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화70년-9회] 소설 속 장관 부인이 불륜녀…작가, 공보처장 집 끌려가 폭행 당해
(서울=코리아위클리) 임헌영 교수(문학평론가·민족문제연그소장) = 독재체제가 궁지에 몰렸을 때 대응책은 이승만부터 박근혜 정권까지 엇비슷하다. 거짓 사과로 사건을 은폐·축소시켜 부하에게 책임을 떠넘긴다. 허위보도라며 언론과 비판세력을 싸잡아 빨갱이로 몰아댄다. 안보와 민생을 빌미로 삼아 궤변으로 역공한다. 어용 조직을 동원해 억지 주장과 공포 분위기를 조성한다. 남북문제를 적극 활용한다. 한국정치사는 친일 후예인 친미세력 주역으로 이 5막극을 연속 공연하는 것. 국민들은 이 레퍼토리에 번번이 속아왔다. 주인공만 바꿔 재공연하는 몰염치한 우주의 쓰레기들!
독재의 문 연 ‘부산정치파동’
제헌국회의원 임기는 2년이라 1950년 5월30일 제2대 총선을 맞아 대통령은 노골적인 선거운동과 야권 탄압을 자행했지만 집권당(대한국민당)과 야당(민국당)은 참패하고 무소속이 압도적으로 당선됐다. 그러자 2년 뒤 대통령 선거(국회 간접선거)를 치러야 할 노(老)독재자의 심경은 착잡해졌다.
마땅히 탄핵감이었던 이 독재자를 구해준 건 한국전쟁이었다. 임시수도 부산에서 전쟁은 유엔군에 맡겨두고 그는 영구집권 계책에 골몰했다. 국회에서는 인기가 떨어졌지만 미국 ‘박사’라는 점으로 국민은 현혹시킬 수 있었기에 대통령 직선제 개헌이 절실했다. 그 야욕을 간파한 의원들이 1952년 1월18일 그의 개헌안을 부결시키고 같은 해 4월 아예 내각책임제 개헌안을 상정하자 그는 파렴치한 본성을 드러냈다.
부산정치파동은 현대정치사 5막극의 원형이다. 정치깡패(백골단, 땃벌떼, 민중자결단)의 망동, 계엄령 선포(5월25일), 국회 출근차를 헌병대가 강제구인(26일), 국제공산당 비밀정치공작 날조로 10여명 의원 체포(27일), 대한민국정부 혁신위원회 사건 날조(30일) 등.
진정 이 소돔과 고모라에 의인이 열 명도 없었던가. 김성수·김창숙·서상일·이동하·이시영·조병옥 등이 6월20일 부산 남포동 경양식당 국제구락부에서 반독재 호헌구국 선언대회를 열어 서상일이 선언문을 읽는데 폭도들이 급습하여 파탄 냈고, 계엄사령부는 민주인사 30여명을 체포해버렸다(국제구락부 사건). 민주화운동의 첫 설화(舌禍)다.
대통령 직선제로 바꾼 발췌개헌안은 경찰과 군대와 테러단이 국회를 포위한 가운데서 7월4일 통과됐다.
언론은 사실 보도조차 하지 않다가 장면 총리 사임(1952년 4월20일) 후 경향신문, 김성수 부통령 사임(5월29일) 후 동아일보가 이승만 비판으로 돌아섰다. 그러자 경향신문 부산 공장에 20여명의 폭도가 난입하여 활자 상자를 뒤엎고 시설을 파괴했다(5월25일 밤 9시5분).
부패권력 고발한 김광주의 ‘필화’
▲ 소설가 김광주 |
제2대(1949년 6월4일~1950년 8월14일)와 제4대(1950년 11월26일~1953년 3월6일) 공보처장이었던 이철원(李哲源·1900~1979)은 난징, 프랑스, 미국에서 유학 후 귀국(1934년), 1938년 6월 흥업구락부(興業俱樂部) 사건으로 체포되었다가 베이징으로 망명, 8·15 후 귀국해 미군정 때부터 공보 관련 직책을 맡아왔다. 소설 모델은 이 처장의 부인 이모씨라는 유언비어가 나돌았다.
2월17일 오후 1시30분경 작가 김광주는 부산 목원다방에서 중앙방송국 방송과장(송모씨)의 소개로 공보처장 부인 이씨와 처음 만났다. 부인은 <나는 너를 싫어한다>의 여주인공이 자신으로 오해받으니 취소하라고 요구했고 작가는 가상인물이라고 반박했다.
시비 중 작가는 차에 태워져 공보처장 집에 감금됐고, “머리털이 수없이 빠지고 다리에 타박상”을 입는 등 위협적인 상황에서 “일부 독자의 오해를 샀다면 사과한다”는 글을 쓰고 풀려났다. 폭행은 젊은이(일부 신문은 운전기사)가 했고, 이씨는 만류했다지만 권세가에게 린치당한 사건이라 이승만 독재체제에 대한 반감도 한몫 보태 폭발적인 화제였다.
소설은 장관 부인을 “6·25 때 늙은 어머니와 하나밖에 없는 오라버니를 잃어버리고 자포자기에서 나오는 행동”으로 타락한 생활을 한다고 설정했다. 김광주는 소설에서 가족 잃은 슬픔은 그녀만은 아니라며 “어버이를 잃어버린 사람./ 형제를 잃어버린 사람./ 아내와 남편을 잃어버린 사람”이 많지만 다들 고난을 딛고 살아간다고 쓴다.
소설의 부인은 댄스홀에서 “어떤 외국 장교 같은 사람의 품에 안기어서 미친 듯이 빙빙 내 앞을 지나가면서 나에게 던진 눈짓”인 “추파”를 보낸다. 그 순간 나는 “드러운 연!” “일국의 장관 부인이라는 연이…”로 명칭을 바꾼다. “온 백성이 다 같은 운명에서 괴로운 삶을 이어나가는 것입니다. 당신만이 슬프고 당신만이 외로운 것이 아닙니다”라고 충고한다.
변호사·언론인·문화인 그리고 대검 검사까지도 헌법 제14조(학문과 예술의 자유) 위반이라는 항의가 빗발쳤지만 2월18일 작품 게재 잡지가 압수되자 한국기자협회도 나섰다.
이 처장은 ‘선전부 장관’ 다섯자만 삭제하고 발매하도록 타협했다면서 이 기사를 다루지 말아줄 것을 당부하는 공문(2월19일)을 보냈는데, 서울신문이 사진판 그대로 공개(2월22일)해버렸다.
믿던 도끼 서울신문에 발등을 찍힌 공보처는 경무대 비서 김광섭을 새 사장으로 천거했으나 이사회 표 대결에서 박종화에게 고배를 마셨다. 공정보도의 오종식 주필은 물러났고, 사회부장 역시 퇴사했다. 경향신문 문화부 경력의 시인 박인환은 선배를 위해 발 벗고 나서 대구에 피란한 ‘재구(在邱) 문화인’을 설득했다. 김팔봉·박두진·박목월·전숙희·정비석·조지훈·최정희·홍성유 등 문인과 배우 김동원·김승호·이해랑·최은희 등 45명은 2월21일 폭력범을 처벌하고 처장 부인 이씨가 공개 사죄하라는 성명서를 냈다. 그날 권력은 ‘광무신문지법’에 의거해 잡지에서 <나는 너를 싫어한다> 16쪽 전체를 삭제토록 지시했다.
전국문화단체총연합회는 김광섭과 모윤숙의 불문에 부치자는 주장과 절대다수의 강경 대응책이 맞서자 위원장 박종화가 중립을 취해서 2월23일 어정쩡한 성명이 나왔다. 이게 향후 한국 문화예술단체가 권력에 복종하는 주형(鑄型)이 되었다. 예술창작의 자유 원칙과 현실적인 간섭 배제를 강조한 뒤 “특정된 개인의 인신에 불미한 곡해와 오해를 야기시킬 수 있는 요소를 가졌다는 것은 작가의 의도 여하를 불구하고 작자의 과오”라는 양비론을 폈다.
이철원 처장은 이튿날 “아무리 문필의 자유라 하더라도 남의 명예를 오손할 우려가 있는 것을 써서 천하에 공포”하는 건 용서할 수없는 방종이라고 개가를 올렸다. 예술단체가 권력에 굴종당한 치욕적인 본보기였다.
<꼬리기사>
장관 부인과 동침한 나, 그녀에게 ‘절교장’을 쓰는데…
‘나는 너를 싫어한다-어떤 절연장’ 줄거리
한국전쟁 중이던 1952년 정부 고위층의 방탕을 모티브로 삼으면서 필화를 겪은 월간 ‘자유세계’ 창간호(1월)에 실린 경향신문 문화부장 김광주 작가의 단편 ‘나는 너를 싫어한다-어떤 절연장’의 첫 부분과 삽화. 당시 이 삽화는 외설스럽다는 평을 들었다.
한국전쟁 중이던 1952년 정부 고위층의 방탕을 모티브로 삼으면서 필화를 겪은 월간 ‘자유세계’ 창간호(1월)에 실린 경향신문 문화부장 김광주 작가의 단편 ‘나는 너를 싫어한다-어떤 절연장’의 첫 부분과 삽화. 당시 이 삽화는 외설스럽다는 평을 들었다.
테너 성악가인 ‘나’가 선전부 장관 부인인 ‘당신’에게 절연장을 보내는 독백 형식.
나는 6·25로 아버지와 동생을 북녘에 빼앗기고 남하한 사십이 채 안된 다섯 식구 가장으로 어느 개인병원 차고에서 다다미 피란살이를 한다. 40여명의 음악대를 인솔, 1·4후퇴 후 외국군과 상이용사 위문 공연을 해오다 “순전히 우리 민중을 위한, 후방에서 고생하고 있는 모든 백성의 청중을 위한 음악회”를 부산에서 처음 열었다.
▲'자유세계' 표지. 오영식 서지학자 제공 |
재즈가 울려 퍼지는 속에서 나는 “싸움은 누가 해주기에… 우리나라 장관이나, 고관이나, 그리고 그들의 귀부인들은 반드시 댄스파티를 가지고 거기 도취해야 하는 것인가?” 고뇌하며 술만 퍼마시다 정신을 잃었다. 새벽 6시경 눈을 떠보니 어느 호텔 별실 더블베드 위에 그녀와 나란히 누워 있었다. 나는 “윗저고리 하나 벗지 않았고, 허리띠 하나 끌르지 않은 채로 그대로”여서 얼른 귀가, ‘너’에게 절교장을 쓰면서 “부디 정말 훌륭한 장관 부인으로서, 부끄럽지 않은 점잖고 의젓한 여인이 되시고 기리 건강하시기 바랍니다”라고 소설은 끝맺는다. (*이 기사는 <경향신문>에 먼저 올려졌습니다. 필자의 허락을 받아 게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