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주받은 시인’ 보들레르(1821-1867년)와 함께 가을철낭만을 즐겨보는 로맨틱라이프 전시회로 초대한다. 시인이자 예술평론가였던 보들레르의 시각을 통해 19세기중반 낭만주의 예술세계를 조명하는 기획전 ‘보들레르의 눈(L'oeil de Baudelaire)’이 라비로망티크 박물관(Musée de la Vie romantique)에서 개최되고 있다.
간간히 곁들인 보들레르의 짧은 평론과 함께 들라크루아를 비롯한 앵그르, 코로, 도미에, 루소, 나다르 등 당대 예술가들의 화폭, 조각, 사진, 판화 100여 점이 소개되고 있다. 앵그르의 신고전주의와 들라크루아의 낭만주의 투톱시스템이 석권하던 1840년대 미술계로부터 쿠르베의 사실주의, 19세기 모더니즘을 대변하는 마네에 이르기까지 ‘악의 꽃’의 시인을 매혹했거나 거부반응을 일으킨 예술계를 반추한다.
▶ 천재시인 탄생을 예고한 예술평론가
1857년 6월 ‘악의 꽃’을 출판한 보들레르는 2개월 후에 6개 시작품 속에 담긴 퇴폐성과 외설로 재판에 회부된다. 4개월 후에는 소설분야에서 불문학사에 굵직한 획을 그은 플로베르를 지지하는 글을 발표하는데, 공교롭게도 같은 해 1월 ‘보바리 부인’의 저자 역시 같은 죄목으로 법정판결을 받았던 때문이다.
‘악의 꽃’과 더불어 탄생된 천재시인은 1845년에 미술평론 ‘1845년 살롱전’으로 문단에 데뷔했다. 그는 시적인 언어와 심미적인 감각으로 예술을 논평하면서 동시에 새로운 비전을 제시하는 평론가로서 독보적인 역할을 담당했다.
저서 ‘낭만주의 예술(L'Art romantique)’에 실린 ‘리하르트 바그너와 탄호이저’ 평론은 현재에도 음악도들에게 좋은 참고서가 된다. 무명시절 파리에서 빈곤한 생활을 보냈던 바그너는 1861년 3월 파리오페라 극장에서 ‘탄호이저’를 공연하며, 이때 보들레르는 시와 음악의 긴밀한 관계를 설명했다. 1863년 발표한‘들라크루아의 삶과 예술’도 유명한 평론 중에 하나로 꼽는다.
훌륭한 평론은 차갑고 지나치게 계산적이지 않으며 예술가에 대한 애착심이나 적대감도 없이, 그의 정신세계를 시적감성에 의해 객관적으로 흥미롭게 끌어내는 작업이라고 보들레르는 피력했다.
▶ ‘내일 불어올 바람을 미리 체감하는 예술가’
보들레르는 완성된 화폭보다는 만들어지는 화폭을 선호하며, 정신적이고 감각적인 예술세계로의 여행을 통해 예기치 않는 발견이나 만남을 추구했다. 무엇보다도 대담성과 노골성, 순수성이 담긴 화폭을 지향했다.
특히 그는 ‘내일 불어올 바람을 미리 체감하는 예술가’의 탄생을 기대했다. 이는 들라크루아의 낭만주의 열풍은 내리막길로 접어들으며, 새로운 사조의 모더니즘 열풍을 일으킬 예술가의 출현이 불가피하다고 판단했던 때문이다. 그럼에도 보들레르가 평생토록 변함없이 찬미했던 화가는 들라크루아이다.
쿠르베(1819-1877년)와의 관계를 보자면, 1848년 이들은 절친한 친구가 되지만 이후 차츰 찬바람이 도는데, 보들레르가 사실주의 화폭에 거부반응을 지녔던 때문이다.
보들레르의 취향대로 모더니즘을 구사한 대표적인 화가로는 콩스탕탱 귀(Constantin Guys, 18021-1892년)를 꼽는다. 화류계 여성들의 모습을 포함하여 19세기 파리의 현대성을 그려낸 그의 수채화와 데생들이 이번 기획전에 다수 소개되고 있다.
보들레르는 렘브란트와 고야에게도 관심을 기울였던지라, 그의 짧은 평이 첨가된 고야의 화폭도 기획전에 참여했다. “고야의 참된 진가는 파격적이도록 끔찍한 유사성을 만들어낸데 있다. 아무도 감히 시도하지 못했던 부조리”라고 보들레르는 평했다.
유명한 쿠르베의 ‘보들레르의 초상(1848년)’을 비롯하여, 마네가 1860년대에 제작한 초상화, 나다르의 사진을 통해 당대 예술가들의 시선으로 바라본 보들레르의 모습도 감상할 수 있다.
▶ 파리낭만과 정서를 담은 전시장
몽마르트 피갈광장에서 멀지 않은 샵탈(Chaptal)거리에 자리 잡은 라비로망티크 박물관은 이름그대로 낭만주의 예술에 대한 노스탤지어를 현대적인 관점에서 고취시키는 전시관이다. 루브르, 오르세 혹은 그랑팔레나 퐁피두센터와는 달리 지명도는 낮으나, 1830년대 건축양식을 보존한 파리의 가장 아름다운 박물관 중에 하나로 꼽는다. 박물관이라는 일반적인 통념에서 벗어나 한 가닥 남은 파리의 옛 정취를 맛볼 수 있는 한적한 공간이다.
사실 세계화물결에 휩쓸린 인파와 소음에 파묻힌 파리를 바라보자면 ‘낭만의 파리’를 운운하는 것도 이제는 멋쩍을 정도로 맛이 가버린 옛일이 된 실정이다. 그럼에도 샵탈 거리로 들어서자면 약간은 다른 분위기가 감지된다. 박물관이라고 짐작할만한 대형건물은 눈에 뜨이지 않는 일반상가 거리로, 한 평범한 초록색 대문 옆에 박물관 명판이 걸려있을 뿐이다.
대문을 지나면 고목이 드리워진 좁은 골목길로 이어지고, 막다른 곳에 두 건물사이로 또 다른 대문이 가로놓여있다. 이 두 번째 대문의 문턱을 넘자면 순식간에 번잡한 바깥세상과의 단절감을 느끼게 된다.
원래는 네덜란드인 화가 아리 쉐페르(Ary Scheffer, 1795-1858년)가 1830년에 건축하여 거주했던 저택이다. 현재까지 제대로 보전된 아티스트 저택 중에 하나이다.
1856년 쉐페르의 조카딸은 에르네스 르낭과 결혼했고 그들의 자손이 저택을 상속받았다. 1982년에 상속후손은 저택을 파리시에 기증하여 ‘쉐페르와 르낭의 집’으로 공개했으며, 1987년부터 라비로망티크 파리 시립박물관으로 개관하여 19세기 중반이후의 문학과 예술을 소개하는 전시장으로 발돋움했다.
▶ 1830년대의 아티스트 저택
라비로망티크 박물관은 정원이 딸린 안뜰을 중심으로 삼각형 구조를 이룬다. 막다른 골목길에 세워진 두 건물에서 바로 ‘보들레르의 눈’ 기획전이 개최되고 있다. 전시관입구는 왼쪽 건물의 현관으로 통하며, 안뜰을 통해 다시 2차 전시장인 오른쪽 건물로 진입한다.
이 왼쪽 건물은 아리 쉐페르가 금요일이면 조르쥬 상드, 쇼팽, 들라크루아, 앵그르, 리스트 등 당대의 기라성 같은 작가, 시인, 작곡가, 화가들을 맞이했던 아틀리에 겸 살롱이다. 오른쪽 건물은 쉐페르 형제는 물론 제자들과 조수들이 이용했던 대형제작실이다.
이 두 건물 맞은편으로 바라보이는, 베이지색 벽에 연한 녹색 덧문의 2층 저택은 상기 전시관으로 무료입장이다. 1층의 4개 살롱은 조르쥬 상드(1804-1876년)에게 할애된 전시장이다. 여류작가가 생전에 소장했던 보석, 장신구들을 비롯하여 쇼팽의 왼손 조각상 등 예술품들과 가구, 화폭들이 배치되어 있다.전문 화가들의 수준을 뺨치는 여류작가의 수채화작품도 전시되어 있다. 조르쥬 상드의 고향마을 노앙(Nohant) 저택에 소장되었던 유품들로서, 상속후손이 1923년 파리시에 기증한 유물들이다.
2층은 아리 쉐페르의 전시장이다. 네덜란드인 쉐페르는 1811년 파리에 정착한 후 루이-필립 왕의 자녀들에게 그림교습을 담당했다. 이때 그는 마리 도를레앙(Marie d'Orleans, 1813-1839년) 공주의 그림재능을 간파하고 예술의 길을 걷도록 적극 후원했다. 공주는 26세에 절명했지만, 프랑스미술사에서 첫 여류조각가로 간주된다. 2층에 마련된 ‘오를레앙가의 살롱’에서 마리의 조각품을 감상할 수 있다.
‘보들레르의 눈’ 전시장은 ‘악의 꽃’ 저자 사망 150주년을 맞이하여 마련된 기획전이다. 파리에서 태어나, 파리를 사랑하고 증오하다가, 파리에서 비참한 죽음을 맞이했던 보들레르의 파란만장한 삶 자체가 하나의 예술행위라고도 볼 수 있다. 정작 예술창작에서는 절제 없는 감정의 과잉노출을 거부했던 보들레르를 비롯하여 동시대 아티스트들과 더불어 파리도심 속에서 만추를 즐겨보는 전시장으로 적격이다.
19세기 중엽 세계예술계의 살롱으로 군림했던 쉐페르 저택의 뜰에는 찻집이 마련되어 도심의 정원에서 커피 한잔 마시는 여유도 누려볼 수 있다.
☞ ‘보들레르의 눈(L'oeil de Baudelaire)’
Musée de la Vie romantique
주소/16 rue Chaptal (파리 9구)
2016년 9월 20일부터 2017년 1월 29일까지(월요일휴관, 10시-18시)
【한위클리 / 이병옥 ahparis@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