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로=김태환칼럼니스트 newsroh@gmail.com
한국전쟁휴전을 빨리 달성시키겠다는 공약을 내세워 미국 대통령에 당선되어 주변의 강력한 반대도 물리치고 일로 휴전 성취에 매진하여온 아이젠하워 대통령은 오랫동안 난항(難航)을 거듭한 포로 송환 문제가 타결되어 (1953년 6월 8일) 휴전 조인식을 눈앞에 둔 시점에서 휴전 반대에 “단독 북진”을 외쳐오든 이승만 대한민국 대통령이 느닷없이 27,000 명의 반공 포로를 석방하여 휴전 교섭을 와해시키려 하였다.
이에 극도로 분노한 아이젠하워 대통령은 당장 이박사 제거를 지시하였으나 주변의 만류로 진정했지만, 당시 워싱턴에 업무차 출장중이든 백두진 국무총리가 덜레스 국무장관에게 호출당해서 장시간 동안 이 박사 대신에 질책을 당했다.
아직까지 한국에서는 반공포로 석방이 무슨 “영웅적 쾌거” 인 것 같이 칭송하고 야단이지만 그로 인해 우리 장병 약 3 만명의 인명 피해를 입었다는 사실을 거의 모르고 있기 때문이다. 이 박사는 물리학의 기본인 “작용에는 반작용이 따른다”는 아주 간단한 법칙조차 인식하지 못하고 자신의 행위에 대해서 상대방이 어떤 반응을 보일지는 생각도 않고 해놓고 보자는 식으로 해서 아깝게도 수많은 우리 장정들을 도살장에 보내고, 하마트면 자신의 생명조차 잃을 뻔 했으며, 무엇보다 휴전 조인이 약 5 주 지연되는 바람에 미군 5천 여명의 인명 손실을 입어서 아이크는 이 박사의 어처구니 없는 무모한 행위로 그 많은 미국인 자제들이 피해를 입었다고 이 박사에 대해 곱지 않게 여기게 되었다.
전에도 설명했지만, 반공 포로 석방을 그때 해야 할 아무런 특별한 이유가 없었다. 왜냐하면, 포로 송환 규정이 타결 났기 때문에 북으로 송환을 거부하는 포로는 휴전 조인 후에 자신이 송환을 거부하면 남쪽을 넘어와 석방하도록 되어 있었다.
휴전 직전에 중공측에서 금성천 전투를 감행하여 한국군에 전쟁 발발후 최대의 인명 피해를 입힌 것은 이 박사에게 “단독 북진”이 불가능하다는 점을 각인(刻印) 시키려는 속셈이었다.
그 당시 유엔군 사령관 클라크 대장은 금성천 전투의 결과를 이렇게 평했다: “내 생각으로는 중공군이 7.13 최종 공세를 벌인 –유일한 이유가 아니라 하더라도—중요한 이유 중의 하나는 한국군에게 한방 쥐어박아서 코피가 터지게 만들어 ‘북진’이 말하듯 그렇게 쉬운 것이 아니라는 점을 한국과 전 세계에 알려 주려고 한 것 같다.” 짧지만 의미심장한 논평으로 생각된다.
휴전 이후 다음해 4 월 부터 제네바에서 열린 정치 회담에서 통일에 대한 합의를 이루어내지 못하고 끝나자, 이박사는 아이젠하워 대통령 초청으로 워싱턴에 가서 7월 29일 정상 회담에서 한반도 통일을 위한 “조그만 전쟁” 을 다시 시작하자고 보챘지만, 아이젠하워 대통령은 조그만 전쟁으로 생각하지만 쏘련도 개입하게 되어 핵무기를 사용하는 세계대전으로 확대되어 한반도만 파괴되는 것이 아니라 미국의 대도시도 파괴되면 수백만명의 인명 피해가 나며 인류의 문명을 파멸시키는 가공스러운 전쟁이기 때문에 “조그만 전쟁”을 시작할 수 없다고 못박았다.
그는 이 박사의 통일 염원은 수긍하지만 통일을 위해 전쟁을 시작하는 것은 있을 수 없다며, (당시) 독일, 오스트리아도 분단국가이지만 그들의 통일을 위해 전쟁에 나설 수 없는 것과 같다면서 새로운 전쟁 시도를 단념하도록 촉구했다. 이 때 이박사는 아이젠하워 행정부에 자신의 입장에 동조하거나 협조하는 인사가 한 명도 없다는 것을 현장에서 확인했다.
이 박사는 자신의 최대의 후견인인이었든 맥아더 장군이 파면돼서 본국에 송환 당한 이후 미 행정부에 지지 세력이 없음을 뼈저리게 느껴왔다. 그래서 그는 동남아 (라오스 등)에서 공산 세력이 강화 될 때마다 미국에 대해 한국군을 파견해서 싸우겠다고 자청했다. 그렇지만 그 때마다 미국은 이를 받아주지 않고 “노, 땡큐 (No, Thank You)”로 응대했다.
<사진 트루먼 대통령도서관 DB>
이 박사의 첫째가는 외교적 성과라고 꼽히는 “한미 방위조약” 이 실제로 자신을 올가매는 올가미 역할을 하였다는 사실은 당사자인 이박사도 몰랐고, 한국측 인사들은 거저 감지덕지(感之德之)했는데, 방위 조약을 미국측 입장에서 보면 첫째, 한국의 대소 봉쇄 전진 기지 일환으로서의 역할; 둘째, 북한이 감히 다시 남침할 수 없게 하는 재침 방지 역할; 그리고 셋째, 이 박사가 단독 북진이라는 돌출 행동을 하지 못하도록 억제하는 역할이 포함되었다.
미국은 대한민국을 대쏘 방위막의 일부로써 뿐만 아니라, 신생 민주 국가의 쑈 케이스로 대외적으로 내세우려 했으나, 미국에서 근 40 여년을 살았든 이 박사는 대한민국 건국후에 민주 정치를 행한 적은 없고 국회의원들을 마음대로 잡아 가두고, 헌법이 휴지 조각인양 마음대로 갈아치우며, 선거도 형식적으로 치루고 개표를 조작해서 정권을 연장하여서 반 이승만 구호가 자칫 반미 구호로 바뀔까 염려되어 1960 년 선거에 대비하여 이승만의 대타로 진보당의 조 봉암을 비밀리에 지원하는 것을 눈치채고, 이중간첩 양명산을 이용하여 조봉암 당수를 간첩으로 몰았다.
1958년 크리스마스 이브 (12월 24일 밤)에 야당 의원들을 무술 경위를 동원하여 한곳에 감금시킨 다음 여당 의원만으로 보안법 개악을 했다. 이렇게 폭력적인 법안을 처리한 이유는 종전에 간첩죄로는 사형을 시킬 수 없었기 때문인데, 조봉암 당수를 죽여서 1960 년 선거에 출마하지 못하도록 만들기 위해서 였다. 이 소동을 24 파동이라 부른다. (날짜를 그렇게 잡은 것은 미국의 연말 휴가 기간에 해치우려 했으나 이 박사의 일거수 일투족을 계속 주시하는 미국 정보망을 빠져 나갈 수는 없었다.)
폭력적으로 야당의원을 감금하고 위법적 법안을 통과시킨 것을 보고 받자 미국의 아이젠하워 대통령은 당시 크리스마스 휴가중이지만 이 박사에게 친서를 보내며 비민주적 양태에 심한 불쾌감을 표시하였다. 또한 이박사와 절친한 월터 져드 하원 의원도 유감의 편지를 의원들의 대표격으로 이 박사에게 보냈다. 이렇게 미국 대통령이 한국 사태에 즉각적인 반응을 보인 것은 유례가 없는 일이고 야당 당수 체포시부터 더 엄중히 이 박사의 동태(動態)를 철저히 살피라는 훈령이 내려졌을 것으로 보인다.
새해 (1959년)에 들어서 미국은 이 박사의 통치 행위에 대한 심한 불쾌감의 표시로 다울링 대사를 본국으로 업무협의차라는 명목으로 소환조치를 했다. 이 박사는 대사 소환의 외교적 의미를 모른듯 했다. 다울링 대사가 본국 귀향 인사를 가자 이 박사는 잘 갔다 빨리 돌아오세요라고 인사말을 했단다
다우링 대사는 본국에 가서 무려 한 달 있다가 서울로 귀임했는데, 그가 한 달 동안 워싱턴에서 머물면서 한국의 정치 상황을 자세히 브리핑하고 미국의 반응을 제시했을 것으로 보이며, 기록에는 없지만, 아이크와도 만나서 뒤에 벌어질 이박사 제거 작업에 관한 의견을 나눴을 것으로 추정된다.
2월 들어서 소위 “여적” 필화(筆花) 사건이 일어나자, 경향 신문을 폐간 처분하여 전형적인 독재자의 언론 탄압을 했다. 대법원은 양명산이 거짓 증언을 했다는 자백을 무시하고 조봉암 진보당수를 사형 언도하였고, 다울링 대사가 여러 번 이기붕 국회 의장 (당시 제2 인자) 을 만나 감형을 하고 목숨은 살리라고 간원했으나 7월 31일 사형을 집행했다. 미국이 조봉암 당수가 간첩이 아니고 조작인 것을 알고 있었으니까 그의 구명 운동을 했지, 그렇지 않다면 구명 운동을 했을리가 만무하다.
6얼 25일 백악관에서 열린 NSC 회의에서 대한민국과 이승만 대통령에 관한 중대한 토의를 하고 결정사항을 문서로 작성해서 일급 비밀로 보안 조치를하였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1953 년 휴전 직전에 이승만 대통령이 불필요한 반공 포로 석방을 사전 협의 없이 결행하여 아이젠하워 대통령의 신뢰를 잃었음에도 불구하고 정상 회담 때 통일을 위한 전쟁 개시를 보채어서 “작은 전쟁”이 미쏘간의 핵 전쟁을 유발시킬 염려와 전쟁의 결과는 가공할만하다고 설득했으나 두고두고 단독 북진을 외쳐대는 이박사는 마치 언제 다시 폭발할지 예상할 수 없는 휴화산과 같아서 종전의 반공 포로 석방으로 큰 피해를 입은 전례를 답습(踏襲)하지 않고 먼저 있을 수 있는 모든 상황에 대한 예방 조치를 취하기로 하였다.
아이젠하워 대통령은 대한민국 (이 박사) 이 북한에 대해 일방적 공격을 사전에 방지하기위해 이 박사의 실각을 포함한 모든 조치를 취해야한다고 강력히 천명했다. 이박사의 행위에 대해 이 박사에게 귀책(歸責) 할 뿐만아니라, 대한민국 국가에 대해서도 책임을 물어서 “대한민국 군대가 일방적으로 (북한에 대한) 적대 행위를 재개하는 경우에 미합중국은 전투재개행위 자체가 한미 상호 방위조약이 폐기시키게 된 것으로 간주하고 그 당시 필요한 미국의 안보 이익을 보호하는데 필요한 조처를 취해야 한다.
다시 말해서 이 박사가 단독 북진 기미만 보여도 즉시 실각시키고, 한미 상호 방위조약이 일방적을 폐기되는데, 이는 미군이 한국에 주둔하고 있으며, 한국군이 유엔군 사령관의 작전 지휘권 아래 놓여 있기 때문이다. 한미상호 방위 조약 너무 좋아하지 마시기 바란다. 이 박사가 그 이듬 해 권좌에서 축출(逐出)당하고 하와이로 귀양 가는 것이 다 이날 회의 결과이다.
그무렵 (8월 1일) 미국 CIA 는 이승만 대통령이 정신 집중력이 약해져서 정무를 살피지 못하고 30대 초반의 박찬일 비서가 영부인 프란체스카 여사 협의해서 국무를 처리한다고 보고했으며, 이 보고서를 받은 국무부는 다울링 대사에게 이 박사의 정신적 신체적 건강을 보고하라는 훈령을 내려서, 다울링 대사가 8월 15일 본부에 보고한 전문을 통해서 한국 정부의 정무는 사실상 박찬일 비서가 관장하며, 이 박사는 자신이 3년전 부임시 보다 훨씬 집중력이 떨어지고 한 가지 사항을 적어도 3번 이상 설명해야 겨우 알아 듣고, 새로운 일에 흥미를 느끼는 것보다 지난 일을 회상하며 담화하는 쪽을 더 좋아한다고 이 박사의 근황(近況)을 설명했다.
여기서 주목할 사실은 이 박사가 노망으로 헌법에 규정한 임무를 수행하지 못하고 그의 30 대 비서 박찬일이 국정을 농단하여, 미국 문서에는 그를 라스푸틴 (제정 러시아 말기에 포정을 일삼은 괴승)에 비유하였다. 또한 제 2인자인 이기붕은 자신의 건강이 나빠지고 있어서 이 박사와의 면담을 스스로 기피하여 대한민국은 문자 그대로 “병신 공화국” 이 되어 버렸고 인의 장막을 치고 있는 상황에서 국민들은 경무대 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알 수가 없었다. 법적으로 보면 실질적 대통령의 “유고” 사태로 볼 수 있다.
한국내에서는 야당 당수를 사형에 처하고 신문사를 폐간하는 등 언론 탄압을 하는 폭압 정치아래에서 이러한 상황을 알았다 해도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이 싯점에 군사적으로나 경제적으로 대한민국을 뒷받침해주는 나라는 미국이었고, 한국이 잘못하는 것에 대해 세계 여론의 뭇매를 맞는 미국이 수혜국 (Client Country) 인 대한민국과 그 국민의 공익을 위해 간여(干與) 하는 일을 반드시 나쁘다고 할 수 없다.
한국 사태를 예의 주시하든 아이젠하워 대통령은 이 박사가 정신력이 떨어지고 국정을 정상적으로 살필 수 없다는 보고를 받고, 미국 원조의 쑈 케이스인 대한민국의 선장이 심장마비를 일으켜 대양을 표류하는 여객선이라 생각이 되어 정신 잃은 대한민국호의 선장을 바꿔야 한다는 결심을 하고 먼저 유화책으로 이 박사와 절친한 월터 져드 하원 의원을 특사로 선정하여 비밀리에 한국에 보내 경무대로 가서 이 박사에게 연만(年晩)하시니 자리를 젊은 분에게 물려주고 은퇴하는 것이 좋겠다고 친구의 입장에서 우정어린 충고를 하였다. 그러나, 권력에 집착이 강한 이 박사는 “씨익” 웃으며 영광스럽게 물러날 기회를 놓쳤다고 한다.
이 사실은 정식 외교 채널을 통하지 않고 아이크의 비선 라인을 활용했기 때문에 한미 양국의 외교 관계 기록에 나오지 않아서 학자들이 알 수 없어서 전혀 알려지지 않았으나 필자가 외교관 회고 회견기에서 져드 의원을 경무대로 안내한 당시 미대사관 와츠 서기관이 증언을 남긴 것을 발견하고 최초로 발표하였다. 그러나 면담 날짜는 언급하지 않아서 1959년 늦여름 쯤으로 추측할 따름이다.
<下편 계속>
* 글로벌웹진 뉴스로 칼럼 '김태환의 한국현대사 비화'
http://www.newsroh.com/bbs/board.php?bo_table=kth