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재자는 왜 서민코스프레를 할까

 

뉴스로=이계선 작가

 

 

독재자들은 서민들과 어울리는 걸 즐긴다. 히틀러는 살인마답지 않게 어린애를 껴안고 사진찍기를 좋아했다. 쿠바의 독재자 카스트로는 계급장 없는 모자를 쓰고 거지같은 군인작업복을 즐겨 입었다. 무자비한 독재자의 이미지를 감추기 위한 쑈였다. 박정희대통령은 농부들과 어울리기를 좋아했다. 70년대 까지만 해도 극장에 가면 영화상영하기전 “리버티 대한뉴-스”가 먼저 나왔다. 태극기가 펄럭이면서 등장하는 단골장면은 논두렁에 앉아 농부들과 막걸리를 나누는 박정희대통령 모습이었다. 서민적인 우리 박정희대통령.

 

“각하 그리 하겠습니다”

 

경호실장 차지철이 명을 받들자 차는 꼬불거리면서 시골길을 따라들어 갔다. 벼를 타작하던 농부들이 쉬면서 곁들이(때참)로 술을 마시던 참이었다. 예고 없이 대통령일행이 들이닥치자 농부들은 어쩔 줄을 몰라 했다. 대통령비서실장 김계원이 안심시켰다.

 

“걱정들 마세요. 각하께서 잠깐 들려 격려하시고 여러분과 함께 막걸리 한사발 나누시려고 오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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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1962년 대한뉴스 캡처>

 

 

동네 이장이 대통령에게 주전자를 바쳤다. 대통령은 돌려가면서 손수 술을 따랐다. 대통령이 따라주는 막걸리 사발을 받은 최고령 동내좌상이 늙은 대신처럼 허리를 굽혔다.

 

“폐하, 이렇게 왕림해주시니, 이 마을 생긴 이래 최대의 광영이 옵니다”

 

‘폐하’란 말에 놀란 차지철경호실장이 튀어나왔다.

 

“아직은 폐하가 아닙니다. 대통령님은 각하라고 호칭 하는 겁니다”

 

정정해준답시고 얼떨결에 한말이 ‘아직은 폐하가 아닙니다’라고 패착을 저질러 버렸다. 그러자 동내좌상은 충성심을 굽히지 않으려는 듯 한걸음 더 나가버렸다.

 

“일제시절 명치유신 때에 일본천황이 있는 것처럼 10월 유신이후 부터는 대통령께서 천황폐하가 되신줄 알았습지요. 가난은 나라님도 못 구한다고 했는데 각하께서는 5천년 묵은 보릿고개를 없애 주셨으니 각하야말로 왕중왕 이십니다“

 

(?...)

 

순간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술맛도 떨어져 버렸다. 막걸리를 마시는 둥 마는 둥 대통령 일행은 자리를 떴다. 차는 달리고 있었지만 대통령은 기분이 묘했다. 아무리 시골 촌로라 해도 언중유골(言中有骨)처럼 들렸다. 노인이 한 그 말이 칭찬일까? 취중을 빗댄 모욕일까? 삼국지의 동탁이 생각났다.

 

황건적의 난이 평정되자 제후(諸侯)들은 제각기 자기본거지로 돌아갔다. 그러나 동탁은 수도 낙양에 남아 뭉기적거리면서 세력을 키워나갔다. 임금을 겁박하며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둘렀다. 기고만장한 동탁은 임금 자리를 노렸다.

 

(내가 10월 유신을 선포하여 황제에 버금가는 권세를 누리고 있는 건 사실이다. 혹시 사람들은 나를 욕심 많은 동탁으로 보는게 아닐까?)

 

대통령이 움직이는 곳에는 파워 트리오가 따라붙는다. 중앙정보부장 대통령비서실장 청와대경호실장이 파워트리오다. 그런데 오늘은 김재규중앙정보부장이 보이지 않았다. 왜 정보부장이 안 따라왔을까? 대통령은 궁금했다. 그러나 경호실장 차지철은 가볍게 생각하고 있었다. 그가 못나오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오늘아침 청와대 헬리콥터 비행장에서 김재규를 만났다. 헬리콥터를 타고 가려고 나온 것이다. 그에게 퉁명을 부렸다. 둘은 매사 충돌하는 앙숙이었다.

 

“김부장, 1호기 헬리콥터에 탈 자리가 없군요. 2호기를 타고 오던지 아니면 아예 그만두던지 맘대로 하시오”

 

김재규는 싫지 않다는 듯 웃음으로 받아넘기면서 흘리는 말을 했다.

 

“그러쟎아도 오늘밤에 있을 아주 중요한 일을 준비해야 하는데 잘 됐군"

 

“그게 뭔데?“

 

차지철은 궁금하기보다 심심하다는 투로 물었다. 김재규는 얼른 말을 주워 담았다.

 

“호위무사는 몰라도 돼요”

 

김재규는 하루 종일 남산 중정본부에 틀어 박혀 삼국지의 동탁 생각을 하고 있었다. 삼국지는 그가 열번이나 읽은 인생교과서다.

 

후한말(後漢末)의 충신 왕윤은 역적동탁을 제거하려고 기회를 노렸으나 역부족이었다. 젊은 조조가 비수를 꺼내들고 잠든 동탁의 침실로 뛰어들었으나 잠든 사자를 깨우는 일만 저지르고 만다. 동탁 곁에 범같은 장수 여포가 양아들노릇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실패한 조조는 줄행랑을 쳤다.

 

왕윤은 수양딸 초선을 내세워 미인계를 쓴다. 초선의 미색에 동탁도 여포도 넋을 잃어버린다. 동탁과 여포의 마음을 사로잡은 초선은 반간계를 써서 두 사람이 갈라지게 만든다. 겉으로는 부자관계처럼 보이지만 속으로는 연적이 돼버렸다. 왕윤은 황제와 짜고 동탁에게 가짜 선위식을 마련한다. 저 죽는 줄도 모르고 황제의 자리로 올라가는 동탁에게 낭하에 숨어있던 도부수(刀斧手)들이 달려들었다. 놀란 동탁은 황급히 여포를 찾았다.

 

“봉선, 내 아들 봉선은 어디 있느냐?”

 

봉선은 여포의 아호다. 그때 뒤에서 방천화극을 치켜든 여포가 뛰어나오면서 소리쳤다.

 

“여포가 여기 있다. 역적동탁은 내 칼을 받아라”

 

여포의 방천화극에 동탁은 두 동강이가 난 채 죽었다.

 

(역적 동탁을 제거한건 동탁의 최측근인 양아들 여포였지!)

 

김재규의 얼굴이 굳어졌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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