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월혁명의 교훈과 ‘촛불’의 미래
뉴스로=이재봉 칼럼니스트
'촛불'의 미래가 두려워진다. '맞불'의 기세가 심상치 않기 때문이다. 거리엔 태극기가 펄럭이고 대형 십자가도 등장한다. 하필 종교 '개혁' 500주년에 펼쳐지는 수구 개신교의 반동이랄까. 숨죽이던 재벌들은 국가경제가 어렵다며 개혁에 딴죽을 걸고, 극우언론은 이를 부추긴다. 연관자나 부역자들의 저항도 만만치 않다. 역사교과서 국정화를 고수(固守)한다. 안보를 앞세우고 북한의 위협을 부풀리며 싸드를 밀어붙인다. 위안부소녀상 철거까지 들먹거린다.
박근혜가 탄핵되더라도 대선은 만만치 않을 것 같다. 돈줄과 권력을 쥔 재벌과 언론 그리고 국정원과 검찰이 가만있겠는가. 죽 쒀서 개 줄지 모를 터에 개혁세력의 분열 조짐이 보인다. '촛불'들은 적폐(積弊) 청산을 통한 산뜻한 변화를 원한다. 개혁의 속도와 범위에 어느 정도 차이는 있을지라도, 문재인이나 이재명도 좋고 박원순이나 안희정도 괜찮을 것이다. 'X빠'로 불리는 극성 지지자들이 문제다. 내부 경쟁자나 그 지지자들을 원수 대하듯 하기 때문이다. 지지도에 따라 대통령과 국무총리 후보로 역할을 분담해 협력하며 공생하는 길도 있을 텐데 말이다.
이에 4월혁명의 역사 한 토막을 되새기며 촛불혁명을 위한 교훈으로 삼게 되길 기대한다. 당시 미국의 외교문서를 요약한다.
1960년 4월 19일, 이승만 하야를 외치는 대학생들의 시위가 대규모로 확산되자, 매카노기 주한미국대사가 급히 경무대를 방문했다. 이승만은 자신이 국민이 지지를 받고 있다고 억지를 부렸다. 거리의 "폭도들을 통제하기 위한 강력한 조치"를 승인한 것은 잘한 일이라고 했다. 장면 부통령과 민주당 지도자들이 봉기(蜂起)를 선동한다며 그들을 격렬하게 비난했다.
4월 20일, 이승만은 19일의 '난동'에 심대한 충격을 받았다는 담화문을 발표했다. "부상자들 가운데 두 사람의 미국인이 끼여 있었음을 심히 유감으로 여기는 바"라며, 국민의 불만을 해소하기 보다는 미국의 비난을 돌리는 데 초점을 맞추었다.
4월 21일, 매카노기가 다시 경무대를 방문했다. 이승만은 '4.19 봉기'에 대한 미국의 반응이 잘못됐다고 항의했다. 거리의 시위는 국민의 불만이 반영된 게 아니라 일부 천주교 세력의 지지를 받고 있는 "(부통령) 장면의 음모"라고 강조했다. 미국 언론이 한국의 봉기를 집중 보도함으로써 사태를 악화시킨다고 불만을 터뜨렸다. 미국이 이러한 진상을 파악하지 못한 채 대한정책을 추구한다면 엄청난 혼란을 초래할 것이라고 경고했다. 이에 매카노기는 미국의 모든 정보망에 의하면 장면이 봉기의 선동자가 절대 아니라 오히려 "충성스러운 야당의 충실한 지도자"이며, 봉기는 민중의 정당한 불만에 따라 자발적으로 일어난다고 반박했다.
4월 23일, 시위가 격렬해지자 장면이 부통령직을 사임한다는 성명을 발표했다. 부정선거로 부통령에 당선된 이기붕은 사퇴를 "고려한다"는 성명을 내놓았다.
4월 24일, 이승만은 모든 국무위원들의 사표를 받아들이고 자신은 자유당과 결별할 계획이라고 발표했다. '탈당'해서 정국혼란을 수습하겠다는 것이었다.
4월 25일, 계엄령 아래서도 대학교수들이 시국선언을 하고 거리행진을 했다. 대규모 군중이 합세했다.
4월 26일, 적어도 5만 명의 시위대가 아침부터 거리를 행진했다. 9시경 매카노기가 김정렬 국방부장관에게 전화를 걸었다. 지금 당장 경무대로 가서 대통령에게 다음과 같이 전하라고 명령하다시피 했다. 첫째, 대통령이 즉시 학생대표단을 만날 것; 둘째, 선거 재실시에 관한 성명을 발표할 것; 셋째, 대통령이 자신의 미래에 대해 생각해볼 것. 1시간 뒤 김정렬이 매카노기에게 전화했다. 이승만이 "국민이 원한다면" 대통령직을 사임하겠고, 선거 재실시를 명령하겠다는 성명을 준비한다는 내용이었다. 10시 30분경 성명이 발표되었다. 5분 뒤 매카노기가 매그루더 주한미군사령관과 함께 경무대에 도착했다. 매카노기가 영어로 번역된 성명문을 읽어보고 이승만에게 심문하다시피 했다. 둘의 대화를 아래에 요약한다.
매카노기: "국민이 원한다면 사임하겠다는 뜻이 무엇입니까?"
이승만: "내가 국민 여러분에게 방해가 된다면 물러나겠다는 뜻이오."
매카노기: "국민의 뜻을 어떻게 결정하겠습니까? 성명이 '유보적'이고 '단서' 조항이 몹시 애매합니다."
이승만: "우리가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할 것이오."
매카노기: "명확하고 이해할 수 있는 의지의 표명이 꼭 필요합니다. 현 상황에서 애매한 표현과 임시변통은 위험합니다."
이승만: "정부가 할 수 있는 일은 다 할 것이오."
매카노기: "한국민의 정당한 요구뿐만 아니라 미국의 근본적 이익까지 위험에 처해 있습니다..... 각하는 죠지 와싱턴처럼 한국 민족의 진정한 아버지입니다. 그러나 너무 오랫동안 너무 많은 일을 해 온 연로한 정치가는 존경받는 자리로 은퇴하고, 특히 지금같이 복잡하고 어려운 시기에는 정부의 부담을 젊은 사람들에게 넘겨주는 게 바람직하다고 생각합니다."
이승만: "깊이 생각해보겠소."
4월 27일, 이승만은 사직서를 국회에 제출하고 마침내 사임성명을 발표했다.
이렇듯, 1960년 4월 26일 "국민이 원한다면"이라는 단서를 붙여 사임하겠다는 이승만의 '조건부' 하야 성명은 기만(欺瞞)이었다. 폭발하는 민중의 불만을 일단 막아놓고 보자는 속임수 또는 기껏해야 미봉책이었던 것이다. 3일 앞서 발표된 이기붕의 사퇴 '고려' 성명과 같은 맥락이랄까. '무조건 즉각 사퇴'를 촉구하는 매카노기의 압력과 회유를 통해 미국의 확고한 의지를 파악한 뒤에야, 4월 27일 마침내 사직서를 제출하고 진짜 하야 성명을 발표했던 것이다. 따라서 요즘 일부 학자들과 언론인들이 4월혁명을 거론하며 이승만이 "4월 26일" 하야했다고 말하는 것은 잘못이다.
이승만이 물러난 뒤에도 1960년 5월 초까지 한국의 정세는 예측하기 어려운 불안한 상태가 지속되었다. 자유당 일부에서는 국회에 의한 간접선거를 통해 이승만을 대통령으로 다시 추대하려는 은밀한 움직임도 있었다. 미국 국무부는 이승만이 여전히 정부의 일에 개입하며 심복을 통해 허정 과도정부 수반에게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는 보고를 받고 예의주시했다.
5월 25일, 이승만의 부인 프란체스카가 매카노기의 부인에게 전화를 걸어 이승만과 자신의 하와이 망명을 부탁했다. 이승만이 지지자들과 동료들로부터 정계에 복귀해달라는 "커다란 압력"을 받고 있는데 피하고 싶다는 것이었다. 다음날 매카노기에게 이를 전해들은 허정 역시 이승만 때문에 정국이 동요되고 정권이 약해지고 있으니 그들이 "가급적 빨리" 한국을 떠나는 게 "반드시 필요하다"고 했다. 미국 국무부가 즉각 초청장을 보내자, 이승만 부부는 5월 29일 하와이행 전세기에 올랐다.
그로부터 거의 57년이 흐른 2017년 1월, 나는 미국행 비행기 안에서 이 글을 쓰며 이승만과 박근혜를 빗대며 떠올려본다. 둘의 기만과 반동이 닮은꼴이랄까. 이승만의 '조건부' 하야 성명은 박근혜의 음흉한 사과 성명과 비슷하다. 이승만이 경무대를 나와서도 심복을 통해 허정에게 영향력을 행사했듯, 박근혜는 청와대 관저에 머무르며 비서진과 황교안을 통해 훨씬 쉽게 국정에 개입하고 있을 것이다. 이승만 지지자들은 그의 정계 복귀를 은밀하게 추진했지만, 친박 세력은 박근혜 탄핵 저지와 정권 연장을 노골적으로 추진한다. 미국은 1960년 이승만을 확실하게 내쳤지만 2017년엔, 중국을 겨냥한 싸드 배치와 한미일 공조 강화를 위해, 박근혜를 은근히 붙잡고 싶지 않을까. 이래저래 '촛불'의 미래가 걱정된다.
글=이재봉 원광대 교수
* 이 칼럼은 오마이뉴스에도 게재됐습니다.
* ‘글로벌웹진’ 뉴스로 칼럼 ‘이재봉의 평화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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