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화 70년: 7회] '보도연맹' 통해 비판자 감시…문화예술인 블랙리스트의 원조
(서울=코리아위클리) 임헌영 교수(문학평론가·민족문제연구소장) = "한국 군인들은 우리가 그들을 훈련하는 목적이 미국이 피를 흘리는 대신 피를 흘리고, 미국을 위하여 쏘라고 하는 것을 알고 있지 못하다." 첫 미국고문사절단장 윌리엄 로버츠(William L. Roberts) 준장의 말이다(허상수, <4·3과 미국>, 다락방, 264쪽).
권력기반을 외세(미군)와 친일파에 둔 이승만 정권은 주한미군사령관 하지와 한미군사안전잠정협정(1948·8·24)을 체결, 주한미군사령관이 본국 정부의 지시나 자신의 직권으로 "대한민국 국방군(국방경비대, 해안경비대 및 비상지역에 주둔하는 국립경찰파견대를 포함)"을 훈련, 무장, 조직, 장비, 작전상의 통제 등 권한을 갖도록 합의했다.
하지 중장 후임으로 주한미군사령관을 겸했던 로버츠는 1949년 6월29일 미군이 철수한 뒤에도 고문관으로 남았다가 6·25 이틀 전 퇴임했다.
첫 금지곡과 보도연맹 결성
8·15 광복 직후 국민적 염원은 친일파 청산과 토지개혁, 그리고 통일·민주정부 수립이었기에 이승만의 단정(단독정부)은 엄청난 희생을 치렀는데 그 최대 참극은 제주 4·3항쟁이었다. 분단시대 필화의 단골메뉴인 4·3사건은 그 후속으로 여순병란(麗順兵亂, 1948·10·19, 여수순천사건, 조정래는 '병란'으로 호칭)을 몰고 왔다. 제주 4·3항쟁 진압 동원에 항거했던 이 군사반란은 박정희 전 대통령도 연루됐는데, 로버츠 준장이 그 구원자였다.
▲ 여순병란 이후 참혹한 여수 주민들 마음을 노래해 이승만 정권 첫 금지곡으로 기록된 '여수야화'를 부른 가수 남인수. ⓒ 자료사진 |
탄생 초기부터 독재와 영구집권 조짐을 노골적으로 드러낸 이승만 정권의 본질은 경북 문경 민간인 학살사건에서 드러난다. 1949년 12월24일 정오 무렵, '공비' 토벌(당시 문경 주위에는 빨치산이 없었다고 함) 중이라는 군인 70여 명이 산북면 석봉리 석달부락을 지나는데 주민들이 환영하지 않는다고 빨갱이 마을로 간주해 집과 가재도구를 불 지르고 부락민을 논두렁으로 불러내 기관총과 바주카포를 퍼부었다. 군인들은 마을 동쪽 산을 넘어가다가 방학식을 마치고 귀가하던 초등생 14명도 사살했다. 주민 136명 가운데 86명이 학살당한 이 사건은 보름 후 신성모 초대 국방장관이 위로차 내려가 100만원을 보상금으로 지급한 뒤 '공비'들이 자행한 사건으로 둔갑시켜 버렸다.
주한 미임시군사고문단(단장 로버츠 준장)은 '공비'(빨치산)들은 민간인 집단학살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이걸 중요한 전술 변화로 보고 대응책을 바꿔야 된다는 입장에서 진상조사를 실시, 진실을 밝혀냈으나 기밀로 본국에만 보고서를 올렸다. 그 문서가 1990년대 후반에 기밀 해제되어 미 국립문서보관소에서 발굴되면서 진상이 공개됐다. 많은 언론들이 있었지만 진상을 보도한 매체는 전혀 없었다(CBS 라디오 <시사자키 정관용입니다>, 2016·6·25).
집권 2년차를 맞은 이승만 정권은 국민보도연맹을 결성(1949·6·5), 서울 시공관(현 명동예술극장)에서 선포대회를 열었다. 일제 말기 대화숙(大和塾)을 모방한 이 단체는 남한 단독 친일독재 이승만 정권을 비판하는 모든 사람을 감시와 탄압 대상으로 삼았다. 미군정은 1945~1948년간 한국에 번역된 공산주의 사상 전파 저자로 플라톤, 존 듀이, 아인슈타인, 톨스토이, 토마스 하디, 스탕달, 카네기, 위고, 헤세, 셰익스피어, 바이런, 릴케, 호손 등(허상수, 앞의 책 257쪽)을 거론할 지경이라 한국인을 몽매주의로 본 셈이다. 이런 사상적 바탕에서 국민보도연맹은 요즘 화두에 오른 문화예술인 감시자 명단의 원조가 되는 셈이다.
6·25 직후 이승만판 킬링필드가 바로 국민보도연맹사건으로 지금도 전모가 파악되지 않은 오욕의 과거사로 남아있다.
이승만판 '교과서 파동'
이승만 정권이 지식인에 대한 사상적인 금치산 선고를 내린 첫 조처는 1949년 9월15일, 중등국어와 글짓기 등 8종 교과서에서 일체의 관련 작품을 삭제하면서 신호탄이 올랐다. 종이와 인쇄시설이 부족했던 탓에 교재를 먹으로 칠해서 사용하기도 했다. 박근혜 정권 역사교과서 파동의 원조 격이다.
관계기관이 공식적으로 '좌익계열 문화인'에 대한 제한조처를 발표한 것은 1949년 11월5일. 이미 월북해 버린 문학인을 1급으로 분류하고는 남한에 생존했던 문학인 중 좌익적이라고 판단한 문학인을 2·3급으로 나눠 총 51명(2급 29명, 3급 22명)이라고 밝혔다. 이들에게 기간 내 자수를 강요하고, 자수하지 않을 경우에는 출간한 저작물을 압수하며 앞으로 간행·창작 등을 못하게 할 것이라고 위협했다.
▲ 먹칠로 지운 교과서. 이승만 정권의 사상탄압은 1949년 중등국어(위 사진) 등 교과서 8종에서 관련 작품들을 삭제하는 것으로 시작됐다. 종이와 인쇄시설이 부족해 교과서 목차에서 관련 작가와 작품을 검은색으로 지우고(아래 왼쪽), 해당 작품 부분을 시커멓게 먹칠해 보이지 않도록 하기도 했다(아래 오른쪽). 오영식 서지학자 제공 |
분단 한국 현대문학사의 주축을 이룬 한국문학가협회(현 문인협회)가 총회를 연 것은 1949년 12월17일. 추천회원 명단에는 151명의 문학인이 올라있는데 이 중에는 김기림·정지용 등 '전향자' 약 20명도 포함되어 있다. 그러니까 전 문학인의 3분의 1 이상을 '불순분자'로 몰아붙인 셈이다.
가속화하는 사상 탄압
탄압은 가속화된다. 이승만 정부는 전향 문필가들의 원고 심사제를 발표(1950·1·27), 이들의 작품이나 저서를 게재 혹은 출판하려면 "각 시·도 경찰국장을 경유하여 발간 사전에 원고를 치안국장에게 보내어 심사를 거친 후 출판"하고, "신규 간행물을 치안국 사찰과(현 정보과에 해당) 검열계로 2부씩 보내주길 바란다"고 지시했다.
▲ 1948년 8월15일 백악관(구 조선총독부 건물) 광장에 설치한 3층 특설무대에서 열린 대한민국 정부 수립 선포식. ⓒ 경향신문 자료사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