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래를 위해 물러서는 지혜
뉴스로=노창현칼럼니스트 newsroh@gmail.com
‘박근혜탄핵’이 중차대한 기로(岐路)에 처했지만 대선후보들은 자못 한가롭습니다. 적어도 제 눈엔 그렇게 보입니다. 그러나 박근혜탄핵여부는 대선판도를 완전히 새롭게 짤 수 있다는 점에서 그들에게도 역시 무엇보다 중요합니다. 그런데 한가롭게 보이니 제 눈이 잘못된건지 그들이 잘못된건지 헷갈릴 지경입니다.
특히나 우려스러운 것은 최근 지지율이 상승하는 안희정 충남지사의 잇단 실언입니다. 그런데 정작 안 지사는 실언이 아니라 소신발언으로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국민은 공짜밥을 원하지 않는다”
“이명박 녹색성장 박근혜 창조경제 계승하겠다”
“대연정으로 미완의 역사를 잇겠다”
“국가간 사드배치 협상 뒤집을 수 없다”
“이명박 박근혜도 선한 의도로 시작했다”
지난달 22일 대선후보 출마 선언의 ‘공짜밥’ 논란에 이어 19일 부산대 강연의 ‘선한 의도’ 파문에 이르기까지 그는 한달도 안되는 사이에 꽤 많은 문제적 발언들로 논란의 한 가운데에 섰습니다.
그간 쏟아낸 말만 놓고 보면 절대 야당 정치인으로 보이지 않습니다. 하물며 당사자가 노무현 전 대통령의 오른팔이었던 안희정이라는 사실에 논란은 더욱 커졌습니다.
비난이 거세지자 21일 기자들과 만나 가장 최근에 한 ‘선의 발언’에 대해 “마음 다치고 아파하시는 분들이 너무 많다. 제가 그 점은 아주 죄송스럽게 생각한다”고 말했습니다. 외형상 사과는 했지만 부연한 얘기를 들어보면 마음에서 우러나온 것은 아닌 듯 합니다.
“정치를 대하는 저의 태도는 어떤 분의 말씀도 선의로 받아들여야 대화도 문제 해결도 될 수 있다는 취지의 말이었지만, 그것이 최근 국정농단 사건에 이르는 박근혜 대통령의 예까지 간 건 아무래도 많은 국민께 다 이해를 구하기 어려워 보인다. 그런 점에서 제 예가 적절치 못했다.”
즉 자기 소신은 변함없지만 예로 든게 적절치 않았다는 뜻입니다. 추측건대 그가 몸을 낮춘 것은 그간 일련의 논란들로 지지자 이탈(離脫)이 가속화되고, 더불어민주당 전체에 영향을 줄 수 있다는 점에서 당내 인사들의 압력도 있었을 것입니다. 바로 전날 JTBC 뉴스룸에 출연해 손석희 앵커와 토론식 인터뷰를 한 이후 조성된 네티즌들의 부정적인 기류도 작용했을 것입니다.
일부 언론은 JTBC 대담에서 안희정 지사가 손석희 앵커에게 “탈탈 털렸다”는 표현도 썼는데요. 제가 볼 때 손 앵커는 집요했고 안 지사는 고집스럽게 자기 소신을 전달하기 위해 애를 썼습니다. 손 앵커의 끈질긴 문제제기에 안 지사가 “제 얘기가 그렇게 어렵습니까?” 해버린 것은 판정패를 자인한 말이었습니다. 자타가 공인하는 한국 최고의 언론인을 무시하는듯한 발언이었으니까요. 손 앵커는 “아니요. 어렵지 않습니다”라고 했지만 안 지사는 소신을 너무 어렵게 설명했습니다. ‘20세기 지성사’가 어떻고, ‘통섭(統攝)’이 나오고, 정치철학 토론회도 아닌데 뭘 그리 어렵게 말하려 했는지요. 논리로 상대를 설득하려면 쉽고 간결해야 합니다.
이하 사진 JTBC 캡처
사실 손 앵커는 안 지사가 부드럽게 자기 실수를 만회할 자리를 만들어주고 싶었던 것 같습니다. ‘선한 의도’에 대한 안지사의 ‘선한 의도’가 단단히 꼬여버린 상황이었으니까요. 안 지사의 ‘선한 의도’는 누구와 대화를 할 때 상대에 대한 편견이나 의심은 갖지 않는게 좋다는 소신으로 끝나야 합니다. 개인과 개인의 관계에서 적용될 이야기라는 뜻입니다. 정치인으로, 도지사로 공무를 집행할 때는 냉정하고 객관적인 시각으로 판단하고 대화해야 합니다.
이명박의 4대강사업, 박근혜의 창조경제, 좋다 이겁니다. 과연 이 사람들이 천문학적인 예산이 들어가는 일을 과연 선한 의도로 하는지, 이로 인해 악영향은 없는지, 막말로 누가 헤쳐먹을 일이 없는지 면밀히 따져야 하는 국가적 중대사 아닙니까. 냉철하고 비판적으로 접근해도 시원찮은데 “난 액면가(額面價)대로 사람을 판단해. 이사람 의도는 선한거야, 그래 해봐” 하면 어떡하자는 겁니까?
단지 상대와 대화를 풀어나가기 위해 상대를 무조건 ‘선한 사람’으로 최면을 건다는 것은 순진무구(純眞無垢)를 넘어 자기생각이 없고 멍청하며 위험한 태도가 아닐 수 없습니다. 더욱이 그가 예로 든 두 정권의 사업은 엄청난 실패작으로 귀결된 현실 아닙니까. 굳이 예를 들고 싶었다면 개인적인 경험을 말했어야지요.
지금까지 안 지사의 일련의 논란에는 시사하는 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유감스럽게도 선한 의도를 말하는 안 지사의 의도가 결코 선하지 않은 것 같다는 사실입니다. 그의 되풀이되는 논란은 까놓고 말해 집권하면 ‘이명박근혜’의 실정(失政)을 따지지 않겠다는 뜻으로 보입니다.
만일 안 지사가 손 앵커와의 대담에서 “제가 말씀드린 선한 의도는 사람과 사람으로서 대화를 하기 위한 기본적인 자세를 말한 것이었습니다. ‘이명박근혜’를 예로 든 것은 지나친 오바였습니다. 명백한 실언입니다. 국민여러분 죄송합니다”라고 했다면 다시 한번 생각해볼 여지가 있습니다. 그런데 현학적인 단어들로 중언부언(重言復言)하고 비논리적 해명으로 일관하며 그는 뜻을 꺾지 않았습니다.
당초 안 지사에 호감을 보인 중도 유권자들은 그가 보수와 진보를 아우르는 통합형 지도자가 될 수 있겠다라는 점에 주목했습니다. 보수와 진보가 서로를 포용하기엔 어려운 현실에서 균형감각을 갖춘 능력있는 지도자를 열망했는데 안 지사가 그럴 수 있겠다라는 생각이 들었던 게지요.
그런데 안 지사의 균형감각은 사실은 ‘좋은게 좋은거다’라는 적당주의(適當主義)가 아니냐는 의심을 들게 합니다. 얼마전 한 TV인터뷰에서 안 지사는 부모님이 이름을 지어주실 때 박정희에 대한 호감 때문에 ‘정희’를 거꾸로 ‘희정’으로 지어주었다고 고백했습니다.
참 안타까웠습니다. 박정희 지지자들에 대한 호감을 자극하기 위한 멘트로 보였으니까요. 그 순간 한 사람이 떠올랐습니다. 같은 충청도 출신의 이인제 말입니다. YS에 의해 깜짝 놀랄 젊은 후보로 지목되기도 한 그는 97년 대선에서 “박정희 전 대통령과 나는 키가 1mm도 차이 안난다”며 ‘박정희향수’를 이용했습니다. 참으로 애잔한 구걸이었습니다. 그가 경선에 불복한 바람에 유력 후보였던 이회창이 떨어지고 첫 정권교체가 이뤄진게 아닙니까.
안 지사는 아마 젊은 시절엔 박정희의 이름을 딴게 유쾌하지 않았을 것 같습니다. 지금은 ‘박정희향수’가 대권 도전에 필요해졌는지 모르겠지만 차라리 이렇게 얘기하면 좋았을 것입니다. “제가 태어났을땐 박정희 대통령이 국민들에게 희망을 주었기 때문에 부모님께서 그렇게 이름을 지어주셨는데, 정희가 아니라 희정이라고 뒤집은 것은 그가 훗날 민주주의를 말살하는 독재자가 된 것을 예견한게 아닌가 싶습니다. 그래서 전 박정희의 좋은 점은 닮겠지만 나쁜 점은 거꾸로 닮는 지도자가 될 것입니다.”
애당초 안 지사의 실언은 예고된 것이었습니다. 그가 ‘즉문즉답’ 강연이라고 대대적으로 홍보한 행사들이 그렇습니다. 즉문즉답(卽問卽答)은 법륜스님의 ‘즉문즉설(卽問卽說)’ 설법에서 차용한 것으로 보이는데 사실 부처님시대 이뤄진 즉문즉설은 엄청난 정진과 깨달음이 없다면 함부로 할 수 없는 것입니다. 감히 설법은 아닐 망정, 일개 정치인이 즉문즉답을 하는 것은 실언 의 가능성이 많아질 뿐입니다.
안타깝게도 안 지사는 이미 대선출마선언문에서 혼란스런 정체성의 일단(一端)을 노출했습니다. 경제에 관한 청사진이 필요없다며 노태우부터 박근혜까지 여섯 대통령의 정책을 이어나가겠다고 선언한 것이 일례입니다.
“경제에 관하여 저는
특별히 새로운 청사진을 내놓지 않습니다.
지난 여섯명의 대통령이 펼친 정책을
이어가는 것으로 충분합니다.
노태우 대통령의 토지공개념,
김영삼 대통령의 세계화전략과 금융실명제,
김대중 대통령의 IMF 극복과 IT 산업 육성,
노무현 대통령의 혁신경제,
이명박 대통령의 녹색성장,
박근혜 대통령의 창조경제입니다.”
아무리 좋은게 좋다지만 심했습니다. 경제정책 무임승차도 아니고, 문제의식이 너무 없습니다. ‘이명박근혜’는 말할 것도 없고 나머지 정부의 경제정책도 문제가 있는데 역대 대통령의 좋은 점을 억지로 찾으려는 견강부회(牽强附會)마저 느껴집니다.
논리적으로도 모순됩니다. “새로운 개척자 정신이 필요합니다...구태와 낡은 관행에 물들지 않은 새로운 정치가 필요합니다. 더 이상 옛날에 머무르지 맙시다...20세기의 잘못된 유산과 헤어집시다”라면서 무슨 20세기 대통령의 정책을 계승한단 말입니까.
“박근혜-최순실 국정농단 사태는 대통령이 헌법을 준수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정당정치가 작동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민주주의는 법치입니다. 법과 제도와 규칙이 지배하는 사회로 가야합니다”라고 해놓고 엉뚱하게 대화와 타협을 부르짖습니다. 법치(法治)의 민주주의가 돌연 협치(協治)의 민주주의로 탈바꿈합니다.
“민주주의는 대화입니다.
대화를 통해 타협해나가야 합니다.
민주주의는 협치입니다.
대통령이라고 쓰고 임금님이라 읽는
시대를 끝내야 합니다.
여야의 협치로 국정을 이끌어야 합니다.“
법과 제도와 규칙이 있는데 난데없이 왜 협치가 나올까요. 더욱 우려스러운 대목은 아래 내용입니다.
“저는 우리 헌법의 의회중심제적 요소를
존중할 것입니다.
국회의 과반수를 차지한 다수당에
총리지명권을 주겠습니다.
총리는 내각을 통할하며 내치에 전념합니다.
대통령은 대외적으로는 5천만 국민을 대표하고,
대내적으로는 장기적 국정과제에 몰두할 것입니다.
저 안희정이 생산적인 정치를 선보이겠습니다.“
저는 이것을 보고 안 지사가 대통령이 되면 5년간 식물 대통령으로 야당과 줄다리기만 하다 끝나겠다는 생각을 하게 됐습니다. 노무현대통령이 제왕적 대통령제 하에서도 “대통령 못해먹겠다”고 푸념했는데 협치와 통섭의 논리로 내각지배권을 야당에 건네준 쭉정이 대통령이 무슨 외치를 합니까. 이상주의가 아니라 그야말로 판타지 정치를 꿈꾸는 것 같습니다.
하여 안지사님께 조심스런 충고 하나 드리고자 합니다. 작금의 20% 지지율에 흥분하지 마십시오. 대한민국 건국이래 최악의 국정농단 주범인 박근혜를 지지하는 국민이 20%라고 합니다. 전망컨대 안지사의 지지율은 30%까지 올라갈 수 있습니다. 어쩌면 좀더 올라갈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절대 야당 후보로서 그 이상은 넘지 않을 것입니다. 안 지사 지지자들은 진보성향의 반문재인과 중도성향의 일부 유권자들입니다. 만일 안지사가 탈당하여 경천동지하게도 여당의 통합후보가 된다면 중도와 보수의 30%를 얻어 대통령이 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민주당을 끝까지 지켰다는 자부심 하나로 살아온 안 지사를 능멸하는 졸렬한 상상일뿐입니다.
하여 감히 말씀드립니다. 대권 도전을 이쯤에서 멈추면 좋겠습니다. 차기도,차차기도 아니라 적어도10년후의 미래를 내다보고 내공(內功)을 쌓으시길 바랍니다.미국과 중국, 러시아, 일본의 연구소에서 1년 이상씩 체류하며 학문과 사상의 깊이를 더하고 네트워크의 폭을 넓히고 한반도 통일을 위한 역할에 멸사봉공(滅私奉公)하라는 겁니다. 그리하여 고작 반토막나라의 지도자가 아니라 남북이 하나 된 조국의 지도자가 될 준비를 하라는 겁니다. 기실 안 지사님의 협치와 통섭의 정치철학은 통일코리아에 더욱 어울립니다. 설사 통일조국의 대통령이 되지 못한다 한들 어떻습니까. 안희정 이름 석자가 민족의 숙원인 통일에 기여했다고 역사가 기록한다면 그보다 영예로운 일이 없을테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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