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下>미국의 이박사 제거작전 막전막후
뉴스로=김태환칼럼니스트 newsroh@gmail.com
강력한 라이벌을 간첩으로 몰아 사형시켜서 이 박사는 수월하게 당선을 기대했는데 또 다른 야당의 조병옥 대통령 후보가 신병 치료를 위해 미국에 가 있다가 병세 악화로 죽어서 이 승만 박사는 그해 3월 15일에 실시한 제 4대 정부통령 선거에서 무투표 당선이 확정된 셈인데, 그의 후계자가 될 이기붕을 부통령으로 만들기 위해 이 박사 측근 세력들이 온갖 부정을 저질러서 각처에서 부정선거 규탄 운동이 일어나자 무력으로 강제 진압했다. 마산에서 고등학생 한명 (김주열)이 경찰이 발포한 총격에 사망했고, 시신이 며칠 후 마산 앞바다에서 떠올랐는데 눈에 최루탄이 박혀있어서 신문에 난 처참한 모습을 본 시민들이 다시 들고 일어나 소요(騷擾)가 확대되었다. 서울에서는 4월 18일 고려대학생들의 부정 선거 규탄 궐기 대회를 마치고 학교로 돌아가는 고대생들을 정치 깡패들이 습격하여 다수의 부상자를 발생시켰다.
그 다음날 (1960년 4월 19일)에는 서울 대학교를 위시한 서울 시내 모든 대학생들과 심지어 일부 고등학생들까지 부정 선거를 규탄하는 구호를 외치며 국회 의사당을 거쳐 중앙청 앞을 지나 효자동 길로 올라가 경무대를 향했다.
노도와 같은 부정 선거 규탄 데모대가 청와대로 몰려들어오자 경무대 경찰대는 데모대에게 실탄 사격을 가해서 사상자를 속출(續出)시켰다. 경찰력으로 시위대 진정에 자신을 잃은 정부는 그날 계엄령을 하오 1시로 소급해서 발효시켰다.
송요찬 참모총장을 계엄 사령관으로 한 계엄군이 서울 시내로 진주해서 데모대를 해산시킬 수 있었다. 대전 협정에 의해 한국군 작전 지휘권을 가진 미군측은 4.19 의거가 진정한 민의에 의해서 일어난 만큼 게엄군 동원에 재가는 하지만 시민들에게 발포하지 않도록 조처한 것으로 보인다. 계엄군(서울 지구 제 15 사단: 사단장 조재미 준장)은 부대를 출발할 때부터 행정적으로는 대한민국 국방부 예하에 속했지만, 사실상 유엔군 사령관의 지휘 통제하에 있었다. (혹시 반론자가 나오겠지만, 미국은 대전 협정과 한미상호방위조약을 이용하여 이승만 대통령까지 제거할 계획까지 세웠는데, 계엄군 지휘는 식은 죽 먹기와 같다.)
미국은 즉각 반응을 보여 당일 매카나기 미국대사는 이 박사를 만나 국민들의 정당한 불만 들 (Justifiable Grievances)을 해소(解消)시키도록 조언하였다. 미 대사는 대사관에 귀환한 즉시 대학생들의 행동을 지지한다는 성명을 발표했다. 이와 같은 맥락에서 미 국무부는 양유찬 한국 대사를 호출해 항의 각서를 전달했다. 또한 미국무부는 기자회견을 통해 다음과 같은 사실을 밝혔다.
"국무부는 금일 오후에 한국에서 확산되고 있는 국민의 불안과 폭력행위에 대해 우려하고 있으며... (중략) ...미국 정부는 한국의 시위가 근래의 선거와 비민주적이고 강압적인 방법에 대해 품고 있는 국민들의 불안을 반영하는 사건으로 이해한다는 것을, 양유찬 대한민국 대사에게 통고하였습니다..."
이틀 뒤에 매카나기 대사는 다시 경무대로 가서 이 박사를 만나 허터 미 국무장관의 각서를 전달했다. 당시 4.19사태를 쉽게 가라앉힐 수 있다고 생각한 이 박사 측근들은 이박사의 자유당 총재 사퇴와 이기붕 부통령 당선자 사퇴로 일을 처리할 속셈을 나타냈다. 그러나, 며칠 후 4월 25일 미국 대사관으로부터 신변 안전에 대한 확약을 사전에 확보한 200 여명의 대학 교수단 데모가 일어나서 그들은 이박사 하야(下野)를 최초로 요구하자, 다시 데모가 재연하였지만 계엄군이 질서유지에만 전념하고 데모대에 대한 체포나 발포를 하지 않았다. 다음날 (4월 26일) 시민 대표가 경무대로 가서 이 박사와의 면담에서 사태 수습을 위해 이 박사의 하야를 요구하였고, 따라서 그날 방송을 통해 그는 유명한 “국민이 원한다면, 하야하겠다”는 성명을 발표했다. 그래서 국민들은 이 박사가 자진 하야한다고 믿었다. 그러나, 이 박사의 자진하야는 눈감고 아웅하는 식이다. 그는 술수에 능수능란(能手能爛)한 사람이다. 국민들은 “국민이 원한다면” 이라는 단서는 외면하고 “하야 하겠다”는 말에만 안목을 집중하였다. 그는 당장 위기만 빠져나가면, 데모대가 하야를 요구했지만, 선거에서 보여준 약 90% 대의 압도적 국민이 자신을 대통령으로 선출했으니 대다수 국민이 자신의 하야를 원치 않는다고 오리발을 내밀려 한 것이다. 이 점을 놓치지 않은 곳이 미 대사관이었다. 매카나기 대사는 단서(If --- Clause) 가 붙는 조항은 하야 할 의사가 없는 것으로 보고 이 박사를 압박하여 그의 실질적 사퇴를 강권하여 받아냈다. 그러나, 그것으로 문제가 일단락이 나지 않았다.
이 박사는 그 다음날 (4월 27일) 국회에 대통령직 사퇴서를 보내야하는데 서명을 거부하는 바람에 전 국무위원 사퇴로 자리가 빈 수석 국무위원 겸 외무장관에 취임한 허정 씨가 오랫 동안 구슬려서 겨우 서명을 받아냈다고 한다.
정적을 사형시키는 등 온갖 방법의 불법을 저지르며 권좌에 연연한 이승만 박사가 어떻게 대통령직에서 쉽게 물러날 수 있었느냐는 질문에 당시 미대사관의 실세였든 마샬 그린 씨는 후에 외교관 회고 회견기에서 그 전 해(1959년) 에 이미 아이젠하워 미국 대통령이 져드 하원 의원을 비밀 특사로 보내서 이 박사에게 하야를 권고한 사실이 있었기 때문에 이제 와서 발버둥쳐봐야 더 지탱하지 못할 것을 알아차리고 운명으로 받아들인 것으로 본다고 답변했다.
그의 회견록을 보면, 자신의 부인이 하는 말을 인용하는 형태를 빌려서4.19 이후 급박하게 돌아가는 사태 처리 기획은 자신이 담당하고 대외적 행위 (이 박사 면담, 국방장관등 한국 관료 접촉, 그리고 맥그루더와의 조율 등) 는 매카나기 대사가 담당했다고 밝혔으며, “정당한 불만”이란 용어는 자신이 고안했다고 토로했다.
이 박사의 사직서가 국회에서 받아들여져서 이박사는 그의 사저인 이화장으로 옮기고 허정씨가 내각 수반으로 새 로운 선거로 새 통치 방식이 확정되기까지 과도 정부를 운영해 나갔다.
이화장으로 옮긴 다음에 일어난 아주 재미있는 일화가 있다. 이 박사가 사퇴한 다음에 아이젠하워 대통령은 그의 용퇴를 칭송하면서 은퇴 생활을 평안히 지내시라는 친서를 대사관을 통해서 보냈는데, 그 편지를 전달한 사람이 바로 전해에 져드 비밀 특사를 경무대에 안내한 와츠 서기관이었다.
앞서 언급한 그의 회고 회견기에 따르면 이 박사가 편지를 읽은 다음에 아이크의 편지에 침을 홱 뱉은 다음에 땅에다 내던졌다고 한다. 이는 이 박사가 “아이크 네 이놈, 나를 내쫓아내고 무슨 엉뚱한 소리를 하느냐!!” 라고 말은 안했지만 불쾌감을 들어낸 것이다. 이 상황을 그대로 회고해서 말한 그는 본국에까지 그 얘기는 하지 않았다지만, 사실 여부는 누가 알랴?
그런데, 이 박사가 권좌에서는 물러났으나, 자의든 타의든 이화장으로 사람이 몰리자 (필자는 모 장성이 이화장을 방문했다는 기사를 지금도 기억한다) 미국측에서는 이 박사가 벼락을 빨아들이는 피뢰침 (Lightning Rod) 과 같이 언제 또 무슨 일을 저지를지 모른다고 불안스럽게 생각되어, 그를 미국으로 내보낼 작정을 하였다. 마샬 그린의 회견기에 따르면 이박사 부부를 CIA 비행기에 태워서 하와이로 보냈다. 이 박사 내외 하와이 이송 작전에는 허정 과도 정부와 미 대사관측이 손발을 잘 맞춰서, 이 박사가 하와이 교포 성금으로 마련한 전세기로 하와이로 망명 갔다는 대내 홍보용 각본을 짜서 발표했다. 이것을 사람들이 50 여년이 지난 지금까지 그대로 믿고 있다.
4. 19 당시 희생된 수백명의 한국 민주 열사들 덕분에 언제 폭발할지 모르는 휴화산 같은 이 승만 박사의 거동을 불안한 눈초리로 전전긍긍(戰戰兢兢)하던 아이젠하워 행정부는 손에 피 한방울 묻히지 않고 “늙은 옹고집쟁이” 이승만 박사를 권좌에서 축출했을 뿐만 아니라 다시는 한국 정치에 손댈 수 없도록 미국으로 사실상 납치해갔다.
허 정 수반이 이 일에 협조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은 이 박사를 권좌에서 내쫓는 미국의 힘을 옆에서 직접 목도한만큼 달리 방도가 없었고, 이 박사의 은덕을 입은 허정 수반이 훗날 한국 법정에 서게 되는 상황을 모면시켜 준다고 보았다.
이 박사 축출의 주역 마샬 그린은 이번 축출 작전에 대성공을 거두어서 국무부 안에서 쿠테타 고수(Coup Master) 로 명성을 떨치며, 뒤에 인도네시아에 대사로 가서 스카루노 대통령을 몰아내는데 역시 그의 솜씨를 발휘했다.
이 박사가 출국하는 장면은 경향 신문에서 알아서 (아마 미대사관에서 귀띔을 해서) 호외도 발간하고 대서특필(大書特筆)했는데, 이 박사는 당시에 정신이 오락가락해서 그저 한달쯤 휴양가는 것으로 알아다고 하며, 영부인 프란체스카 여사는 그 때 나가면 장기간 못 돌아 올 줄 알았으며, 허 정 수반이 필요한 경우에 그녀의 본국 오스트리아(Austria)로도 갈 수 있도록 복수 여권을 만들어 주었다 한다.
“망명”이 아니었다는 것은 벌써 본국의 언론인들이 확인했다. 즉 하와이 교포들이 전세기 경비를 마련하기 위한 하와이 교포들의 성금을 모금한 적 없었다고 밝혀졌으니, 전세기가 왔을리 없고 마샬 그린이 말한대로 CIA 비행기를 타고 간 것이 틀림없다. 그만한 자리에 있었던 분이 없었든 일을 조작해서 발표할 이유가 없다.
필자는 아이젠하워 대통령을 가장 존경하는데 첫째, 한국에 휴전을 달성시켜서 적어도 남한이 세계적으로 경제력 있는 나라가 되도록 하였다. 10 여년이 넘었으나 이락과 아프가니스탄은 아직도 전화(戰禍)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했다.
다음으로, 미국에서 근 40 여년을 살았으나 민주 주의를 실천한 것은 눈을 씻고 봐도 없으나 온갖 부정 비리를 자행하고 헌법을 휴지조각처럼 마음대로 주물러 집권을 연장하며, 아주 요상한 배일주의(排日主義)를 내세우면서도 진작 우리 동포를 괴롭혔든 친일 분자들은 중용해온 이 승만 박사를 축출시켜서 우리 국민에게 숨통을 틔워주었기 때문이다.
끝으로 이 글을 통해 우리 국민들이 아직까지 잘못 인식하고 있는 이 박사에 관한 두 가지 신화 즉, “자진 사퇴” 와 “자진 망명”을 철저히 불식(拂拭) 시키고, 이 박사가 안해도 되는 반공 포로 석방한 것은 “영웅적 쾌거”가 아니라 삼만 여명의 우리 국군 장병들을 도살장(屠殺場)에 끌고 갔다는 사실을 알리며 이를 기반으로 “이 박사에 대한 잘못된 역사 바로잡기” 운동에 온 국민이 동참하시기 바란다.
* 글로벌웹진 뉴스로 칼럼 ‘김태환의 한국현대사 비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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