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명구의 한국일주마라톤

 

뉴스로=강명구 칼럼니스트 newsroh@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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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자리 한 마리가 손수레 위를 날며 나와 동반주를 한다. 가을햇살 아래 잠자리 날개가 은빛으로 빛난다. 잠자리는 간혹 좌우로 까불거리며 난다. 모시 적삼 같은 가녀린 날개로 미세한 근육의 움직임만으로도 허공을 자유자개로 날아다니는 비밀을 해독(解讀)할 수는 없다. 산 생명 특유의 힘이 느껴진다. 그러다 얼마 후 길옆의 거미줄에 걸려 몇 번 꼼지락거리더니 금방 힘을 잃고 만다. 거미줄은 길거리에 늘어선 좌판상점들처럼 여기저리 늘어서있다. 거미줄 저쪽 끝에 거미가 여유 있게 매달려 있었다.

 

잠시 멈칫하고 생각하니 내가 잠자리의 생사여탈권(生死與奪權)을 쥐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나는 지금 이 순간 어마 무시한 권력의 자리에 서있는 것이다. 잠자리를 살려줄까 아니면 그대로 놓아두고 갈까 생각하다가 나는 이것이 자연의 법칙이구나 하고 생각했다. 자연의 법칙을 거스르지 않으려고 그대로 지나치다 다시 돌아보니 잠자리의 3만여 개의 홑눈이 망연자실(茫然自失)한 눈초리로 나를 바라본다. 가만히 생각하니 이건 아니었다. 돌아가 거미줄을 끊고 잠자리의 날개를 잡았다. 산 생명의 떨림이 손가락으로 전해온다. 날개를 잡았던 손가락을 놓으니 잠자리는 한 바퀴 맴돌면서 왕발울만한 두 눈동자를 나의 눈과 맞추더니 저 멀리 날아가 버렸다. 나는 자연의 법칙보다 인정을 택했다.

 

나하고 잠시나마 동반주를 해주던 잠자리가 죽음의 기로(岐路)에 놓여있는데 그냥 지나칠 수는 없는 일이다. 벌교에서는 돈 자랑 힘자랑 하지 말라고 했는데 벌교에서 힘자랑을 하고 말았다. 나는 내게 주어졌던 권력을 아름답게 사용한 뿌듯한 마음이 하루 종일 지속되었다. 나는 인정이 법보다 우선이라고 생각한다. 피도 눈물도 없는 법이 사람 위에 군림하는 현실이 무서울 때가 있다. 권력 앞에서 약한 법일수록 더 서민들에게는 서슬이 시퍼럴 때가 많다. 법의 역사란 대게 서민들의 편의를 위해서라기보다는 권력자의 편의에 의해서 만들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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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덧 나의 발길은 남도에 들어섰다. 남도에는 소리부터 다르다. 경상도의 소리는 거칠고 투박한 반면 남도의 소리는 육자배기의 구성진 가락 같다. 소리에는 삶이 묻어있고 역사가 녹아있고 문화가 담겨있다.

 

고흥반도와 여수반도에 둘러싸인 순천만은 세계적인 연안습지와 다양한 생물이 살고 있는 갯벌과 문화유산을 바탕으로 세계정원박람회가 열렸던 곳이다. 천혜의 자연경관과 함께 도시 전체를 하나의 커다란 정원으로 만들려는 노력이 묻어나는 곳이다. 동천을 따라 자전거도로가 잘 정돈이 되었고 저 멀리 순천만을 따라 갯벌과 습지에 갈대밭이 보인다. 이제 조금 있으면 이곳으로 겨울철새들이 날아들어 장관을 이룰 것이다.

 

나보다도 키가 큰 갈대숲을 지나며 바다와 뭍이 만나는 경계에서 자라며 그 사이에서 일어나는 거친 바람이 불 때마다 살아남기 위하여 뿌리에 온 힘을 다 주어 흔들리며 살아가는 갈대들의 모습을 보았다. 갈대 하나하나는 자기 몫만큼 고뇌하며 흔들리며 옆의 갈대에 서로 어깨를 기대며 살아가는 것이다. 바람이 불면 바람의 노래를 부르는 것은 갈대들의 노동요(勞動謠)와 같은 것이다.

 

사람들이 벌교에 가면 꼬막정식을 먹고 오라고 했는데 배는 고파오는데 벌교까지는 아직 멀었다. 요즘 나는 매끼 밥 두 공기는 거뜬히 비운다. 위장 속의 창자들이 비틀리며 꼬르락 소리가 나기 시작한다. 가족들과 함께 어울려 먹던 맛있는 음식들이 머릿속에서 맴돈다. 식욕은 성욕보다도 더 참을 수 없는 것이다. 마른 침이 꼴깍 넘어간다. 배가 고프다고 느껴지면 바로 깊은 바다와 같은 검푸른 현기증이 나기 시작한다. 귀뚜라미 울음 같은 환청(幻聽)이 들리기도 한다. 주린 배를 안고 한참달리다 보니 식당이 하나 보인다. 무조건 들어갔다. 들어가 보니 손님들로 식당이 가득한데 메뉴는 우렁이쌈밥 +청국장 하나 밖에 없다.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때로는 어쩔 수 없는 선택이 최고의 선택이 될 때가 있다.

 

지리산과 남해의 자연을 담은 열두 첩 반상이 차려져 나왔다. 밥상 위의 색의 조화는 놀라웠다. 우렁이쌈밥 청국장을 받고 나는 눈으로 먼저 맛을 보고, 코로 음미하고 마음으로 시식을 한 다음에 첫입맞춤을 하듯 떨리는 입술을 가져다 댔다. 혓바닥에 음식이 닿았을 대의 아련한 느낌이 꿈결처럼 지나간다. 첫입맞춤의 떨리고 조심스런 시간은 잠시뿐 곧 격정적으로 음식물을 탐하고 있었다. 나는 마치 이것이 인생 마지막 만찬인 양 게걸스럽게 먹기 시작한다. 잘 씹힌 음식물이 목젖을 타고 내려가자 전율과 환희의 순간이 찾아온다. 최고의 맛이란 하늘과 땅과 바람의 최고의 조화이다. 최고의 맛으로 채워진 위장의 포만감은 이 세상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행복이자 축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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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한 끼 점심을 먹으며 촉각적 후각적 시각적 예술적 철학적 체험을 한다. 육신의 쾌락을 느끼며 맛의 산을 오르고 맛의 바다를 건너는 또 다른 마라톤을 하고 있었다. 마라톤을 뛸 때와 마찬가지로 심장의 박동소리가 거칠어지고 있었다. 한참 맛을 탐미하고 외로운 독주를 즐기고 있는데 한 사람이 식사를 끝내고 나가더니 내 손수레에 적힌 1,879 km 국토일주순례 마라톤이라 적힌 배너를 보고 다시 들어와 내 점심값을 내주고 나간다. 그의 거친 손마디와 붉은 황토가 묻은 바지자락이 길게 여운을 남긴다.

 

포만감(飽滿感)은 몸을 나른하게 만들었다. 나른한 몸으로 다시 뛰는 것은 고역이었다. 그러나 점심을 먹고 마냥 쉴 수는 없다. 나는 몸의 나름함을 물리치고 코뿔소의 뿔처럼 꿋꿋하게 달려 나갔다. 달리는 동안 고통과 환희는 동전의 양면처럼 함께 다닌다. 수도자들은 공덕을 쌓기 위하여 고행의 길을 나선다는데 나는 달릴 때 영혼이 상쾌해지고 맑아지는 잊을 수 없는 체험 때문에 달린다. 아무 것도 주먹에 쥐지 않은 무소유의 달리기 속에서 영혼은 지금까지 체험하지 못했던 초공간을 여행하며 전혀 새로운 사유(思惟)를 경험하는 것이다.

 

남해는 고려시대부터 정치적인 적들을 유배시키던 곳이었다니 스쳐가는 감회가 새롭다. 정적들과 함께 정치를 할 수 없어 유배를 시키지만 병풍 같이 펼쳐진 산과 잔잔한 물결 거기에 수없이 떠있는 작은 섬들이 이루어내는 천국과 같은 한려수도 쪽으로 내려 보내 여생을 무위자연하며 안빈낙도(安貧樂道)하고 살 수 있게 배려를 해주었으니 요즈음의 정치인들보다는 훨씬 낭만적이었던 것 같다.

 

벌교에서는 단일 문학적 성과를 기념하는 기념관으로는 국내 최고라는 조정래의 ‘태백산맥 문학관’을 들렀다. 작품의 첫 도입부가 시작되는 현부잣집과 소화의 집이 있는 제석산 끝자락에 자리를 잡고 있다. 거기서 내가 눈여겨 본 것은 분단의 불편한 진실을 지리산에서부터 백두산까지 4만여 개의 자연석 몽돌을 채집하여 민족의 염원을 담아 제작한 ‘백두대간의 염원’이라는 옹석벽화(擁石壁畵)이다. 현부자의 흥망성쇠(興亡盛衰)가 우리집안의 흥망성쇠와 결코 다르다 할 수 없고 우리역사의 비극과 무관하지 않으니 가슴이 멍해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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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쪽 하늘에서 저녁놀이 불같이 타올랐다. 새들도 집을 찾아 날아가는 이 시간 나는 또 어떤 아늑한 곳을 찾아 하룻밤 묵어가야 한다. 전라도로 넘어오니 논과 밭은 저렇게 풍요로운 데 현대적 산업시설이 경상도만큼 없어서 도시 규모도 크지 않고 따라서 식당이나 모텔을 구하기에 애를 먹는다. 달리면서 지역균형발전까지 신경 쓰려니 머리가 갑자기 무거워진다.

 

아이들은 거미줄에 걸린 잠자리처럼 스마트폰을 잡은 손만 까닥거리며 집에 앉아있다. 어른들도 일상의 거미줄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고 무표정한 얼굴로 무미건조(無味乾燥)한 생활을 이어간다. 법과 질서라는 거미줄은 점점 더 촘촘해지고 복잡해지면서 사람들을 집단적인 경련과 두통을 유발시키는데 처방은 만만치가 않다. 잠자리의 생사여탈권 이외의 힘이 내겐 없다. 그러니 힘자랑 할 것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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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글로벌웹진’ 뉴스로 칼럼 ‘강명구의 마라톤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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