 현충사 이순신 기념관에는 13척의 배로 싸웠다고 기술되어 있습니다.
명량대첩비는 이순신 장군의 승전을 기념하는 비석이자 일본의 문화재 파괴행위를 증언하는 중요한 역사적 자료입니다. 이런 중요한 보물설명에 관계자의 방만과 나태로 인해 잘못된 오류를 기술했다는 것은 도저히 간과할 수 없는 문제입니다. 문화재청이 즉각 오류를 즉각 인정하고 정정해 줄 것을 촉구하는 이유입니다.
보물 531호 명량대첩비는 1597년 진도 울돌목에서 이순신 장군이 13척의 배로 일본군 133척을 상대로 싸워 승리한 ‘명량대첩’을 기념하기 위한 승전비로 1688년(숙종 14)에 건립되었고 1969년 6월 16일 보물 531호로 지정되었습니다.
명량대첩비는 일제강점기인 1942년 총독부는 명량대첩비를 강제 철거(撤去)해 서울로 옮긴 뒤 경복궁 근정전 뒤뜰에 파묻었습니다. 해방이후 해남 주민들이 수소문 끝에 대첩비를 찾아내 1950년 다시 가져왔으나 원래 자리에 노인당이 들어서 어쩔 수 없이 900여 m 떨어진 문내면 학동리에 옮겨 놓았다가, 2010년 원래의 제자리를 찾았습니다.
해남 명량대첩비의 설명 표지판. 이순신 장군이 12척의 배로 133척의 왜적함대를 무찔렀다고 기술하고 있으나 사실관계의 오류다. 이순신 장군은 명량대첩에서 13척의 배로 왜적을 무찔렀다.
문화재청 홈페이지의 해남 명량대첩비 설명, 이순신 장군이 12척의 배로 133척의 왜적함대를 무찔렀다고 기술하고 있다. 그러나 이는 사실관계의 오류로 이순신 장군은 명량대첩에서 13척의 배로 왜적을 무찔렀다.
* 보물 제503호 명량대첩비 오류 정정에 관한 진정서
보물 제 503호 명량대첩비(鳴梁大捷碑)는 1597년 9월 16일의 명량해전을 승리로 이끈 충무공 이순신의 공적을 기념하기 위해 1688년(숙종 14) 3월 전라우수영이 위치한 해남 문내면 동외리에 건립된 비석입니다. 숙종은 이순신 장군이 울돌목에서 13척의 배로 133척의 일본함선을 격침 혹은 격파하여 해전을 승리로 이끈 사실을 기록, 명량대첩의 의의를 기리고 그 뜻을 후손에게 영원히 전하기 위해 비석을 세우도록 했습니다.
일제강점기 조선총독부는 임진왜란 당시 일본군의 패전, 만행, 약탈 관련된 기록이나 자료, 유적지는 모두 소각하거나 철거한다는 정책을 시행했습니다. 1942년 전라남도 경찰은 명량대첩비 등을 철거하라는 조선총독부의 지령을 받고, 서울로 옮겨 경복궁 근정전 뒤뜰에 묻었습니다. 1945년 광복이후 지역주민들의 노력으로 명량대첩비는 해남으로 돌아왔고, 2011년 3월 본래의 설립지인 전라우수영 자리에 되돌아 왔습니다.
그런데 문화재청의 명량대첩비 설명 표지판에는 잘못된 역사적 사실을 기재하는 치명적 오류를 범하고 있습니다. 표지판에는 이순신 장군이 “ 12척의 배로 133척의 왜적함대를 무찌른 상황을 자세히 기록하였다.”고 기술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순신 장군은 12척이 아니라 13척의 배를 이끌고 명량해전에서 승리한 것이 엄연한 역사적 사실입니다.
일제강점기 이후 파란을 겪었던 명량대첩비는 이순신 장군의 승전을 기념하는 비석이자 일본의 문화재 파괴행위를 증언하는 중요한 역사적 자료입니다. 이런 중요한 보물의 설명에 관계자의 방만과 나태로 인해 잘못된 오류를 기술했다는 것은 도저히 간과할 수 없는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이에 문화재청은 오류를 즉각 인정하고 정정해 주실 것을 간곡히 당부드립니다.
2016. 7.
문화재제자리찾기 대표 혜문
* 뉴스로 칼럼 '혜문의 제자리찾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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