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화 70년: 22회] 쿠데타 성공한 박정희, 좌익 이미지 지우려 술친구까지 제물 삼아
▲ 이병주(왼쪽)가 1963년 12월16일 2년7개월의 수감생활 후 특사를 받아 부산교도소에서 출소할 때 모습. 이권기 경성대 일문과 명예교수 제공 |
(서울=코리아위클리) 임헌영 교수(문학평론가.민족문제연구소장) = “이놈저놈 모두 썩어 빠졌어.” “학생이면 데모를 해야지. 이왕 할 바엔 열심히 해야지.” “도대체 오열(간첩)이란 게 뭣고. 오열이 약방의 감초가? 감당 못할 사건이 생기면 오열이 튀어나와. 오열이 어딘가에 대기하고 있다가 자유당이 필요로 하겠다 싶으면 출동하는 모양이지.”(이병주, <대통령들의 초상>)
부산 군수기지사령관 시절(1960년 1~7월)의 박정희 소장이 남긴 어록이다. 박정희와 대구사범 동창으로 부산일보 주필 겸 편집국장 황용주, 국제신보 주필 겸 편집국장 이병주(李炳注, 1921~1992년)는 ‘산바가라스(三羽烏, 삼걸)’로 주석담(酒席談)에서 쿠데타까지도 거침없이 거론했다. 그러나 정작 사월혁명이 나자 박정희는 학생들이 쿠데타를 망쳤다고 투덜거렸다.
‘술친구’ 박정희의 변심
5·16쿠데타 직후 국제신보는 사설 ‘민주발전에의 획기적 대사업이 되도록 혁명군사위원회의 성의 있는 노력을 바란다’(1961년 5월17일)로 환영했다.
그 나흘 뒤 오후 5시, 경찰은 편집국에서 이병주를 연행했다. 경남도경 유치장에서 만난 이병주와 황용주는 “이상하게 돌아간다. 그자? 우리는 도의혁명을 하자고 했는데 반공혁명이 뭐꼬?”(안경환, <황용주-그와 박정희의 시대>, 까치)라며 어리둥절했다.
1948년 여수·순천 병란 때 군부 내 남로계 관련자 명단을 넘겨줌으로써 극형을 모면한 트라우마가 박정희에게 있었다. 이 전력 때문에 5·16 직후 미국이 그의 사상을 의심하자 쿠데타 세력은 좌익, 혁신정당, 교원노조, 각종 노조 지도자, 보도연맹원을 영장 없이 체포했다(이석제, <각하, 우리 혁명합시다>).
4000여명 구금, 608명 혁명검찰부 회부, 216명 기소, 190명 유죄 판결이었다. 자유당 때 사형언도자 중 미집행 100여명은 일거에 처형되었다. “박정희는 미국 측으로부터 사상적 의혹을 받자 민족일보의 조용수를 자신의 면죄부 제물로 삼았던 것이다”(김삼웅, <한국 현대사 바로잡기>, 가람기획).
황용주는 한 달 만에 풀려났으나, 이병주는 ‘특수범죄처벌 특별법’ 제6조 위반으로 기소됐다. 정당 사회단체 간부로 반국가적 행위를 한 자에게 10년 이상 사형이었던 이 법. 그런데 이병주가 뒤집어쓴 ‘교원노조 고문’ 직함이 기록도 증언도 없자 논설위원 3명을 더 연행했다.
한편 경찰 공작반에서는 앞잡이를 시켜 남로당 재건 운동을 탐색 중이었다. 이에 관련된 한 청년의 주례를 맡은 이병주를 1961년 5월22일 결혼식 날 일망타진해 남로당 재건 공범으로 엮을 계획이었는데, 공작반의 내막을 모르던 다른 부서에서 하루 전인 21일 이병주를 덜컥 체포해버렸다.
필화로 내몰린 이병주
공작이 수포로 돌아가자 이병주는 필화로 내몰렸다. 경찰에 연행된 논설위원 중 변노섭(卞魯燮, 1930~2005년)은 사회당 경남도당 준비위원회 무임소 상임위원으로 날카로운 논설 필자였기에 이병주와 공범으로 엮였다(이병주 소설 <그해 5월>, 한길사).
작가 이병주가 1960년 월간 ‘새벽’ 12월호에 실어 박정희 군사정권에서 필화를 겪는 원인이 된 글 ‘조국의 부재’.
▲작가 이병주가 1960년 월간 ‘새벽’ 12월호에 실어 박정희 군사정권에서 필화를 겪는 원인이 된 글 ‘조국의 부재’. |
이병주는 ‘조국의 부재’(‘새벽’ 1960년 12월)와 ‘통일에 민족역량을 총집결하자’(국제신보 1961년 1월1일 연두사)라는 두 글로 법정에 섰다.
“조국이 없다. 산하가 있을 뿐이다. 이 산하는 삼천리강산이란 시적 표현을 가지고 있다”로 시작하는 ‘조국의 부재’는 분단시대 최고의 명논설이다. “진정 조국의 이름을 부르고 싶을 때”는 8·15와 4·19였지만 그 꿈을 못 이룬 건 5000년간 “지배자가 바뀐 일이 있어도 지배계급이 바뀌어본 일”이 없었기 때문이라고 이병주는 적시했다.
지배계급은 “38선을 이용”하여 정권을 유지한다. “민주주의의 성장 없이 공산주의를 막아낼 방법”이 없건만 보수정당은 자기들만 나라를 지킬 수 있다고 요란하다. “보수할 아무것도 없으면서 보수하려는 세력만 있는 것이 오늘날 이 나라의 보수주의 정당의 상황이다.” 그러기에 옳은 보수정당을 세우려면 “혁신세력들이 주장하고 있는 정강과 정책을 선취적으로 파악하고 실천하는 길밖엔 없다.”
국민이란 “세금을 내기 위한 수단”이고, “병역에 충용하기 위한 존재”이자, “부역하기에 알맞은 노동력일 뿐”으로, “관권의 비위에 거슬리면 때론 수백명씩 학살당하기도 하는 어쭙잖은 중생”이다. “백성은 그저 무기력하게 이리떼에 쫓기는 양떼와도 같았다.”
▲ 작고 6년 전인 1986년 서재에 앉아 있는 이병주 작가. |
이런 조국에 젊은 세대가 갈망의 눈으로써, “그들의 정열이, 그들의 포부가 버림받은 민중의 틈에서 잡초처럼 강인하게 뿌리를 뻗을 때, 그때 비로소 조국에 아침이 온다. 그러나 멀고 먼 조국의 아침이여! 오호! 통절한 우리들 조국의 부재여!”라고 끝맺는 이 통쾌함.
‘통일에 민족역량을 총집결하자’는 “국토의 양단을 이대로 두고 우리는 희망을 설계하지 못한다. 민족의 분열을 이대로 두고 어떠한 포부도 꽃피울 수 없다”면서, “누가 누구를 경계하는 것이냐?/ 어디로 향한 총부리냐?/ 무엇을 하자는 무장이냐?”고 절규한다.
복수를 위해 붓을 들다
이병주와 변노섭은 각 10년형을 받아 복역 중 특사로 부산교도소에서 1963년 12월16일 출소했다. “그런데 술친구였던 박 대통령이 자기를 2년7개월이나 감옥살이를 시키다니…. 잡혔을 때는 그러려니 했지만 시일이 지날수록 원한이 사무치게 된 것이다. 그러나 참았다. 그러다가 박 대통령이 죽고 난 다음” 이병주는 박정희를 역사의 심판대에 올렸다(남재희, <통 큰 사람들>, 리더스하우스).
필화가 없었다면 언론이 본업이고 창작이 부업이었을 그는 총칼로 당한 억울함을 붓으로 톡톡히 갚고자 본업을 작가로 바꿨다. 소설 <그해 5월>과 <그를 버린 여인>은 ‘산바가라스’ 술친구 박정희에게 진 빚 갚음이다.
박정희 통치 18년을 까발린 <그해 5월>은 뉴욕 타임스에 실린 이태리의 유명 여기자 오리아나 팔라치의 셀라시에 황제 인터뷰를 인용한다. “폐하, 지금 에티오피아를 구제하는 오직 한 가지 방법이 있다면 그건 무엇이겠습니까.” 셀라시에가 묵묵부답하자 팔라치가 “내가 말해볼까요?”라며, “지금 에티오피아를 구하는 유일한 방법은 폐하가 물러나는 일입니다.” 우간다의 이디 아민이 “박정희의 충실한 제자”로 박으로부터 온갖 불법적인 통치술을 배운 것이라고도 했다.
<그를 버린 여인>에서 이병주는 “세상에 도의가 제대로 작용한다면 ‘그’는 평생을 뒤안길에서 살아야 할 사람”으로 치부한다. 여순사건 때 박정희의 고변으로 아버지를 잃은 청년 일당이 박 대통령 암살 모의 중 피체(被逮) 당한다. 그들은 박정희의 죄악을 이렇게 요약한다.
“첫째, 민족의 적입니다. 일본제국의 용병이었으니까요. 둘째, 민주주의의 적입니다. 쿠데타로서 합헌민주정부를 전복한 자니까요. 셋째, 윤리의 적입니다. 자기 하나의 목숨을 살리기 위해 자기 친구를 모조리 밀고해서 사지에 보낸 자이니까요. 넷째, 현재 국민의 적입니다. (…) 학생이건 지식인이건 정치가이건 경제인이건 인정사정없이 탄압하는 자이니까요. 게다가 그자는 나에겐 불구대천의 원수입니다. 나는 그자를 없앰으로써 애국자가 되는 동시에 효도를 다하게도 되는 거지요. 나는 그자 하나를 없앰으로써 그자가 계속 존재하면 생겨날지 모르는 수천 수만의 희생자를 미리 구할 수 있게 되는 겁니다.”(<그를 버린 여인>)
김재규는 그들을 방면해준 직후에 10·26 거사를 감행했다. 소설인지, 실록인지 알 수 없다.
<꼬리기사>
지배계급 본질 비판한 ‘조국의 부재’ 일부
“첫째, 어떠한 수단을 써서라도 권력을 가져야 하고, 일단 장악한 권력은 어떻게 해서라도 이를 계속 유지해야 한다. (…) 설득, 협박, 매수 등 방법은 갖가지다. (…)
둘째, 지배하기 위한 필요 외에 백성을 위한 정치가 있을 수 없다. 표를 모으기 위한 제스처는 있을 수 있어도, 다시 말하면 백성을 위하는 척하는 지배 방법은 있을 수 있어도 백성의 문제를 스스로의 문제로 하고 백성의 소원을 겸허하게 들을 줄은 모른다.
셋째, 국토를 누가 가져가더라도 스스로의 권력만 온존하면 그만이다. (…)
넷째, 지배자의 이익을 조금이라도 침범하는 사상은 사악한 사상이다. 지배자의 현상을 유지하기 위해선 백성이 아사해도 하는 수가 없고 양민을 학살할 수도 있다.
다섯째, 아무리 동지라고 하더라도 언제 배신을 할지 모르니 당중(黨中)에 당을 만들어야 하고 파중(派中)에 파를 만들어야 한다. 그리고 우선하는 순위는 제1이 자기 개인의 이익, 제2가 자파의 이익, 제3이 자당의 이익, 제4가 국가의 이익이다.” (*이 기사는 경향신문에 먼저 올려졌습니다. 필자의 허락을 받아 게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