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넨 박학다식이 중졸이야”
뉴스로=이계선 칼럼니스트
“따르릉 따르릉”
새벽 2시를 깨우는 전화벨소리에 나는 꿈을 꾸다말고 벌떡 일어났다.
“형님, 저 셋째 계응이예요. 저와 큰형님이 지난해 죽은 막내 완이네집 건물을 봐주러 내일 서울로 올라가요. 형님이 한국에 계시면 셋이 같이 가서 죽은 막내를 그리워 할텐데? 뉴욕에 사는 둘째 형님이 보고싶구 지난날이 그리워 전화했어요.”
계응이는 우리 7남매중 다섯째다. 위로 누나 둘 형 둘 아래로 누이와 동생이다. 첫째 계화누나는 미녀반장이요 둘째 계승형은 세상이 알아주는 모범생 효자였다. 셋째인 난 아예 6년내내 반장이었다. 손아래 누이동생 계낭이는 중학교때부터 교회에서 피아노반주를 하는 재원이었고 막내 계완이는 반장에 축구부주장이었다. 기라성 같은 남매들의 기세에 눌려서 그런지 계응이는 존재감이 약했다. 초등학교 졸업을 앞둔 어느날 계응이가 아버지에게 청했다.
“아부지, 저는 중학교진학을 포기하겠어요. 그 대신 둘째형이 고등학교 대학교에 다닐수 있게 해주세요.”
계응이가 살신성인(殺身成仁)의 자세로 양보하는 바람에 내가 고등학교와 대학에 다닐수 있게 된것이다. 초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계응이는 농사꾼이 됐다. 중학교 졸업후 나는 1년 반 동안 농사일을 해봐서 잘 안다. 미래가 없는 천덕꾸러기 중노동이다. 서울에서 야간고등학교를 다니는 난 마음이 아파 견딜수 없었다. 나 때문에 진학을 포기한 동생을 농촌에서 구해내야 한다. 기술을 배우게 하자 기술을.
1950년대 알아주는 기술은 운전사와 양복기술자였다. 그들의 월급이 초등학교 선생이나 면서기월급보다 훨씬 많았다. 운전사가 어떨까? 그런데 고영근목사의 설교를 듣고 겁이 났다. 고영근목사가 목회자수련회에서 이런 설교를 했기 때문이다.
“게을러 빠진 목사들은 운전사를 보고 회개해야합니다. 운전사들을 보십시오. 두손으로는 운전대를 붙잡고, 오른발로 액셀레이터를, 왼발로는 브레이크를 밟아요. 눈으로는 전면을 주시하면서 백미러 사이드미러를 봅니다. 귀로는 옆차가 보내는 크락숀소리를 듣습니다. 두손 두발 두눈 두귀 입등 몸의 지체를 모두 동원하여 운전하니 차가 쌩쌩 달려간단 말입니다. 얼마나 위대합니까? 그런데 목사들은 입만 갖고 살아요. 게을러요. 몸 전체를 사용하는 운전사를 보고 배우란 말입니다!”
아! 운전사는 대단한 거라구나. 아무나 하는 게 아니구나. 동생의 목표를 양복기술자로 바꿨다. 백방으로 알아보는데 토요일날 연락이 왔다. 추석이 낼 모레였다.
“시다몽을 구하는데 월요일 오전까지 와야 한다네.”
우와기 양복기술자를 우와몽, 심부름하는 사환을 시다몽이라 했다. 시외버쓰를 타고 평택으로 달려갔다. 안중가는 막차가 떠나버려 안중길 40리를 걸어갔다. 안중에 도착하니 새벽 1시였다. 안중에서 글갱이까지 20리가 산길이라 혼자서는 무서웠다.
그런데 인간도처유청산(人間到處 有靑山)이다. 신선(神仙)은 어디를 가나 청산(靑山)을 만나고 나는 새벽 1시에 안중에서 미녀를 만났으니 말이다. 앞집에 사는 제옥이가 서방님을 기다리듯 서있지 않은가! 추석을 세려고 서울에서 내려오는 제옥이가 막차로 안중에 도착했으나 날이 어두워 혼자서 갈수가 없었다. 4시간째 구원자를 기다리고 있는데 앞집총각이 나타난 것이다. 흑기사를 만난 공주처럼 그녀는 반가워했다. 제옥이는 여동생의 친구였다. 남자들을 제치고 반장을 지낸 미녀였다. 잔치놀이를 하던 꼬맹이시절 나의 단골신부였다. 우리는 몰래 그리워하는 사이였다.
글갱이 가는길은 숲도 마을도 잠들어 사방은 고요했다. 낼모레가 보름이라 추석의 가을달빛이 밤길을 하얗게 물들이고 있었다. 우리는 그 길을 걸었다.
이렇게 해서 서울로 올라온 계응이는 을지로 입구에 있는 신창양복점의 시다몽이 됐다. 20명이 일하는 전국 7번째가는 대형 양복점이다. 청소를 하고 다리미숯불을 피우고 심부름을 하는 계응이의 손은 동상으로 얼어터지고 불에 데어터져 성할 날이 없었다. 일요일이 되면 나는 퉁퉁 부은 계응이 손을 잡고 울었다.
4년후 계응이는 멋진 우와몽(양복기술자)이 됐다. 삼양동버스 종점에 있는 삼양라사로 직장을 옮겼다. 주인은 찦차에 사냥개를 태우고 전국의 산하를 누비는 멋쟁이였다. 장군의 체구에 배우뺨치는 미남인데 부인 역시 미녀였다. 그런데 더 잘생긴 미녀는 그집의 무남독녀 외동딸이었다. 대학교에 다니는 그집 딸은 공주처럼 도도하고 여배우처럼 예뻤다.
삼양라사에서 4년을 지낸 어느날 계응이가 고민을 털어놨다.
“삼양라사를 고만두고 시골 안중으로 내려가 머리를 식히며 살고 싶어요.”
“왜? 주인이 싫어하니? 그집 무남독녀가 너를 무시해서 그런가 보구나”
“그게 아니에요. 주인은 날 아들처럼 아껴줘요. 그런데 쌀쌀하게만 굴던 그집 딸이 어느날 나에게 사랑을 고백하는 거예요. 결혼하재요. 주인사장님 허락받는건 문제 없어요. 그런데 초등학교만 다닌 나는 아닌것 같아요. 그래도 형님이 허락하신다면...”
난 뜸을 들이고 난후 한숨을 쉬었다.
아내가 너무 잘나면 남편은 평생 내시처럼 몸종노릇을 해야 할텐데...”
계응이는 안중으로 내려왔다. 3년후에 고등학교 졸업한 여자가 청혼을 해왔다. 나는 NO 싸인을 보냈다. 좀 있더니 이번에는 중학교 졸업한 아가씨다.
“OK, 자네는 초등학교만 나왔지만 무서운 독서열로 박학다식(博學多識)이 중졸실력이니까”
계응이는 안중에 내려와 동일양복점을 차렸다. 맨땅에 박치기하듯 시작은 힘들었다. 동일양복점이 자라나더니 5층짜리 동일빌딩을 짓고 많은 부동산을 사들였다. 자녀들 모두 잘 풀려 나갔다.
“형님, 2, 3년 후에 사업정리하고 우리부부가 세계여행을 하려고 합니다. 그때 뉴욕에 사시는 형님을 찾아뵙겠습니다”
계응이 전화 받고나니 고향생각 절로난다. 파킨슨병으로 먼 여행을 할 수가 없어서 더 그런가 보다. 낼 모레가 추석이라 고향 더욱 그립다. 이번 추석에는 애들이라도 불러서 돌섬추석을 쇠야겠다.
* 글로벌웹진 뉴스로 칼럼 등촌의 사랑방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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