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가 할 일은 이제부터다
뉴스로=노창현칼럼니스트 newsroh@gmail.com
지금으로부터 30년전인 1987년 6월 29일. 민정당 대표 노태우가 극민적 요구였던 민주화와 직선제 개헌을 골자로 한 특별선언을 했습니다. 역사적인 6.29 선언입니다. 당시 감회를 돌이키면 지금 당장 박근혜가 하야를 선언한다 해도 미치지 못할 것입니다. 대한민국에 진정한 민주주의가 소생할 단초(端初)가 마련된 것이었으니까요. 사람들은 거리로 쏟아져 나와 환호했고 카페에서는 ‘오늘은 좋은날’이라며 무료로 손님들을 맞고 소생한 민주주의를 자축했습니다.
1980년 광주민주항쟁을 군화발로 짓밟은 전두환은 그해 8월 홀로 출마해 박정희 유신통치의 유산인 통일주체국민회의 대의원들에 의해 11대 대통령이 되었고 이듬해 2월 7년 단임제로 개정된 헌법을 통해 12대 대통령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민중은 결코 불의한 정권에 대한 저항을 멈추지 않았고 ‘탁치니까 억하고 죽었다’는 박종철군 고문치사 사건을 계기로 들불처럼 일어난 6월 항쟁이후 국민에게 항복한 6.29선언이 나오게 되었습니다.
민주주의에서는 너무나 당연한, 대통령을 내손으로 뽑는 권리가 비로소 주어진 것입니다. 대통령 직선제 개헌과 가택연금중이던 야당 지도자 김대중 사면복권, 자유로운 정당활동 보장이라는 6.29선언이 세상에 발표된후 민주당 총재 김영삼이 한 말이 아직도 귀에 남습니다.
“만시지탄이지만 전적으로 환영한다.”
만시지탄은 때늦은 한탄(恨歎)이라는 뜻입니다. 기회를 잃고 난 뒤에 뒤늦게 안타까워하는 나오는 탄식이지요. 너무나 많은 희생을 치른 후에야 국민의 요구대로 이뤄진 것이 김영삼은 안타까웠지만 이제라도 역사의 물줄기를 바로 잡게 된 것은 다행이기에 전적으로 환영한다는 말을 붙인 것입니다.
그날의 감회에 감히 비교할 바는 아니지만 반기문 전 유엔사무총장의 대권포기선언은 자연스럽게 ‘만시지탄’을 떠을리게 합니다. 참으로 안타까운 일입니다. 처음부터 가지 말았어야 할 길이었습니다. 유엔 사무총장까지 지낸 인물이 뭐가 아쉬워 대통령을 생각한다 말입니까.
반기문은 30년전 독재정권에 죽음을 걸고 맞서 싸운 김영삼도, 김대중도 아닙니다. 그가 아니라도 대통령을 하고 싶어하는 사람들은 차고 넘칩니다. 10년간 유엔 사무총장을 지내면서 쌓은 경륜과 엄청난 국제적 인맥들, 그가 대한민국과 분단된 한반도를 위해 할 수 있는 일들은 대통령이 아니더라도 너무나 중요하고 많습니다.
그는 “순수하고 소박한 뜻을 가지고 시작했는데 너무 순수했던 거 같다. 정치인들은 단 한사람도 마음을 비우고 솔직히 이야기 하는 사람이 없더라. 정치는 꾼에게 맡기라고도 하더라. 당신은 꾼이 아닌데 왜 왔느냐고 하더라. 그래서 정치가 정말 이런 건가, 그런 생각이 들더라는 회의가 들었다”고 털어놓았습니다.
“정치인들의 눈에서 사람을 미워하는 게 보이고 자꾸만 사람을 가르려고 하더라. 표를 얻으려면 나는 보수 쪽이라고 확실하게 말하라는 요청을 너무나 많이 들었다. 보수의 소모품이 되라는 것과 같은 이야기다. 정치인이면 진영을 분명히 하라고 요구하더라. 하지만 보수만을 위해서 일하는 사람은 대통령의 자격이 없다. 나는 보수이지만 그런 이야기는 내 양심상 받아들일 수가 없다”고도 했습니다.
대권도전을 포기한 마당에 털어놓은 그의 심중을 확인하니 착잡한 마음이 듭니다. 유엔 사무총장에 재임한 10년간 뉴욕에서 기자로서 지켜본 입장에서 그의 스타일과 성정(性情)을 고려했을 때 절대 한국의 정치판이 맞지 않을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더구나 한국 대통령보다 열배는 멋지고 폼나는 유엔 사무총장까지 한 인물이 뭐가 아쉬워 구정물에 발을 담그겠냐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러나 적어도 2년전부터 박근혜와 새누리 인사들에 치우치는 행보가 시작되면서 고개가 갸우뚱해졌습니다. ‘이 양반이 정말 대통령을 생각하나?’ 더욱 이해할 수 없는 것은 새누리 세력의 러브콜을 받아들이고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스스로를 보수라고 규정했지만 새누리 세력은 보수가 아닙니다. 보수는 지켜야 할 건강한 가치가 있어야 합니다. 부도덕하고 부패한 세력이 어떻게 보수입니까. 왜 가짜 보수와 연대해 자신의 좋은 이미지를 털어먹습니까. 만일 새누리를 보수라고 믿었다면 그는 순수한게 아니라 무지한 것입니다. 우리같은 사람도 척보면 아는데 위선적이고 불의한 자들을 보수로 믿고 그자들의 감언이설에 녹아 대통령 꿈을 꾸다니요. 허공을 향해 ‘이 한 몸 불사르겠다’는 말 대신 ‘미력하나마 전직 유엔총장의 노하우를 갖고 조국과 민족을 위해서라면 지구촌 어디라도 달려가겠다’고 했어야 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그를 제2의 고건이라고 말합니다. 한때 대권주자로서 높은 지지율을 받았던 고건 전총리도 막상 대선판에 나오자 예상치 못한 거친 환경에 당황해 일찌감치 대권도전을 포기했습니다. 서울대 총장을 역임한 정운찬은 대통령은 고사하고 이명박정권하에서 국무총리에 임명됐다가 청문회를 통해 발가벗겨지고 난타당한후 가족과 부둥켜안고 눈물을 흘렸습니다.
학교에서, 관에서 점잖게 체면을 지키며 살아온 이들은 시궁창같은 한국 정치판에서 살아남기란 사실상 불가능합니다. 명예(名譽)를 중시 여긴다면 더 말할 것도 없겠지요. 그래서 많은 사람들은 그가 대권레이스를 완주할 것이라고 믿지 않았던 것입니다. (반기문의 중도하차를 ‘안철수가 예언했네’, ‘이재명이 맞췄네’, 정청래는 ‘나의 대예언 적중’이라는 자랑까지 하고 있네요. 그렇게 잘 맞추면 정치를 할게 아니라 돗자리 깔고 나가는게 훨 낫지요.)
불과 20일이었습니다. 1월 12일 귀국해 2월 1일 포기까지 말입니다. 그는 사무총장 퇴임의 자리가 채 식기도 전에 대권고지로 가는 롤러코스터를 탑승했고 정신없이 흔들렸습니다. 서울과 낮밤이 정반대인 뉴욕에서 돌아와 이제 겨우 시차가 적응될 짧은 기간 동안 온갖 구설을 빚었고 희화화(戲畫化)됐으며 꼬리를 무는 의혹들이 확대재생산되었습니다.
고희를 넘기도록 양지에서 우아하게 살던 그가 ‘인격살인에 가까운 음해(陰害)와 가짜뉴스’에 얼마나 당혹했을지는 새삼 말할 필요가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반응이야말로 그가 얼마나 마음의 각오없이 대권레이스에 뛰어들었는지 잘 말해주고 있습니다.
귀국하자마자 자판기에 만원권 두장을 넣고, 편의점에서 에비앙 생수를 잡았다든지, 현충원의 컨닝페이퍼 논란, 음성 꽃동네에서 턱받이 하고 음식물을 떠먹이고 나홀로 방역복을 입고 소독하는 모습 등등 어찌보면 별것도 아닌 것들이 연일 조롱거리가 되었습니다. 심지어 성묘할 때 퇴주잔 논란은 악의적인 편집이었다는 사실도 밝혀졌습니다. 자신의 일거수일투족을 보도하고 위안부문제를 지속적으로 따져묻는 기자들을 ‘나쁜놈들’이라고 중얼거린것까지 활자화되었으니 정말 세상 무섭다는 생각이 들 법도 합니다.
‘진보적 보수주의자’라고 한 것도 진보와 보수를 아우르는 통합의 지도자가 되겠다는 뜻이었지만 오히려 궤변이다, 메시지가 뭐냐, 기회주의자로 매도되었습니다. 그로선 참 할 말도 많고 억울할 법도 합니다. 하지만 이 모두가 스스로 자초한 것입니다. 자업자득(自業自得)이라고 하지요. 걷지 말아야 할 길을 갔기때문에 파생된 필연이었다는 것입니다. 닳고 닳은 정치꾼들이라면 두둑한 뱃심으로 정면 돌파하거나 간교한 꾀로 피해가지만 점잖은 학자의 풍모를 지닌 그가 어찌 대처를 하겠습니까.
게다가 동생과 조카의 미국법원 기소, 퇴임직후 공직을 맡지 않도록 한 유엔 결의안 논란, 반감을 가진 전직 유엔인사들이 국내 미디어를 통해 툭툭 던지는 가시돋친 말들, 해외 미디어들의 부정적인 평가들이 이어지면서 그는 유엔 사무총장으로서 쌓은 10년 업적이 돌이킬 수 없이 훼손(毁損)될 수 있다는 두려움마저 갖게 되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우리의 손실이기도 합니다.
저는 그가 귀국하기 이틀전 ‘발가벗을 각오하셨나요? 반기문의 걱정되는 환향’이라는 칼럼을 썼습니다. 그가 대통령이 되어 또다른 리더십을 보일 수도 있겠지만 그에 앞서 반대 정치세력의 노도와 같은 공격과 전방위적으로 들이대는 송곳검증의 칼날 아래 깊은 내상(內傷)이 불가피할 것이라고 했습니다. 상처뿐인 영광이라도 대통령만 될 수 있다면 다행이지만 상처만 남고 영광은 없지 않을지 그게 걱정이라고 했습니다.
http://www.newsroh.com/bbs/board.php?bo_table=cno&wr_id=547
그래서 ‘만시지탄’이지만 여기서 멈춘 것이 다행이라는 말을 하는 것입니다. 잘못된 것을 알고 늦게라도 말을 되돌렸으니 사후약방문(死後藥方文)도, 망양보뢰(亡羊補牢)마냥 엎질러진 물은 아니라는 뜻입니다.
대통령의 꿈을 내려놓았기에 그는 더욱 보폭이 자유로워졌습니다. 특정 정치인을 지지하는 일도 없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역설적으로 이제 그는 진보적 보수주의자가 될 가능성이 생겼습니다. 진보와 보수의 개념을 희롱하며 국민을 편가르는 불온한 세력에 휘둘리지 않고 오직 국민의 눈높이에서 국민을 통합하는 존경받는 국가원로로서 뚜벅뚜벅 나아가 주기를 소망합니다.
* '글로벌웹진' 뉴스로 칼럼 ‘노창현의 뉴욕편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