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화 70년: 21회] 4월혁명으로 탄생한 민주당, 혁명정신으로 탄생한 언론에 '철퇴'
▲ 1961년 8월 11일 혁명재판소에서 열린 민족일보 사건 변론 공판 모습. 조용수 민족일보 사장이 피고인석 왼쪽에 앉아 있다. 경향신문 자료사진. |
제2공화국은 자연분만이 아닌 제왕절개 수술로 태어났다. 순리로는 장면 부통령(4월23일 사임)이 27일 이승만 퇴진 후 대통령 권한대행으로 썩은 국회를 해산하고 대선과 총선을 동시에 치른 후 개헌을 했어야 됐건만 덜컥 개헌을 서둘렀다.
그러자 고정훈은 "오욕 국회를 해산하지 않고 내각책임제로 개헌하는 등의 방향으로 나아가면 수년 안으로 군부 쿠데타가 일어날지도 모른다"고 예언(남재희, <진보열전>, 메디치, 2016년)했고, 그건 적중했다.
허정 과도내각은 허세를 버리고 실질적 반공태세 강화 와 미국의 반공 교두보로서 일본을 적극 협력자로 만드는 전제조건인 대일외교 개선책 등을 시정방침으로 들면서 혁명정신을 탈색시켰다. 장면 내각(1960년 8월23일)도 여기서 오십보백보였다. 이승만·허정의 정치이념 그대로였던 제2공화국은 국민들의 혁명 여망을 실현할 의향도 투지도 없었다.
정치적 갈등을 사월혁명 정신으로 해결하기보다는 이승만과 똑같이 데모규제법과 반공특별법이라는 2대 악법으로 돌파하려다가 범국민적 저항을 자초했다. 여기에다 교원노조와 통일 문제 등에 직면하자 보수정당으로서의 대처 능력에 한계를 드러냈다.
이런 시대적 배경에서 '민족일보'는 사월혁명 정신의 유일한 정통 언론으로 1961년 2월13일 창간, 지령 92호까지 발간했으나 5·16 쿠데타에 의하여 학살당했다. 이 신문은 우리 민족의 생존전략을 가장 적확하게 진단, 그 처방전까지 내린 민족사의 이정표였다.
2공화국의 민족일보 탄압
제2공화국은 1961년 1월25일 민족일보사가 설립되자 바로 훼방을 놓기 시작했다. 민주당 김준섭 의원은 "진보당 사건으로 대법원에서 사형선고를 받고 처형된 조봉암의 비서로서 다년간 활약한 이영근이 5년형을 선고받은 뒤 일본으로 밀항해 통일조선신문 을 경영했는데, 4.19혁명 후 그로부터 수억원이 국내로 들어왔으며, 그 자금이 특정 정파 정치활동과 일간신문 창간을 지원하는 데 쓰이고 있다 고 비난했다. 어떤 국회의원이 창간 준비 중인 일간신문과 관련되어 있다 고 윤길중 의원을 겨냥했다. 이에 윤길중은 신문발행을 준비 중인 조용수는 민단에서 활약한 청년으로 재일동포 북송 반대운동에 앞장섰다고 해명했다. 이승만이 조작한 조봉암 사건을 사월혁명을 겪고도 이 정도로 인식했다는 사실은 민주당의 불행을 예견할 수 있게 만든다.
그러자 허무맹랑한 망발 이라고 민족일보 회장 서상일과 사장 조용수 명의 해명광고가 나왔고, 창간자금은 거류민단과 그 주변 양심적 기업가들한테 받았다고 밝혔다.
'민족일보'는 서울신문에서 제작했는데, 정헌주 국무원 사무처장은 서울신문에 제작하지 말도록 지시했다. 3월2일 오후 5시 제작을 중단당한 민족일보는 3일간 정간했다. 제작처를 산업경제신문사로 옮겨 낸(3월6일) 1면에다 제2공화국 언론자유 탄압 제1호, 절대자유 보장하겠다던 장 내각 집권 반년 만에 국민기본권 유린 이란 항의 기사를 실었다.
국회 법사위가 3월9일 부당성을 추궁하자 정헌주는 "특수지 성격을 띤 민족일보에 대한 인쇄를 중단한 조치는 정부의 기본방침"이라고 강변했다.
두 번째 탄압은 대일 반입 금지조치였다. 도쿄지사로 250부를 수출하려 하자 서울세관은 재무부 장관 지시로 국무원에서 신문수출 승인을 얻도록 되었다고 했고, 국무원은 재일동포에게 악영향을 준다고 불허했다(김민환, <민족일보 연구>, 나남출판). 민족일보는 당대 최고의 논설로 유명했는데, 논설작성용 원고지에는 "이 고지(稿紙)엔 계도성 높은 민족일보의 논설만을 쓴다"라는 구절이 박혀 있었다.
▲ 1961년 12월21일 사형이 집행되기 직전의 조용수 민족일보 사장. 경향신문 자료사진 |
이 신문은 대외적으로는 미·일 관계에서 민족 주체성을 확립하는 걸 최우선 과제로 삼았다. 남북분단 문제는 안보 차원에서 민족 공생의 경제 공동체로 전환하는 인식의 혁명을 이룩했다. 이 신문은 제2공화국을 혁명정권이 아니라고 비판했는데, 특히 2대 악법(반공법과 데모규제법 제정) 반대에 적극적이었다.
전국적으로 전개되었던 2대 악법 반대 열기가 가장 뜨거웠던 곳은 대구였다. 대구역전 광장에는 4·19 이후 최대인 3만여 시민이 운집(1961년 3월25일)했다.
학생들은 "이승만이는 독립운동을 한답시고 막대한 돈을 들여 해외를 돌아다니며 잘 쓰고 왔으며 장면은 뒤를 이어 2대 악법을 내걸었으니 이들의 결혼을 축하한다"며 이완용 주례로 위장 결혼식을 연기했다. 장면과 조재천(법무장관)의 위장 장례식을 거행한 이들은 서울의 대학생들이 너무 미온적이라며 독려차 상경까지 했다(박태순·김동춘, <1960년대의 사회운동>, 까치).
민족일보는 "미국 국내경제의 필요에 의해 창안된 것"이 원조로, 그것은 "미국의 국가적 이익을 수호하기 위하여 필요한 것"(논설 '미국의 대한 경제원조 정책의 본질을 분석함', 1961년 3월18일)으로 풀이했다. "자국 과잉상품을 원조 명목으로 제공함으로써 과잉상품을 처리함은 물론 앞으로의 시장 확보를 꾀하고, 나아가 타국 내정에까지 간섭할 기회를 장악하여 1석3조의 효과를 보고 있다"(김민환, <민족일보 연구>, 나남)는 입장이었다.
미국의 세계 지배를 위한 원조이기에 한국군 병력은 60만명을 유지하면서 군사·경제적 지배권은 내놓지 않으려는 것이 한미경제협정 체결(1961년 2월8일)이라며 "문제 된 조항을 책임지고 수정하든지 그렇지 못한다면 즉각 물러나야 한다"고 장면 내각을 비판했다('미국의 대한 경제원조정책의 본질을 분석함').
이에 장면이 "야당에 편승한 공산당의 음모"라고 반박하자, "독재자로부터 이적행위를 한다는 낙인을 몇 번씩이나 받고, 국제공산당과 관련 있다고 몰리기까지 하던 그가 집권 반년 만에 너무나 빠르게 독재자의 행실을 닮아가는 데 놀라지 않을 수 없다"('장 총리의 망언을 묵과할 수 없다', 1961년 2월16일)고 되받았다.
자립경제를 위해 원조보다 남북통일이 이뤄져야 한다는 입장이었던 '민족일보'는 한·미·일 관계를 "일본 제국주의를 부활시켜 아세아의 공장이요, 헌병으로서 미국의 기득권익의 청지기로 삼아 (동북아 방위에 적극 참여시키는 대신에) 그 반대급부 조건으로 일본으로 하여금 한국을 관리케 하려는 기본구상을 한 지가 오래되었다"('미국의 대한 경제원조정책의 본질을 분석함')고 보았다. 미국이 주선하던 한일국교 정상화조차 미·일·한 군사동맹 체제를 구축하는 한 단계에 지나지 않는다 고 봤다. 한·일 관계는 정상화되어야 하지만 "일본의 옹졸함"이 이를 가로막고 있다는 분석이었다.
5·16 쿠데타 세력은 민족일보 간부 13명을 연행(1961년 5월18일)했고, 이튿날 신문은 폐간됐다. 12월21일 목요일 4시가 지난 시각. 조용수는 "민족을 위해서 좀 더 일하지 못하고 가는 것이 아쉽다. 신문사를 운영하느라 친구에게 빌린 돈을 갚지 못한 것이 미안하다"는 유언을 남기고, 교수대에서 사라졌다. "억울한 죽음을 끝내 받아들일 수 없어서 모질게 버틴 것인지, 가장 긴 18분이 걸렸다"(김환균, <아름다운 민족주의, 조용수>).
<꼬리 기사>
민족일보의 ‘4·19혁명 1주년, 서울대생 침묵시위’ 기사
상오 열시 2000여 명의 서울대학교 학생들은 이날의 기념식을 독자적으로 마치고 11시35분 교문을 출발, 입으로 구호를 외치지 않는 종전에 없던 ‘침묵데모’에 들어갔다. (…) 기념식에서 4·19 제2선언문과 흘린 피를 더럽히고 반민족사적 방향으로 역류시키는 어떠한 반민족적인 세력도 타도할 것 등의 4개 항목의 결의문을 채택했는데 이날 플랭카드에는 전에 볼 수 없었던 다음과 같은 슬로건을 볼 수 있었다.
이 땅이 뉘 땅인데 오도 가도 못하느냐, 언론인 사회단체 남북교류, 이북 쌀 남한 전기, 민족 자주통일, 학원 자유 위협하는 법 반대, 4월의 피는 절규한다, 외세는 물러가라, 남북 서신교환, 실업자의 일터는 통일에 있다, 한국 문제는 한국인의 손으로, 어용학생단체 자진 해산해라, 대학의 자유는 민족의 생명, 소련에 속지 말고 미국을 믿지 말라 일본은 일어난다 조선사람 조심하라, 학원에 경찰은 간섭 말라. (*이 칼럼은 경향신문에 먼저 올려졌습니다. 필자의 허락을 받아 게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