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화 70년 14] 사상계에 “6·25는 미·소의 꼭두각시 놀음” 글 쓴 함석헌, 보안법 구속
▲ 1965년 8월14일 서울 을지로 대성빌딩에서 한일협정 비준 반대 강연 후 시위대와 함께 행진하던 함석헌을 경찰들이 연행하고 있다. 종교사상가이자 민주인권운동가, 문필가인 함석헌은 일제와 이승만·박정희 독재에 저항하면서 구속과 투옥을 반복했다. 경향신문 자료사진 |
함석헌(咸錫憲, 1901~1989년)은 저승에서 가슴을 치며 ‘생각하는 백성이라야 산다’고 정유년 벽두에 우렁찬 수탉으로 계명산천(鷄鳴山川)을 절규할 것이다. 정녕 새 시대 새 아침이 밝아올 것인가?
‘내 기독교에 이단자 되리라’
함석헌은 자신을 바보새로 불렀다. 거위보다 큰 덩치에 날개가 3m로 ‘태평양의 제왕’이란 별명과는 달리 고기를 못 잡아 갈매기가 먹다 흘리는 걸 주워 먹는다는 신천옹(信天翁). 그는 일제 치하 도쿄 대지진(1923년 9월1일) 때 하룻밤 유치장 신세를 마수걸이 삼아, 1930년 오산학교 교사 때 독서회 사건으로 일주일 정주경찰서 구치, 1940년 송산리 농사학원 때 계우회(鷄友會)사건으로 1년형, 1942년 ‘성서조선’사건으로 1년형을 받은 항일 신앙투쟁의 베테랑이었다.
▲ 함석헌(오른쪽)이 종교가이자 사상가인 스승 유영모(왼쪽)와 함께한 모습. 경향신문 자료사진 |
정동 감리교회 장로 이승만이 자유당 고위직을 교인으로 채우자 친일파들이 대거 신자로 변신했다. 6·25 후 기독교는 외세와 권력과 결탁하여 온 나라를 대부흥회장으로 몰아갔다.
견디다 못한 신천옹은 이렇게 읊었다. “내 기독교에 이단자 되리라/ 참에야 어디 딴 끝 있으리오/ 그것은 교회주의의 안경에 비치는 허깨비뿐이니라/ (…)// 기독교는 위대하다/ 그러나 참은 보다 더 위대하다”(<대선언>, 1953년 7월4일).
함석헌의 ‘필화’
안창호. 이승훈, 조만식으로 이어온 그의 정신사적인 맥락은 1950년대 중반 장준하와 만나면서 명상과 은둔의 달밤의 기도자에서 행동하는 양심의 정오의 신앙으로 탈바꿈했다. 장준하의 ‘사상계’(1953년 4월 창간)가 독재 비판으로 전환한 것은 민주당 창당(1955년 9월18일) 이후였다.
함석헌이 1956년 1월 이 잡지에 처음 기고한 ‘한국의 기독교는 무엇을 하고 있는가?’는 자유당식 기독교 신앙 행태(한국 보수 기독교의 원형)를 신랄하게 비판한 글이었다. 이 글로 잡지가 엄청 팔려 명성을 얻은 그는 ‘할 말 있다’(‘사상계’ 1957년 3월)에서 침묵하는 민중에게 입을 열라고 죽비를 내리쳤다. 이후 장준하와 계창호(桂昌鎬, 편집장, 1936~)가 각각 두 차례나 독촉 끝에 나온 게 ‘생각하는 백성이라야 산다’(‘사상계’ 1958년 8월)였다. 이 멋진 제목은 마감이 임박해 계창호가 함석헌이 다 쓸 때까지 기다렸다가 제목을 못 붙인 원고를 넘겨받아 지프차로 귀사하는 동안에 붙인 것이다.
자유당은 1958년 8월5일 2년 뒤의 대통령 선거(3월15일)에 대비해 비판세력을 겁박하려고 국가보안법 개정안을 국무회의에서 의결했는데, 이즈음에 3건의 필화가 발생했다.
함석헌은 8월8일 서울시경찰국 사찰과가 구속했는데, 그보다 먼저 언론인 장수영(張秀永, 1924~1969년)도 구속(8월1일)됐다. 칼럼 ‘도박자의 정의(Definition of Gambler)’(‘코리아 타임스’ 7월30일)가 이라크에 빗대어 한국의 반이승만 혁명을 부추긴다는 이유였다. 둘 다 국가보안법 3조(반국가 선전 선동) 위반이었다.
군 장비 현대화로 2개 사단이 해체 준비를 하고 있다는 기사(‘동아일보’ 8월10일)를 쓴 최원각(崔元珏, 1928~) 기자는 일반 이적죄(利敵罪)로 헌병사령부가 연행(8월11일)했다. ‘경향신문’은 두 차례(8월15일, 20일자)나 사설로 “혐의를 받고 있는 것에 대한 범의(犯意)는 절대로 없었음이 명백하다”라고 공박하며, 대통령 4선을 위한 공포 분위기 조성임을 까발렸다. 한국신문편집인협회도 8월16일 결의를 거쳐 내무·국방·법무 3부에다 항의서를 냈다. 최원각은 이내, 장수영은 17일, 함석헌은 25일 풀려났는데, 신천옹의 글은 인구에 회자됐다.
“국민 전체가 회개해야”
“나라가 온통 들어 잿더미, 시체더미로 만들었던 6·25 싸움이 일어난 지 여덟 돌이 되도록 우리는 그 뜻을 깨닫지 못하고 있다”고 이 명문은 서두를 뗀다. “나라 절반을 꺾어 한배 새끼가 서로 목을 짜르고 머리를 까고 세계 모든 나라가 거기 어울림을 하여 피와 불의 회오리바람을 쳐 하늘에 댔던 그 무서운 난리”가 6·25였다.
“로키 산의 독수리와 북빙양의 곰이 그 미끼를 나누려 할 때 서로 물고 당기다가 할 수 없이 찢어진 금이 이 파리한 염소 같은 우리나라의 허리동강이인 38선”이다. 그러니 “싸움의 원인은 밖에 있지 안에 있지 않다. 우리는 고래 싸움에 등이 터진 새우다.”
남북한은 둘 다 ‘괴뢰’로 서로가 싸웠다. “남쪽 동포도 북쪽 동포도 동포라고는 하면서, 아들이 아버지에게 칼을 겨누고 형이 동생에게 총을 내미는 이 싸움”에 나선 건 우리가 강대국의 ‘괴뢰’여서다. 이런 ‘괴뢰’ 상태를 형제애로 통일하려면 참 해방을 이룩할 참 정권이 들어서야 하는데, 그러려면 백성들이 생각을 해야 된다. 참 정권이란 싸움 대신 상대편에게 “들어오너라, 너를 대항해 죽이기보다는 나는 차라리 네 칼에 죽는 것이 마음이 편하다. 땅이 소원이면 가져라, 물자가 목적이면 마음대로 해라, 정권이 쥐고 싶어 그런다면 그대로 하려므나. 내가 그것을 너하고야 바꾸겠느냐?”라며 사랑과 포용으로 끌어안아야 한다. 참 해방에 “참 자유 하는 민족이 되었다면, 미·소 두 세력이 압박을 하거나 말거나 우리는 우리대로 섰을 것이다.” 외세가 아무리 부추겨도 안 싸웠을 터이고 상대를 욕하지도 않을 것이다.
“속아서 그 앞잡이 된 것은 정권 쥔 자들이요, 속은 것은 욕심” 때문이다. “형제 싸움에 서로 이겼노라니 정말은 진 것 아닌가? 어찌 승전 축하를 할까. 슬피 울어도 부족할 일인데,(…) 형제를 죽이고 훈장이 무슨 훈장이냐 하고 떼어 던진 것을 보지 못했다.”
이런 전쟁 중에 “가장 보기 싫은 것은 종교단체들”로, 그들은 “구호물자를 미끼로 교세 늘리려고나 하고, 그러고는 정부, 군대의 하는 일, 그저 잘한다 잘한다 하고 날씨라도 맑아 인민군 폭격이라도 좀 더 잘되기를 바라는 정도였다. 대적을 불쌍히 여기는 사랑, 정치하는 자의 잘못을 책망하는 정말 의의 빛을 보여주고, 그 때문에 핍박을 당한 일을 한번도 보지 못했다.”
선거는 북진통일 구호뿐이요, “내 비위에 거슬리면 빨갱이니, 통일하는 것은 칼밖에 모르나?” “국민 전체가 회개를 해야 할 것이다”라고 글은 끝난다.
경찰에 끌려간 함석헌은 뺨을 맞고 수염도 뽑혀가며 용공혐의 심문을 받았다. 공산주의 사상으로 국체 변혁을 노린다, 한국의 국체를 부인한다, 정부와 정치인을 비난한다, 공산군에게 그냥 들어오라는 건 패배주의의 선전이다, 군인의 훈장을 부인한다는 등등이 그를 옭아맨 중요 혐의사항이었다. 그는 풀려난 후 장준하의 독촉으로 옥중 체험기 격으로 <‘생각하는 백성이라야 산다’를 풀어 밝힌다>(‘사상계’ 1958년 10월)를 썼다. 얼마나 고통스러웠으면 이승만을 치켜세우는 대목까지 삽입했을까.
외세의존, 북진통일, 독재 대신 민족주체, 평화통일, 민주혁명을 하려면 국민이 각성해야 한다며 그런 역할을 포기한 썩은 기독교를 비판한 명문이다.
<꼬리기사>
함석헌의 ‘사상계’ 기고
민족국가 시대에 제 노릇을 못하고 남의 종이 됐기 때문에 그 다음 시대에도 다른 데 종으로 팔리는 수밖에 없었다. 우리가 일본으로부터 해방이 됐다 할 수 있으나 참 해방은 조금도 된 것 없다. 도리어 전보다 더 참혹한 것은 전에 상전이 하나였던 대신 지금은 둘 셋이다. 일본시대에는 종살이라도 부모형제가 한 집에 살 수 있고 동포가 서로 교통할 수는 있지 않았나. 지금 그것도 못해 부모처자가 남북으로 헤어져 헤매는 나라가 자유는 무슨 자유, 해방은 무슨 해방인가?
남한은 북한을 소련·중공의 꼭두각시라 하고, 북한은 남한을 미국의 꼭두각시라 하니 남이 볼 때 있는 것은 꼭두각시뿐이지 나라가 아니다. 우리는 나라 없는 백성이다. 6·25는 꼭두각시의 놀음이다. 민중의 시대에 민중이 살았어야 할 터인데 민중이 죽었으니 남의 꼭두각시밖에 될 것 없지 않은가? (*이 기사는 <경향신문>에 먼저 올려졌습니다. 필자의 허락을 받아 게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