美대선을 보는 또다른 시각
뉴스로=노창현 newsroh@gmail.com
미국 대선은 불과 2주전만 해도 파장(罷場) 분위기라고 많은 언론이 입을 모았습니다. 민주당 힐러리 클린턴과 공화당 도날드 트럼프 사이의 격차가 너무 벌어져 판세를 뒤집는다는 것이 거의 불가능하다고 봤기때문이지요.
지난 10월 24일 당시 각종 여론조사에서 클린턴은 트럼프에 평균 6~7% 포인트차로 지지율이 앞섰습니다. 특히 대선 결과를 좌우하는 경합주에서 대부분 승리하는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그래서 일부 언론은 클린턴의 압승(壓勝)을 점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제 생각은 다릅니다. 클린턴이 여론조사에서 월등하게 앞서지 않는한 뜻밖의 결과가 나올 수 있다고 봤으니까요. 미 국민들의 속내가 여론조사로 정확히 반영되지 않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른바 ‘샤이 트럼프 유권자’(Shy Trump Voters)들이 그러합니다. 이들은 트럼프를 지지하지만 좀처럼 자신들의 심경을 드러내지 않습니다. 트럼프를 위한 말없는 다수(Silent Majority)라는 것이지요.
트럼프는 대선 출마선언이후 갖가지 막말 퍼레이드를 펼쳤습니다. 불법체류 멕시칸들을 마약 강도 범죄자로 매도하는 등 이민자는 물론, 여성, 장애인에 대한 반감과 비하(卑下) 발언을 서슴지 않았습니다. 군대도 다녀온 적이 없으면서 베트남전쟁에 참전해 포로생활까지 한 자기당의 매케인 전 대선후보가 자신을 지지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포로로 잡힌 주제에 전쟁영웅 행세를 한다’는 식의 조롱을 퍼부었습니다.
다른 어느 나라보다 참전용사들을 예우하는 미국에서 참전용사 폄하(貶下)발언은 금기입니다. 당시 뉴욕타임스는 트럼프의 지지율이 거품이며 급감할 것이라고 예측했습니다. 어지간한 후보라면 일찌감치 자격 상실을 했겠지만 트럼프는 거뜬히 버텼습니다. 심지어 8월엔 민주당 전당대회 연사로 나온 무슬림 전사자의 부모까지 비하 해 공화당 내부에서조차 거센 반발과 비판을 받았는데도 말입니다.
그뿐인가요. 지난 세 차례 대선토론에서 트럼프는 클린턴에 정치철학의 부재를 드러내며 완패했습니다. 막판엔 성희롱과 성추행 관련 비디오 테이프, 입, 10명이 넘는 여성의 성희롱과 성추행 증언 등이 제기됐지만 공식 여론조사에서 마지막 순간까지 클린턴을 바짝 뒤쫒았습니다.
정제되지 않은 막말과 다혈질에, 어디로 튈지 모르는 부동산재벌의 식지 않는 인기요인은 왜일까요. 트럼프는 오랜 세월 TV 리얼리티쇼를 통해 대중에 친숙한 엔터테이너입니다. 사람들은 초기에 대선판을 리얼리티쇼 연장선상에서 바라봤지만 겉다르고 속다른 기존 정치인들에 염증(炎症)을 느끼면서 트럼프에 대한 호감이 증가했습니다.
트럼프가 제기한 이민자 무슬림 이슈와 성차별적인 발언들은 사실 대놓고 할 수는 없지만 공감하는 이들이 적지 않습니다. 트럼프의 주된 지지층인 가난한 백인 노동층, 저학력자외에도 대리만족하는 보통의 미국인들이 많다는 것입니다. 다만 내놓고 잘한다고 맞장구치기엔 남의 눈치가 보였을 뿐이지요.
여론조사에서 신분이 드러나는 것은 않아도 속마음을 드러내기 싫어하는 사람들은 정직한 답변을 하지 않습니다. 그뿐이 아닙니다, 트럼프도 싫지만 클린턴을 더 싫어하는 유권자들 역시 가능성 희박한 제3의 후보를 찍기 보다는 트럼프를 선택할 가능성이 많습니다.
여론조사에서 막판 트럼프의 지지율이 반등(反騰)한 것이 공화당 유권자들이 ‘그래도 민주당 후보를 찍을 순 없지 않느냐’는 결과가 작용한 것으로 볼 때, 충격적인 트럼프의 승리는 ‘샤이 트럼프’들의 결정적인 공로가 될 것입니다.
언론의 영향을 받은 탓이지만 대다수 한국인들은 트럼프를 과소평가하고 우려와 반감을 갖고 있습니다. 그러나 국익의 관점으로 볼 때 트럼프는 더 나은 선택이 될 수 있습니다. 트럼프가 이른바 한국의 안보무임승차론을 통해 주한미군 분담금을 올려야 한다고 압박하는 것에 전혀 흔들릴 필요가 없습니다. 주한미군의 존재는 미국의 국가이익에 더 부합(附合)하는 것이기 때문이지요.
백악관 권력이 된 트럼프가 계속해서 같은 취지의 압박을 가할 가능성은 희박합니다. 애가 닳을 것은 한국이 아니라 미국입니다. 한국은 박근혜-최순실 사태로 보수 정권이 사실상 종말을 고했습니다. 과도정권은 진보성향의 야당이 주도하게 되었으며, 한국의 정권교체가 이뤄진다면 트럼프는 주한미군의 유지와 무기를 더 팔기 위해서라도 한국정부의 비위를 맞춰야 하는 상황이 올 것입니다.
한가지 짚고 넘어갈 것은 새로운 백악관의 주인이 과연 4년 임기를 채울 수 있느냐입니다. 클린턴과 트럼프 공히 탄핵의 유탄을 맞을 가능성 때문입니다. 클린턴의 경우, 그녀의 발목을 마지막 순간까지 잡은 이메일 스캔들이 재점화될 수 있습니다.
클린턴 스캔들의 핵심은 국가기밀 유출 논란은 물론, 자신의 재단을 통한 정치자금의 비밀을 가리기 위해 사적인 이메일을 활용했다는 것입니다. 중대한 국가 공직을 개인재단 모금에 이용하고 이를 은폐하기 위해 3만여통의 이메일을 지웠으며 지금까지 거짓말을 하고 있는 클린턴에게 이메일 스캔들은 언제 발화할지 모르는 휴화산입니다.
트럼프의 저급한 막말도 지금까지는 기존 정치인과 차별화된 ‘트럼프 스타일’로 양해가 되었지만 대통령의 부적절한 언행은 탄핵(彈劾)의 빌미가 될 수 있습니다. 수십년간 유지한 버릇을 고치기는 쉽지 않습니다. 트럼프는 나중에 번복은 할 지언정 정제되지 않은 말들을 있는 그대로 내뱉습니다. 후보의 세치 혀와 대통령의 세치 혀는 파괴력 면에서 천양지차(天壤之差)입니다.
FBI 코미 국장은 이번 대선의 보이지 않는 수혜자(受惠者)가 될 것입니다. 클린턴에 대한 지지율은 FBI의 수사여부에 따라 등락을 거듭했습니다. 막판 재조사 가능성을 언급하면서 트럼프가 클린턴의 턱밑까지 추격했고, 또다시 재조사 방침을 철회함으로써 두 후보에게 병주고 약주는 ‘신의 한수’가 되었습니다. 클린턴에게 코미 국장은 막판 기사회생의 기회와 임기내내 약점을 틀어쥔 셈이구요. 트럼프에겐 대반전의 분위기를 마련하며 대선승리의 최대 공신이 되버린 것이지요.
지나친 가정(假定)일 수 있지만 클린턴은 건강문제로, 트럼프는 테러위협으로 비상사태를 맞을지 모른다는 의견도 있습니다. 클린턴은 여러 차례 건강이상 징후를 보였고 트럼프는 막장언행으로 적대세력을 양산했기때문입니다.
만일 그렇게 된다면 이번 대선의 최대 수혜자는 양 후보의 러닝메이트일 것입니다. 지병(持病)으로 타계한 루즈벨트 대신 백악관 주인이 된 트루먼 부통령과 헌정사상 첫 탄핵으로 하야한 닉슨 대신 대통령의 행운을 거머쥔 포드 부통령처럼 마이크 펜스(공화당)와 팀 케인(민주당)도 주목해야 할 이유는 충분하겠지요.
* ‘글로벌웹진’ 뉴스로 칼럼 ‘노창현의 뉴욕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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