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화 70년: 6회] '남조선 단독정부 절대반대' 시로 분단에 항거하다 재갈 물려
▲ 정부수립 후 한국전쟁 전까지 판금된 최석두의 '새벽길' 박문서의 '소백산' 조벽암의 '지열' (왼쪽부터). 오영식 서지학자 제공 |
(서울=코리아위클리) 임헌영 교수(문학평론가·민족문제연구소장) = 영명하신 우리의 지도자(…), 그의 혁명투쟁을 통하여 체험하신 민족의 부활과 조국의 광복을 찾기 위한 이론과 실천의 양면을 체계화한 철리적(哲理的)인 민주원론. 우리의 영명하신 최고 영도자이신….
어떤 '지존'을 향한 누구의 용비어천가일까? 앞의 것은 이범석 초대 국무총리, 뒤의 것은 안호상 초대 문교부 장관이 이승만 대통령의 일민주의(一民主義)를 찬양한 수사다.
이로써 일민주의는 분단 한국의 국시가 되었다. 문벌과 반상(班常) 철폐, 빈부와 자본가와 노동자의 공동 이익, 남녀평등, 지방구별 없애기란 4대 강령이 그 요체다. 이것으로만 보면 사회과학적 인식에서 이승만은 안창호보다 한참 밑단계인 이광수 수준으로 느껴진다.
이승만의 '영도자국가'에 대한 집념
그 주장이 어쨌든 일민주의는 정치현실에서는 거대한 영도자국가 또는 두령국가의 면모 (서중석, <이승만의 정치 이데올로기>, 역사비평사)로 나타났다.
대통령직과 함께 대한독립촉성국민회 총재, 대한청년단 총재, 학도호국단 총재, 대한노총 총재, 대한농총 총재, 대한어민회 총재, 대한체육회 총재, 대한소년단 중앙본부 명예총재, 대한민국 제대장병 보도회(輔導會) 총본부(현 재향군인회) 총재, 대한참전전우회 총재 등을 맡고, 대한부인회 총재는 프란체스카가 맡았다. 해외 망명 40년에 기독교 신앙인이며 국제결혼을 하고서도 하필 일민주의를 내세운 건 '영도자국가'에 대한 집념 때문이 아니었을까.
8·15 해방 후 3년간 '영도자국가'를 탄생시키고자 너무 많은 민족적인 희생을 치렀다. 송진우(1945·12·30), 여운형(1947·7·19), 장덕수(1947·12·2) 등 규명되지 않은 암살과 민족분단, 온갖 탄압으로 '영도자국가'의 기초가 다져졌다.
1948년 5·10 총선에서 동대문 갑구에 출마한 이승만은 야비하게 최능진 애국투사의 입후보 등록을 취소시키고는 쿠데타 음모를 조작해 총살(1951·2·11)시켜 버렸다. 단일후보로 국회의원이 된 그는 내각제 헌법 원안을 강박하여 대통령중심제로 개정시켰고, 국회에서 간접선거로 초대 대통령(1948·7·20)이 되었다. 치졸하나, 취임식사 끝부분에서 대한민국 30년 7월24일 이라며 임시정부 법통을 선언한 점은 그나마 업적이다. 8·15 건국절을 주장하는 세력들이 명심할 대목이다.
정부 수립 선포식은 백악관(白堊館, 1926년 완공한 총독부 청사 명칭으로 미 군정청을 거쳐 중앙청. 1995·8·15 철거. 당시 신문에는 '백아관'으로 표기) 현관 앞 광장에 설치한 3층 특설무대에서 실시됐다. MP(헌병)의 사이렌 소리에다 수십대의 무장 미군 탱크가 앞뒤에서 호위하는 가운데 맥아더 장군 부부가 남대문에 나타나자 환호성이 터졌다. 귀빈들(프란체스카, 맥아더 부인, 하지 중장과 그 막료, 유엔 위원단, 신정부 각료)은 오전 11시20분경 대통령의 안내로 특설단에 자리했다. 개막 의식에 이어 백악관 서쪽 국기 게양대에서 성조기가 내려지고 태극기가 올랐다.
이 행사에 대하여 김구는 비분과 실망이 있을 뿐이다 라며 우리 동포들이 양극단의 길로만 돌진한다면 앞으로 남북의 동포는 국제적 압력과 도발로 인하여 본의 아닌 동족상잔의 비참한 내전이 발생할 위험이 없지 않으며 재무장한 일군은 또다시 바다를 건너서 세력을 펴게 될지 모른다 고 했는데, 그 충고대로 되어가고 있다.
분단시대 필화의 족쇄가 된 검열
단독정부 수립은 친일파 부흥회로 장식되어 '영도자국가'에 동조하지 않은 세력을 옥죄는 방법으로 '반공 애국론'을 외치며 이를 일민주의로 포장했다. 국가보안법(1948·12·1, 법률 제10호)은 친일파들의 튼튼한 갑옷에 다름 아니었다.
조병옥 군정청 경무부장이 광무신문지법이 유효하다고 언명(1948·8·9. 국회가 폐기시킨 건 1952·3·19)했던 터라 이승만 정권 수립부터 6·25 전까지 각종 신문, 통신 등을 정간이나 폐간시킨 게 20여종, 연행·기소된 언론인은 70여명에 이른다(김민환, <한국언론사>, 사회비평사). 이 시기 언론출판 검열기준은 국가안보와 기밀 누설 및 정부 비판, 북한 및 공산주의 옹호, 우방국(미국) 비방 등인데, 이 철칙은 분단시대 필화의 족쇄로 굳어졌다.
정부 수립부터 1950년 6·25까지 발간된 창작시집은 60권 정도이고 문학 애호가들이 이름쯤 알 수 있는 시인은 30여명인데, 이 중 세 시인의 시집이 판금목록에 올랐다.
최석두(崔石斗, 호적은 錫斗) 시집 <새벽길>(조선사, 1948·8·10). 정부 수립 뒤 판금 압수.
박문서(朴文緖) 시집 <소백산>(백우사, 1948·11·15). 판금 압수(1949·1·22).
조벽암(趙碧巖) 시집 <지열(地熱)>(아문각, 1948·7·25). 판금 압수(1949·2·10).
최석두(1917~1951·10·22)는 전남 함평 대가집 서자로 태어나 광주공립농업학교 졸업 후 경성사범 단기 강습과(농고 출신자에게 6개월 과정을 거쳐 초등교사 자격 부여)에 다닐 때 같은 학교 연습과(2년 과정) 동갑내기 김순남(작곡가)과 절친해졌다. 최 시인은 빈농 출신의 열렬한 청년투사를 시적 주인공으로 내세워 반미·통일·민주국가 건설을 주장했다. 화순 탄광노동자 폭동사건(1946·2·24~11·9 3차에 걸쳐 발생)을 다룬 <폭풍의 거리-다시 온 8·15 레포 속에서>는 기념비적 작품이다. 남한 단독정부 수립을 정면으로 비판한 시 '모두들 일어섰다'에서 시인은 "바람벽이나/ 전신주나…/ 모두들 일어섰다.// 남조선 단독정부 절대반대다./ 미군은 즉시 철퇴하라-// 인민의 목 메인 소리/ 피로 써진 글발.// 거리마다/ 골목마다/ 모두들 일어섰다"라고 노래했다. 그는 두 차례 구속 끝에 월북했으나 미군의 폭격으로 사망했다.
▲ 조벽암 ㅣ 최석두 ⓒ 공개역사자료 |
김기림(金起林)은 아름다운 정서는 드디어 그것만으로는 지탱하기가 어려운 때 가 있는데, 그게 8·15로 자꾸만 가슴에 밀려오는 저 가두의 우렁찬 부르짖음 (<소백산>의 서문)에 응답한 시인이 박문서라고 소개한다. 그리해서 시인은 황홀한 새 시대의 몸부림 속에 스스로를 맡겨버렸던 것이다. 이 시집의 주인이 걸어온 길이 또 그러하다 고 편석촌(김기림의 호)은 그를 치켜세운다. 그의 시적 주인공은 전투현장에 임하는 군인상이다. 병사와 총이 농민 정서와 어우러지게 하려고 꽃을 자주 등장시킨다. 이 시집을 낸 백우사(白羽社) 대표는 투사시인 김상훈(金尙勳)이었다.
수록 작품 28편을 통해 시인은 일본과 미국을 민족적 행복의 파괴자로 상정하고 "그러니 싸움의 즐거움이여/ 오늘 시인도 그렇다. 싸움꾼이래야 한다"('윤리')라고 치열한 투지를 불태운다. 동학농민전쟁과 3·1혁명의 연장선으로 대구 10월항쟁을 평가한 이 시인은 서정성이 강하다. '밤'에서 "빛이 도무지/ 악마보다 무서워// 어둠 속에서 다시/ 이불을 집어 쓴다.// 사람이란 얼마나 많은/ 죄를 지은 수인이냐// 정녕 새날이 있어/ 옳고 그름이 갈라질 때// 어느 그림 안에 무릎을 꿇고/ 나는 울어야 하나"라고 노래한다.
신인이었던 위의 두 시인과는 달리 조벽암은 유명한 작가 조명희의 조카로 카프(KAFP)의 맹장이었는데, 최석두를 발굴, 시집까지 내주었다.
조벽암은 시집 <지열>에서 맹장답게 피신 중인 투사들의 은밀한 만남과 잠재된 투지를 서정적으로 다뤘다. 친소적인 정서를 풍기는 '기러기' 등이 돋보이고, 시집 전체의 서정적 주조가 비판의식을 풍긴다. 그는 월북 후에도 최석두의 시집 출간을 주선해 주는 등 맹활약했다.
<꼬리기사>
정부수립 선포식서 독립운동가 외면한 이승만, 맥아더는 독립운동 40년 치하
이승만 대통령은 정부 수립 선포식 기념사에서 맥아더에 대한 긴 찬사에 이어 하지 중장과 미국과 유엔에 감사하며 소련과도 잘 지내겠다고 밝혔다. 민주주의와 인권과 개인의 자유 보호를 역설하며, 도시와 농촌의 "근로하며 고생하는 동포들 생활 정도를 개량"할 것도 다짐했지만 "우리가 가장 필요를 느끼는 것은 외국의 경제 원조"라고 했다. 독립운동가들의 고투나 친일파 청산, 통일 문제, 미군 철수 등은 피하면서 "민주주의에 모범적 정부임을 세계에 표명되도록 매진할 것을 우리는 이에 선언합니다"라고 끝맺었다.
오히려 맥아더는 축사에서 "본관은 40년간 여러분의 애국자들이 외국의 압박의 기반(羈絆)을 벗느라고 분투하는 것을 감탄해 가며 지켜보았다. 그들의 백절불굴하는 굳은 결의는 운명과 절충하기를 거부"한 것이라는 찬사를 보냈다. 이어 그는 "역사의 일대 비극인 귀국 강토의 인위적 장벽과 분할"의 비극까지 언급했다. 물론 속내는 다르지만 외양은 그럴 듯했다. (*이 기사는 <경향신문>에도 올려졌습니다. 필자의 허락을 받아 게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