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화 70년: 5회] 해방 후 '친일 덮기' 급급한 육당·춘원, 교과서에서 퇴출 당해
(서울=코리아위클리) = 임헌영 교수(문학평론가·민족문제연구소장) = 세상은 공정하지 않아 “뛰기는 역마가 뛰고 먹기는 홍중군(洪中軍)의 말이 다 먹는다”는 속담이 어디서나 적용된다. 풍찬노숙의 독립투사들이 친일세력에 의해 훈장등급이 매겨지고, 그들이 걸어주는 훈장을 받는 처량한 세월 아닌가.
부민관 폭파 사건의 주역인 독립투사 조문기는 “해방은 친일파에게만 왔다”며 정부 주도 3·1절이나 8·15 기념식에 참석하지 않았다. 8·15 이후 친일 행위를 반성한 것은 조용만, 이항녕, 채만식, 현석호 등과, 일제 때 법조인으로 있었던 걸 반성해 해방후 사퇴한 엄상섭, 이호, 이병용, 김윤수, 박종근, 김영재 등이 있다. 또 김동환의 장남 김영식, 후손으로 사죄한 신기남 전 의원, 이윤, 한진규 등이 있지만 친일행위를 반성한 극소수에 불과하다. 단체로는 한국천주교 주교회의가 반성했다. 이에 반해 선조의 과오를 미화하는 경우도 적지 않다.
뒤바뀐 세상에서 살아남기
육당 최남선은 해방 직후 민족의 역사를 계몽할 임무가 자신에게 주어졌다며 대중 계몽용 역사서 집필에 몰두했다. 작은 사진은 최남선의 <국민 조선역사> |
명망 있는 친일파들은 8·15를 맞고도 여생을 즐길 만했다. 세월을 관망하면서 새로운 작품을 쓰거나 예전에 쓴 원고를 정리하는 게 유행이었다. 대표적인 친일파였던 육당 최남선(1890~1957), 춘원 이광수(1892~1950), 회월 박영희(1901~? )도 그랬다. 세 사람 모두 8·15 이후에 저서를 냈는데 예상대로 자기변호를 담았다.
최남선은 8·15부터 6·25전쟁이 터질 때까지 무려 27종의 저술을 냈는데, 그중 문제가 된 것은 <국민 조선역사>(동명사, 1946년 12월), <국사독본>(동명사, 1947년 11월), <중등국사>(동명사, 1947년 8월) 등 7종이었다. 이광수는 17종을 출간했는데 그중 <꿈>(면학서보 1947년 6월)과 <문장독본>(광문서림, 1948년 4월, 같은 책을 대흥출판사에서 1948년 9월 출간)이 필화를 입었고, 평론가 회월 박영희는 <문학의 이론과 실제>(일월사, 1947년 4월)를 출간하자마자 비판 여론에 직면했다. 필화 70년사 중 단 한번 합당한 심판이었다는 점에서 이들 친일파는 기록에 남는다.
춘원 이광수는 8·15 이후 “친일행위는 애국의 변형이었다”고 호소하며 친일에 대한 참회보다는 자신이 관여한 민족운동을 부각시키려 했다. 작은 사진은 이광수의 <꿈>
춘원 이광수는 8·15 이후 “친일행위는 애국의 변형이었다”고 호소하며 친일에 대한 참회보다는 자신이 관여한 민족운동을 부각시키려 했다. 작은 사진은 이광수의 <꿈>
특히 최남선과 이광수가 쓴 책이 출간되자마자 여론이 악화돼 1948년 10월4일 열린 각도 학무국장 회의에서는 그들의 저서를 학원으로부터 축출하기로 결의했다. 그 나흘 뒤 안호상 초대 문교장관은 기자간담회에서 최남선과 이광수의 저서를 부교재 등으로 쓰지 못하게 할 것이라고 공언했다. 이후 전국 중등학교 교장회의에서는 1949년부터 반드시 검정된 교과서를 사용하되, 최남선의 역사 및 지리 관련 저서 일체(총 7종)와 이광수의 <문장독본>은 사용금지토록 조처했다. 박영희의 평론집은 조선문학가동맹의 맹렬한 공격을 받았다. 한국정부 수립 후 친일파의 저서는 교재나 교과서에 실릴 수 없다는 기본 입장을 밝혀준 사례였지만 이내 친일파들의 교과서가 나오게 된다.
▲ 춘원 이광수는 8·15 이후 "친일행위는 애국의 변형이었다"고 호소하며 참회보다는 자신이 관여한 민족운동을 부각시키려 했다. 작은 사진은 이광수의 <꿈> |
최남선, 독립운동사를 통한 자기변명
최남선은 8·15 직후 전공인 역사서를 대중 계몽용으로 ‘메뚜기 알 낳듯이’ 엄청나게 쏟아냈다. 민족의 역사를 계몽할 임무가 자신에게 주어졌다는 사명감(실제로는 속죄용)에 불탄 저술활동은 죄과를 분해시키려는 속내를 드러냈다. 연구자들은 8·15 이후 최남선이 한반도 문화의 일본 전파, 일본의 잔혹성 강조, 을미사변 등 식민지 시기에 다룰 수 없었던 사건을 부각하고, 강제병탄을 강조한 게 달라졌다고 지적한다. 하지만 이 정도로 친일을 속죄한다는 것은 가당찮은 일이다.
달라진 점이 오히려 문제가 된 대목도 있었다. 그는 일찍부터 북방 부여족에서 고구려로의 연결을 강조하면서 고려와 발해를 중시하고, 신라의 삼국통일을 비판해왔다. 그런데 8·15 이후에는 통일신라-고려-조선-대한민국을 정통으로 부각시켜 신라의 반도 통일을 긍정했다. 그러면서도 북방 옛 강토의 회복과 개척을 향한 대외 팽창주의를 강조했다. 일제 파시즘의 침략 이데올로기를 그대로 되살려 분단 고착화와 고대사 강조로 친일을 속죄하려는 속셈이었을까.
<중등국사>의 ‘독립의 회복’은 “조선 인민이 일본에게 전에 없는 부끄럼을 당하매 잠자던 민족정신이 번쩍 깨어서”라고 서두를 시작한다. 참으로 어울리지 않는 수사법에다 민족의식이 없는 표현이다. <조선독립운동소사>는 필화를 입지는 않았지만 많은 논란을 안고 있다. 3·1운동에 초점을 맞춰 자신의 조선광문회 등 문화운동과 소년운동을 부각시킨 건 한낱 치기에 불과하다. 그러나 “일본이 조선으로부터 맨 처음 근대적 외교관계를 맺은 것” 등의 표현은 아무리 뇌세포를 세탁해도 도저히 식민사관에서 헤어날 수 없음을 느끼게 해준다.
그는 독립운동의 계보를 ‘안창호계의 활동-대종교-2·8 독립선언과 3·1운동-임시정부’를 주축으로 삼았다. 중국의 국공 대립, 사회주의 계열에 대한 자료 삽입 등은 출간 당시로서는 손 빠른 대처였다. 강우규, 의열단, 미주의 박용만, 김가진, 조용은(조소앙), 공산주의 계열의 투쟁, 이봉창, 윤봉길, 김일성의 보천보 전투까지 거론했다. 이런 정보를 얻게 된 것은 아마도 그의 만주국 근무로 가능했을 것이다. 사관(史觀)도 객관적인 균형을 잃었다. 두드러진 것은 무장투쟁을 부각시킨 것인데, 이는 필시 자신의 나약한 친일에 대한 보상심리일 것이다.
이광수와 박영희에 대한 격한 반발
춘원 이광수는 자신의 속내를 드러내는 듯한 자세로 반성문과 소설을 출간해 “친일행위는 애국의 변형”이었다고 호소했다. 그는 “소가 열 필이 와서 끌어도 이광수는 이 자리를 안 떠날 것이오”라면서 8·15 해방이 안겨다 준 충격을 은둔으로 달랬다. 그러나 뒤로는 재산 보호를 위해 1946년 5월 아내와 협의 이혼한 그는 반민법이 그렇게 허망하게 허물어질 줄은 예측하지 못했다. 이 기간 중 그는 끊임없이 글을 썼지만 친일에 대한 참회보다는 자신이 관여했던 민족운동을 부각시키는 데 초점을 맞췄다. 그 많은 글 중 판매금지 논란으로 사회적 쟁점이 된 것은 소설 <꿈>과 <문장독본>이었다.
10여년 전에 쓰다가 버려둔 전반부에다 후반부를 완성시킨 것이 <꿈>이다. 낙산사의 승려 조신이 허혼자가 있는 태수의 딸 월례와 애정 도피를 한 뒤 15년간 2남2녀를 둔다. 마침 그녀의 약혼자가 나타나는 바람에 체포돼 사형당하려는 찰나에 깨고 보니 꿈이었다는 <삼국유사>의 설화를 풀어쓴 작품이다. 이 꿈으로 조신이 쾌락의 허망을 깨닫고 고승이 되었다는 것은 이광수 자신이 당시의 역사적 격변 속에서 조신으로 둔갑하고 싶은 심경에 다름아니다. 친일의 악몽에서 깨어나 다시 고결한 민족지사로 되살아나고 싶었던 그가 펴낸 <꿈>은 1947년 6월 발간 즉시 문학가동맹에 의해 판매금지 처분을 내려야 한다는 탄원서가 제출되었다.
회월 박영희(왼쪽)는 <문학의 이론과 실제>라는 저서(오른쪽)를 통해 반공을 강조하는 사회문학을 주장하고, 파시즘 철학의 잔재를 드러내 비판을 받았다. |
다른 문인과는 달리 왼팔이 꺾일 정도의 고문과 강압으로 형식적인 친일을 할 수밖에 없었던 회월 박영희는 8·15 직후 춘천으로 내려가 공립중학교 국어교사로 재직 중이었다. 1940년 2월부터 5월까지 월간 ‘문장’에 연재하다가 중단했던 평론을 정리해 <문학의 이론과 실제>라는 책을 펴냈다. 이광수처럼 박영희도 이 저서를 통해 반공을 강조하는 사회문학을 주장해 파시즘 철학의 잔재를 보여주었다.
역사에 바람직한 필화나 금서가 존재할까? 이들이 비록 친일파였더라도 처벌을 다른 방법으로 해야지 필화로 다스리는 건 실패였다고 본다. 그만큼 창작의 자유는 고귀한 것이다.
<꼬리 기사>
“친일 이광수·박영희 출판 등 자유 제한을”
문학가동맹, 강력 비판 성명
회월 박영희(왼쪽)는 <문학의 이론과 실제>라는 저서(오른쪽)를 통해 반공을 강조하는 사회문학을 주장하고, 파시즘 철학의 잔재를 드러내 비판을 받았다.
지난 36년간 조선은 틀림없이 왜적의 철제(鐵蹄) 밑에 잔인하게 짓밟혀 온 것이오. 그러므로 왜적과 왜적의 이익을 위하여 동족을 팔아먹은 친일분자는 한 하늘 밑에 함께 복 받고 살지 못할 민족의 원수다. 인민을 다시 무서운 함정으로 이끄는 온갖 음모와 책동의 상습범 친일분자에게는 갈구해서 세우는 새 나라의 발전을 위하여 응당 여러 가지 자유가 제한되어야 할 것이다. 원수를 번영하게 하는 간계가 실행되고 민족을 파는 흉모(凶謀)가 용인되는 것은 절대로 민주주의가 아닐 뿐 아니라 민주주의를 망치는 일이 될 것이다(중략)….
우리 조선문학가동맹은 조선의 민주주의 문학인 전부를 대표해서 이광수·박영희의 철면피를 단죄하는 동시에 다음과 같은 조치가 있기를 당국에 바라며 일반에게 성명한다.
. 이광수 작 <꿈>과 박영희 저 <문학의 이론과 실제>를 즉시 발매금지시킬 것.
. 그 책을 출판한 출판사를 엄격하게 처단할 것.
. 이광수·박영희 등 친일파, 민족반역자를 반역자 규정에 의하여 처단할 때까지 언론·출판·집필 등 일체 활동을 금지시킬 것. (원수를 번영하게 하는 간계가 실행되고 민족을 파는 흉모(凶謀)가 용인되는 것은 절대로 민주주의가 아닐 뿐 아니라 민주주의를 망치는 일이 될 것이다(중략)…. (*이 기사는 <경향신문>에 먼저 올려졌습니다. 필자의 허락을 받아 게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