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화 70년: 12회] 헌법학자 한태연 저서에 '사사오입 부당'…'국론 분열' 씌워 발매중지
(서울=코리아위클리) 임헌영 교수(민족문제연구소장) = 세상은 '나도 한때는' 정의의 편에 섰던 사람들에 의하여 한걸음 전진하다가 그런 사람들의 변절로 두 발짝 후퇴한다. 역사는 '한때만' 좋았던 사람보다 죽을 때까지 변하지 않는 인물들의 투쟁으로 발전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도 한때는'이라고 회고할 수 있는 노인은 평생 악업만 쌓은 것보다는 낫다. 악업에 빠졌다가 만년에 정의의 편으로 돌아서면 대환영을 받는다.
박근혜 탄핵정국은 오랜 세월 권력의 오염 속에서 헤매다 레테강을 건널 절호의 기회다. 그러나 레테강을 건너고 싶어도 그 악업이 너무 깊으면 사공 카론(국민)이 배를 태워주지 않을 수도 있다.
한인섭 교수는 칼럼 '한태연과 유신헌법'(한겨레신문)에서 그 악법 공모자로 지탄받던 한갈이(한태연, 갈봉근, 이후락)'보다 개정안은 이후락과 신직수가 주도하여, 김기춘(당시 법무부 법제과장) 등 검사들을 시켜 만들어 놓은 상태였다 고 했다. 골격은 손대지도 못한 한태연은 개정안 자구 수정에 조금 관여했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면죄부는 안된다고 한 인섭 교수는 대못을 박았다.
한태연과 김기춘. 전자에게는 '나도 한때는'이란 회상감이 있고, 후자에겐 그런 추억조차 가물거릴 뿐만 아니라 더 큰 악업을 쌓을 조짐이다. 오, 역사의 신 클리오여, 이 촛불의 함성을 들어주소서!
▲ 한태연 ㅣ 최석채 |
헌법학자 한태연(1916~2010)이 좋았던 시절은 역저 <헌법학>이 문교부에서 '국론 통일 저해'로 1955년 4월20일 발매중지를 당할 때였다. 정치사의 비극은 독재자 자신이 국론을 분열시키고는 애먼 데다 그 죄명을 뒤집어씌우는 거다. 한태연의 국론 저해 구절은 이렇다.
"과거 개헌 파동(1954년 11월27일 초대 대통령에 한해 3선 제한조항 철폐) 당시 자유당에서 발동한 사사오입은 논리상 부당하며 그러므로 결국 사사오입식으로 개헌을 통과시킨 그 자체가 헌법에 위반되는 처사여서 그 효력은 금후에도 충분히 논의될 수 있다."
헌법재판소가 없던 시절이라 이 주장은 이승만 대통령의 3선은 위헌이고, 사사오입 개헌 자체가 국론 분열이라는 것이다. 발간 즉시 공보처에 납본했고, 출판기념회(1955년 2월21일)까지 한 데다 8할이 판매된 상태였다. 정부조직법 개편으로 관련 업무가 문교부로 이관된 지 25일이 지나서야 나온 조처였다. 문교부는 관례에 따라 라고 변명했지만 정작 그런 관례는 없었다. 학생들은 판금도서 구하기에 바빴고 치안국은 내사를 시작했다(경향신문 1955년 4월25일).
윤제술 의원이 국회에서 출판 자유를 역설(4월26일)하던 중 모 의원이 "한군은 이쪽에는 이런 글을 발표하고 저쪽에는 저런 글을 쓰는 친구"라 해서 폭소가 일었다는 지적(동아일보 '단상단하')은 나중 유신헌법에도 관여할 수 있는 기회주의적 속성을 일갈한 대목이다.
여기서 한태연 교수가 분기탱천하여 문제 구절에 대해 끝까지 자기 주장을 폈다면 역사는 어찌 됐을까? 안타깝게 책은 사라져도 쟁점은 남는다. 그러니 3선 이후 이승만은 위헌적 대통령이란 논법이 성립한다. 위헌적 대통령 아래서 국민들은 불행할 수밖에 없기에 합법적인 지도자를 세우는 수밖에 없다.
'바쁜' 국가보안법
이 필화 석 달 뒤인 7월31일 신흥대학교(1960년 경희대로 개칭) 조영식 총장(1921~2012)이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구속되었다. 가곡 '내 사랑 목련화'(1973년)의 작사자인 그는 저서 <문화세계의 창조>(1951년 출간)에서 이렇게 썼다.
"레닌은 카우츠키의 민주주의를 비판하는 가운데서 '민주주의는 변증법적 발전과정에 의하여 이렇게 발전한다. 즉 전제정치로부터 부르주아 민주주의에로, 부르주아 민주주의에서부터 프롤레타리아 민주주의에로, 프롤레타리아 민주주의에서 아무것도 없는 민주주의에로'라고 말하였는데, 현재 프롤레타리아 민주주의까지는 도달하였다고 볼 것이라면 아무것도 없는 민주주의라고 하는 그 미도(未到)의 민주주의 사회는 과연 어떠한 것을 의미한 것일까. 즉 그 민주주의 사회라는 것은 민주주의의 완성된 형식의 사회를 의미한 것으로 추정되며 그야말로 진정한 민주주의요 (중략) 우리의 맞이할 다음 세계라는 것은 레닌 말과 같이 아무것도 없는 민주주의 사회, 즉 완성된 고도의 국가사회라는 것이 자명해지게 되는 것이다."
도서담당 부서였던 이철원 공보처장(재임 1950년 11월~1953년 1월)이 출판기념회에서 축사까지 했던 저서였다. 이선근 문교, 이호 법무 장관 등이 적극 옹호한 데다 대학 경영권을 노린 모략성 고발이었음이 밝혀져 6일 만에 석방은 됐으나 기소당해 학술원 감정까지 받고 무혐의 처분(1957년 6월13일)을 받았다.
이 대학은 독립투사 이시영(1869~1953)이 신흥무관학교(1911년 개교) 전통을 살려 신흥전문학원을 설립(1947년)한 데 뿌리를 두고 있다. 경희대가 이 전통을 계승하면 얼마나 영광스러울까. 육군사관학교조차도 신흥무관학교에서 기원을 찾아야 한다는 주장도 있다.
"백주의 테러는 테러가 아니다"?
독재 아래서는 국가보안법이 바쁘다. 정전협정에 따라 휴전 감시단으로 중립국감시위원단이 판문점에 주둔하게 되었는데, 체코와 폴란드 등 공산국가 대표도 포함되었다. 이를 추방하려는 관제 대규모 궐기대회가 1955년 8~12월 전국을 휩쓸었다. 강제 집회라면 휴전회담 반대부터 이골이 난 터였다. 이것만도 바쁜데 권력자가 행차하면 연도에 늘어서서 몇 시간이고 기다리다 자동차가 휘익 지나가는 불과 2~3분 동안 만세를 부르며 태극기를 흔들던 시절이었다.
이승만 측근으로 유엔대표부 상임대사였던 임병직(1893~1976)이 대구를 방문(1955년 9월10일)했을 때 학생들을 동원해 원성이 일어났다. 이에 대구매일신문은 '학도를 도구로 이용하지 말라'(9월13일)는 사설을 실었다. 필자는 주필 겸 편집국장 최석채(1917~1991).
당시 대구의 시민 정서는 이승만 정권에 대한 반감이 강한 데다 야당 성향의 대구매일신문은 경북도경찰국과 갈등이 있었다. 이에 경찰은 공산권인 적성감시위원단(敵性監視委員團) 축출운동을 훼방한 이적행위란 구실로 탄압에 나섰다.
옳지 못한 일에는 언제나 어용단체가 앞선다. 국민회 경북본부가 문제 구절을 취소하고 집필자는 처단하며 사과문을 대구시내 4개 일간신문에 게재하라고 요구했다(9월14일).
▲ 1955년 9월 이승만 정부 고관의 대구 행차 때 학생들을 동원해 환영한 행태를 비판한 사설을 써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기소된 최석채 대구매일신문 주필이 재판을 받는 모습. 경향신문 자료사진 |
테러범은 방치한 채 최석채는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구속(9월17일)하고서 '이적 신문인 대구매일신문을 변호하는 사람은 이적행위자로 간주하겠다'고 공포 분위기를 조성했다. 경북도 사찰과장은 국회 진상조사단에 백주의 테러는 테러가 아니다 라는 망언을 남겼다.
국회와 전국 대부분의 언론기관이 나서 이를 규탄하자 최석채는 1개월 만에 불구속 기소(10월14일)됐으며, 1956년 5월8일 대법원에서 무죄를 쟁취했다.
"학도를 도구로 이용하지 말라"
최석채가 쓴 사설
"요즈음에 와서 중·고등 학생들의 가두행렬이 매일의 다반사처럼 되어 있다. 방학 동안의 훈련을 겸한 모종의 행렬만이 아니라 최근 대구 시내의 예로서는 현관(顯官)의 출영에까지 학생들을 이용하고 도열을 지어 3~4시간 동안이나 귀중한 공부시간을 허비시키고 잔서(殘暑)의 폭양 밑에 서게 한 것을 목격하였다. 그 현관이 대구 시민과 무슨 큰 인연이 있고 또 거시적으로 환영하여야 할 대단한 국가적 공적이 있는지 모르겠으나, 수천 수만 남녀 학도들이 면학을 집어치워 버리고 한 사람 앞에 10환씩 돈을 내어 수기(手旗)를 사가지고 길바닥에 늘어서야 할 아무런 이유를 발견 못한다.
또 학생들은 그러한 하등의 의무도 없는 것이다. 특히 우리가 괴이하게 생각할 수밖에 없는 것은, 그것이 학교 당사자들의 회의에서 이루어진 것이 아니고, 관청 지시에 의하여 갑자기 행해졌다는 것을 들을 때 고급 행정 관리들의 상부 교제를 위한 도구로 학생을 이용했다고 볼 수밖에 없는 것이 아닌가?
…(중략)…끝으로 학교 당국자가 인습적인 상부 지시 순종의 태도를 버리고, 부당한 명령이 있을 때는 결속해서 도 당국이나 교육구청에 그 비(非)를 건의할 수 있는 박력과 학도 애호의 성의를 보여달라는 것을 부탁하고자 하는 것이다." (*이 기사는 <경향신문>에 먼저 올려졌습니다. 필자의 허락을 받아 게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