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극은 뉴욕의 축복
뉴스로=앤드류 임 칼럼니스트
브로드웨이가 있는 맨하탄, 세계 공연예술의 중심이라는 뉴욕씨티… 그러나 정작 이곳에 사는 한인들은 실감 못하는 말일 수 있다. 전 세계에서 관객들이 모여든다는 그 공연들을 이런저런 이유로 가보기 어렵기 때문이다. 혹자는 뉴욕의 동포들이 왜 그런 문화적 혜택과 뉴요커들의 특권을 누리지 못하느냐며 속 모르는 소리를 하기도 한다. 실제로 한국에서 여행 온 어느 지인에게서 ‘뉴욕 교민들이 브로드웨이 공연 볼 경제적 여유도 안되고 영어도 못알아 듣기 때문 아니겠느냐’는 전혀 체계적이지 않은 나름의 분석을 들어본 적도 있다. 대학로에서 연극 꽤나 보러 다닌다는 그 지인의 말 속에서 동포들에 대한 일종의 조소(嘲笑)와 냉소(冷笑)마저 엿보여 더 씁쓸했던 기억이다.
규모와 수준의 차이는 있겠지만, 뉴욕의 브로드웨이와 비견되는 곳이 한국의 대학로다. 모 관련기관의 조사에 따르면, 사람들이 연극을 보러 대학로에 모여드는 이유는 대략 세가지란다. 영화나 TV보다 라이브인 연극이 주는 감동이 훨씬 크고 깊고 강렬하다는 사실을 알기 때문에, 연극을 나름 평가하고 감상할 줄 안다고 자부하는 식자들로서 연극만의 예술성을 감상하기 위해 그리고 마지막 하나는 무언가 색다른 경험을 위해 처음 또는 아주 가끔씩 극장을 찾는다고 한다.
뉴욕의 한인들이 브로드웨이를 코 앞에 두고 살면서도 그 문화적 혜택을 만끽하지 못한다는 일부 조국 사람들의 냉소 중에 ‘경제적 여유가 없어서’라는 선입견에 대해서는 항변 조차 가치 없게 느껴질 만큼 근거도 어이도 없다.
뉴욕의 한인들 중에는 직종상 보통의 미국 샐러리맨들과 다른 시간대의 일상을 사는 사람들이 많다. 미국인들이 ‘잠 더 자고 일 덜하기 위해’ 또는 ‘섬세한 손재주가 떨어져’ 기피하는, 아니 범접(犯接) 할 수 없는 업종들에서 한국인들은 어느 민족도 해내지 못한 경제적 성공을 이루고 있다. 일하는 시간에 공연하는 브로드웨이의 스케줄이 생활 패턴과 맞아 떨어지지 않는 현실이 뉴욕의 한인들로 하여금 브로드웨이를 만끽할 수 없게 만드는 첫번째 이유인 것이다. 경제적인 문제가 아니다 돈은 오히려 그 시간에도 일하는 한국인들이 더 많이 벌 수 있다.
언어의 문제에는 거의 전적으로 동의한다. 주지의 사실이지만 한국어는 영어와 반대 어순을 가진 전 세계 몇 안되는 언어다. 즉 한국인들은 세계에서 가장 영어 배우기 어려운 언어권에 속한 셈이다. 미국에서 얼마나 오래 살았건 언어로 이루어진 예술을 감상하기 껄끄러워 하는 건 어쩌면 당연해 보인다.
그런데 필자는 한가지 질문을 독자 여러분께 드려보고자 한다. 영화는 어떤가. 한국인들이 연극 공연에는 잘 안가도 영화관에는 편히 가는 현상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겠는가. 특히나 공상과학 영화는 더 편한 마음으로 가족들과 연인과 나들이 삼아 보러 가지 않는가. 대부분의 영화도 대사를 이해해야 하는데 말이다. 그런데도 연극은 꺼리는 이유가 무엇일까.
브로드웨이하면 뮤지컬이 떠오르지만 사실 셰익스피어에서부터 테네시 윌리엄스나 아서 밀러 같은 작가들의 고전도 다수 공연되고 있고 극장들은 연일 만원(滿員)이다. 뮤지컬이 아닌 연극에도 영어를 모국어로 삼고 있지 않은 관광객들이 모인다. 다른 언어권에서도 보러오는 브로드웨이의 연극들을 한인들이 꺼리는 이유는 그래서 더 의아스럽다. 그들이 대학로의 관객들처럼 연극이 주는 감동의 강렬함과 깊이를 몰라서도 아니고 감상할 줄 모르는 무식자여서도 아니요 연극이 영화와 다른 색다른 경험을 준다는 사실을 몰라서도 아닌데 말이다.
이쯤되면 언어에 대한 불편함이 아니라 인식의 문제가 아닐까 슬그머니 의심을 품지 않을 수 없다. 생활패턴이 아무리 달라도 어쩌다 하루 저녁 가족과 가볼 만도 한데, 대사를 못 알아들을까봐 뉴욕에 십년 이십년 살아도 브로드웨이 연극 한번 본 적이 없는 분들이 똑같이 대사가 있는 영화는 거리낌 없이 팝콘 들며 보시니 더 의아해지지 않겠는가.
이제부터 언어 때문에 겁먹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을 말씀드리려 한다.
연극은 여러분께서 중,고등학교 교과서에서 배우셨듯이 종합예술이고 언어는 그 중 일부일 뿐이다. 종합예술이라는 말은 시각적 청각적 문학적 요소들이 다 들어 있다는 뜻에 다름 아니다. 근대를 지나 동시대를 향해오면서 보는 예술로서의 연극은 더 큰 물줄기를 이루게 되었다. 즉 연극에서 문학만이 즐길 수 있는 요소가 아니라는 뜻이다.
오페라를 보신 적 있으신지. 메트로폴리탄 오페라 공연을 보러가는 관객들은 대부분 뉴요커들이다. 예외도 있지만 오페라가 어떤 언어로 말하고 노래하는지 아시리라. 이태리어다. 그렇다면 질문 하나 더 드린다. 메트로폴리탄 오페라를 보는 관객들이 이태리어를 이해하고 볼까? 여기에 실마리가 있다. 오페라 작품들은 대부분이 잘 알려진 내용들이고 전설이나 고전에서 따온 얘기들이 많다. 즉 관객들은 내용이 궁금해서가 아니라 웅장한 오페라 가수들의 노래와 연주되는 음악, 멋진 무대를 감상하러 오는 것이다. 이미 다 아는 내용을 보며 웃기도 하고 울기도 한다.
연극도 그렇게 보는 예술이다. 대사를 들으며 열심히 따라가다 이해안되면 좌절하는 예술이 아니라는 말이다. 고전 작품에서 새로운 내용을 기대하지는 않는다. 이미 다 아는 내용이지만 단골 관객들(theatergoers)은 다른 연출과 배우들이 출연하는 같은 작품의 공연을 또 보러간다. 예컨데 아서 밀러라는 작가가 쓴 <세일즈 맨의 죽음>이라는 유명한 작품은 브로드웨이에서 자주 공연된다. 다른 극단, 다른 연출가, 다른 배우에 의해 만들어진 같은 작품의 공연들이다. 연극을 즐기는 뉴요커들은 그러나 <세일즈 맨의 죽음> 공연 광고를 보고 ‘이미 다 아는 내용’이라며 외면하지 않는다. 이번 공연에서는 미국의 중산층 가정을 어떻게 묘사했을까, 주인공 윌리 로먼은 어떤 성격의 인물로 그려질까, 작품이 쓰여질 당시 아서 밀러가 지적했던 현대 사회의 문제는 오히려 그 시절보다 오늘날 더 심각해졌건만, 그 작가의 고민이 어떻게 동시대의 무대 위에 펼쳐 보여질 것인가를 궁금해하며 몇달 전부터 티켓을 예매한다. 그리고 극장에 와서는 조형적으로 극의 메시지를 돕거나 또는 독립적인 감상 가치를 위해 만들어진 무대 장치와 배우들의 연기 그리고 그 모든 것이 유기적 조화를 이루게 하는 연출을 감상하는 것이다.
작품의 내용을 모르시는가. 인터넷에서 검색해 보시고 ‘아 이런 내용이구나’ 미리 대략만 알고 보시면 된다. 오히려 <세일즈맨의 죽음>의 내용을 몰라서 다음에 무슨 사건이 일어날까 두근거리며 보는 관객이 대사 좀 못 알아듣는 관객보다 보기에 더 민망하다는 걸 알아 두시라. 학창시절 배워서 알든 책을 읽어 알든 인터넷에서 검색해 알게 됐든 따질 이유도 없다. 고전은 알고 보는 연극이다.
신작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인터넷에 반드시 자료가 있다. 공연을 홍보하며 내놓는 정보가 있다. 그 정도만 숙지(熟知) 하셔도 충분히 재밌게 감상할 수 있다. 기억하시길 미국인들이 이태리어 알아서 오페라 감상하는 게 아니라는 사실을.
보는 연극으로서의 전통은 근대 이후 현대로 오면서 더욱 두드러지기 시작했고, 그 결과로 오늘날의 연극들은 문학적 메시지를 시각적으로 감상하기에 수월해졌다. 내용만 대략 알아도 충분히 즐겁게 감상 할 수 있게 된 것이다. 거기에 일류 배우들의 연기는 문화권과 언어를 초월하는 감상거리다. 같은 공간에서 숨소리까지 들으며 감상하는 명연기는 영화에서의 그것에 비할 바 아니다.
연극은 기실 훈련된 관객들을 위한 예술이라고 보는 견해가 있다. 연극의 관행에 대한 이해, 동시대 연극이 갖는 연극적 언어(시각적, 청각적)에 대한 이해가 수반되어야 진정한 감상이 이루어질 수 있다는 견해다. 미술 작품을 보고 ‘좋다’고 느끼는 감상자를 생각하면 쉽게 이해될 수 있으리라. 피카소의 회화는 큐비즘에 대한 이해 없이는 그 가치를 평가 할 수 없다. 알려고도 하지 않고 피카소의 그림을 가리켜 ‘저게 그림이냐 낙서지.’라며 비웃는다면 그 사람은 그냥 논외로 치자. 연극도 마찬가지로 감상을 위한 훈련을 요한다. 다만 지겨운 훈련이 아니라 예술작품이라는 생의 즐거움을 더 만끽하기 위한 즐거운 훈련이다.
* 글로벌웹진 뉴스로 칼럼 ‘앤드류임의 뒷골목뉴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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