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답게 사는 세상, 통일을 위하여
뉴스로=오인동 칼럼니스트
김동수 교수를 알게 된 것은 1990년대 중반 내가 모국의 분단과 통일문제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되었을 때였다. 나로서는 상상도 못했던 일들이 이미 1980년대 초부터 미국과 유럽의 동포사회에서 일어나고 있었던 기록들에서였다. 일단의 해외동포 학자와 종교인들이 통일을 위해 북녘 사람들과 유럽에서 만나 대화도 나누고 북에도 다녀온 놀라운 사실들이었다. 이런 활동에서 김 교수가 선도적인 역할을 한 것을 알게 된 것은 2000년대 중반 로스앤젤레스를 방문한 그를 만나서였다. 정의감에 불타는 행동가로 짐작했었는데 그의 몸가짐과 말씨에서 성실과 겸손이 그대로 묻어났다. 그는 1961년 미국에 유학 와서 사회복지학을 공부하고 대학에서 가르쳐 왔다. 은퇴 뒤엔 모국의 대학에 나가서 또 가르쳤다. 김 교수는 자신의 유별난 삶의 조각들을 즐겁고 재미있고 아름다운 사랑으로 쓰는 수필가이며 시인이기도 하다.
우리나라가 일본에 강제병합 되었던 시절에도 재미동포나 재일본유학생들도 조국의 독립을 위해 나섰던 역사의 기록들을 보며 외국에서 살다보면 모국에 대한 애국심이 더 하게 된다는 말이 새삼스럽게 다가왔다. 1980년 광주민주항쟁 이후 그 기운이 점차 민족통일운동으로 이어가기 시작했지만 전두환 군사정권의 탄압으로 통일활동가들을 빨갱이로 몰던 시절이었다. 김 교수가 도쿄에서 열리는 <김대중선생 구출 국제위원회>의 긴급회의에 참석차 서울에 들렸을 때도 공항에서 안기부 직원들에 유치되어 수난(受難)을 당하기도 했다.
이런 시절 재미동포학자 선우학원, 김동수, 김현환 등이 민족통일 토론의 필요성을 주장하며 1981년 3월 워싱턴에서 ‘해외동포 민족통일 심포지움’을 열었다. 미국, 카나다와 유럽의 교수,목사,지성인 60명이 참석한 모임이었다. 참석자들은 분단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북과 직접 대화도 해야 한다고 의견을 모았다. 놀랍게도 그해 11월, 오스트리아의 빈에서 ‘조국통일을 위한 북과 해외동포기독자대화’를 4일 동안 가졌다. 15명의 북의 관료, 학자들과 30명의 북미주와 유럽동포 학자와 종교인들이 만나 대화하고 토론했다. 남한에서라면 보안법에 걸려 곧 투옥(投獄)될 이런 만남이 분단 36년만에 처음 유럽의 중립국에서 있었던 역사적 사건이었다.
김 교수보다 9년 뒤 미국에 유학 온 나는 정형외과의사로 인공고관절 연구에 몰입하던 중 1992년 재미한인의사회 학술교류방문단으로 처음 북에 다녀왔다. 겨레의 반쪽인 북을 경험하고 분단현실에 대한 역사와 시대인식을 갖게 되었다. 한편 김동수 교수는 1983년, 평양 인민문화궁전에서 열린 <북과 북미학자의 대화>에서 “평화와 통일문제“에 대해 발표했다. 화기에 찬 토론이었지만 주체사상에 대해서는 견해 차이로 마찰(摩擦) 도 있었다고 했다. 도저히 갈 수 없는 곳으로 인식된 북녘을 다녀온 해외동포들의 방문기 <분단을 뛰어넘어>가 1984년에 출간 되었다. 이 기념비적 저서는 남한 지하에서도 출판되어 놀라움 속에 북 바로 알기에 커다란 공헌을 했다.
동포사회에서 비난을 받으면서도 모국의 평화통일을 추구하는 남편의 위태로운 행보를 가슴 조이며 보아온 부인 백하나 교수도 1984년 빈에서 열린 <북과 해외동포의 대화>에 참석했다, 이 모임에 북에서는 려연구(여운형의 딸), 안경호 박사등 40명 그리고 북미주와 서구의 해외동포 53명이 참석했다. 김 교수는 북의 안 박사와 회의공동문건 작성위원으로도 활약 했다. 떨리는 마음으로 참석했던 백 교수가 뒤에 쓴 회의참관기 <첫 경험> 끝 부분에 ……..
“1981년 빈에서 처음 북과 해외동포의 대화를 가졌을 때 서로 서먹서먹하고 … 불안하게 대하고 있었는데 누가 ‘정 이월 다 가고 삼월이라네’ 를 부르기 시작하자 모두가 합창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여러번 함께 부르는 동안 눈물을 흘리며 서로 껴안게 되었다고 한다. 누가 우리를 이렇게 갈라 놓았는가? 우리는 왜 우리 형제를 이렇게 서로 두려워하게 되었는가?
우리도 3년 전 그 회합 때를 회상하면서 손에 손을 잡고 이 노래를 부르고 또 불렀다. 나도 모르게 눈물이 흘렀다. 나는 굳이 닦으려 하지 않았다. 우리의 길고 차가운 분단사에 진정 화해의 봄은 언제 오려나? 민족의 숨결이 입에서 입으로, 민족의 피가 손과 손에서 흘렀다. 나는 생전 처음 뜨거운 동족의식을 느꼈다. 감격이 벅찼다. 나는 나를 다시 찾은 것이다.“
이 노래는 1928년 미국 유학에서 돌아온 안기영 이화여전 음악교수가 작곡한 <그리운 강남 >으로 일제강점에서 독립의 봄을 그리던 겨레의 한과 소망이 담긴 아리랑이었다. 그가 1950년 전쟁때 월북한 뒤 이 노래는 남한에서 금지곡이 되었는데 민주화 바람이 불어 온 1988 년 말에야 해금 되었다. 30여년 동안 죽은 듯 땅 속에 묻혔던 이 노래가 소리꾼 장사익에 의해 <강남 아리랑>으로 되살아나 우리에게 다시 다가왔다.
2000년대 중반 장사익 미국 순회 마지막 공연이 로스앤젤레스에서 있었다. 공연의 끝을 아쉬워하는 3천여 관중들의 빗발치는‘한 곡 더!’ 재창에 답해 그가 이 노래를 선창(先唱)하자 모두 일어나 함께 불렀다.“또 다시 보오옴이 오온다네, 아리랑,아리랑,아라리요……”그렇다, 아리랑 음률에 남과 북의 경계는 허물어지고, 아리랑 노랫말을 뇌이다 보면 우리의 목은 메인다. 그 밤 나는 쉬이 잠 들 수 없었다. 문득 백하나 교수의 <첫 경험> 글이 떠올라 <정 이월 다 가고>를 썼다. 곧 미주 중앙일보에 발표한 글을 귀국하는 장사익 소리꾼에 전하며 이 노래에 얽혀 있는 이런 가슴 저린 사연을 기억해 달라고 했다.
2000년 6.15공동선언 뒤 남북이 화해. 협력. 교류. 왕래 하기 시작한 조국을 해외동포들은 흐뭇하게 지켜 보았다. 그러나 2008년 이래 이명박근혜 정권이 6.15선언을 무력화하고 남북 왕래를 중단하자 나는 인공관절 치환수술과 관절기 제작을 돕기 위해 매해 평양의학대학병원을 방문했다. 2010년 방문 때는 6.15선언실천 북측 안경호 위원장과 평양 교외 초대소에서 밤 늦도록 얘기를 나눴다. 25년 전 빈에서 함께 했던 김동수 교수 얘기를 했더니 안 위원장은 반가워 안부를 물으며 조국 방문을 꼭 해주시면 좋겠다고 전해 달라 했다. 그가 잠시 옛날을 회상하는 듯 머리를 들더니 자신은 이제 8순이 되었다고 조용히 말했다.
2010년 6월 평양초대소에서 당시 해외동포위원회 김관기 국장(왼쪽)과 안경호 6.15 북측위원장(오른쪽)과 만나 밤새 얘기하며 시간을 보냈다. 안위원장은 지난 1월 타계했다.
김 교수가 2013년 <한국산문>에 발표한 <영어에 미친 나라>를 읽고 나는 속이 후련했다. 그런데 강남지역의 일부 부자 아줌마들이 반미적이라며 공격했다지요. 영어를 잘 하든가, 하는척 해야 사람 대우를 받는 남한이라지요. 신문 기사의 제목들도 버젓이 한글로 쓰는 영어이니 우리의 모국은 어느 나라입니가? 김 교수 부부는 2015년 가을 북의 어린이들을 돕는 목사 부부와 함께 북을 방문했다. 그러나 안경호 박사를 만나지는 못했다고 했다. 6년 전 8순이 되었다고 말했던 안 위원장이 2016년 1월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을 들었다. 곧 조의(弔意)를 전했다.
이제 김 교수는 55년, 나는 45년 미국을 살고 있다. 우리는 둘 다 밖에서 북과 남을 보고 또 남과 북에서도 상대를 보아 왔다. 그렇다, 해외동포가 보는 모국의 남과 북에 대한 인식과 견해는 남북 사람과는 다를 것이나 객관적일 수 있다. 김 선배는 사회복지학 가르칠 만큼 미국과 남녘에서 가르쳤다. 나도 수술 할 만큼 미국과 북에서 했다. 앞으로 사회복지도 만발 할, 영어에 미치지 않아도 한 나라로 사람답게 사는 세상을 마련해 줄 통일의 길로 들어서도록 열정을 보태 주시기 바랍니다. 모국에서 <백세 인생>이라는 노래가 인기 있다지요. 그러고 보니 김 선배님은 이제 겨우 8순이 됐네요. “아직은 쓸 만한” 나이래요. 그리고 내겐 “할 일이 아직 남아 있다”네요.
*백세 인생: https://www.youtube.com/watch?v=5DkZ_EsMTGU&list=RD5DkZ_EsMTGU
* 본 칼럼은 <한국의사수필가협회> 2016년 공동수필집에 수록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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