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명을 가른 말 한마디
뉴스로=이계선작가
김재규는 자신만만했다. 가장 어려운 1단계를 성공했다. 이제2단계로 들어간다. 가동(棟)이 눈앞에 나타났다. 육군참모창장 정승화는 정보부 김정섭차장보와 취흥을 즐기고 있었다. 김재규가 뛰어들면서 소리쳤다.
"정총장, 큰일 났소! 빨리 자리를 떠야 하오! 나를 따라오시오!"
정승화가 무얼 묻기도 전에 김재규가 잡아끌었다. 당황한 정승화와 김정섭은 김재규의 다급함에 이끌려 황급히 궁정동 안가를 빠져나왔다. 그러자 차를 대기하고 있던 박흥주가 세 사람을 태우고 달렸다.
술을 마시다 말고 김재규를 따라나선 정승화는 무슨 일인지 궁금했다.
"도대체 무슨 일입니까?"
그러자 김재규가 정승화에게 엄지손가락을 들었다 내려 보였다.
"이분이 돌아가셨습니다."
정승화는 깜짝 놀랐다. 술이 확! 깨버리면서 오싹 소름이 끼쳐왔다.
"사실입니까? 어떻게 돌아가셨습니까? 외부의 적입니까? 내부의 소행입니까?"
"저격당하셨소. 차지철에게 저격당하여 돌아가셨어요"
“그래요?”
이번에는 자기 말에 놀랐다. 흑막이 있어보였다. 그는 조금 전에 일어난 일들을 추적해봤다. 김정섭과 술을 마시는데 총소리가 들렸다. 총소리는 연회장이 있는 안가나동 쪽에서 났다. 한 두 발이 아니라 수십발도 더됐다. 평생 총소리를 들으면서 전장을 누벼온 육군대장에게 총소리는 흔한 것이다.
(청와대 경비원들이 사격연습을 하는 것이겠지?)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그런데 대통령이 총에 맞아죽었다고 한다. 그렇다면 그때 그 총소리는 대통령을 쏘는 총소리였던 것이다. 누가 대통령을 쐈을까? 차지철이 쐈다는 건 말이 안 된다. 그렇다면 차지철은 살고 김재규가 죽어 있어야 한다. 차지철이 안 보이는걸 봐서 그는 이미 죽어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김재규가 쐈을 것이다. 아까부터 김재규가 이상했다. 저녁먹자고 불러다놓고 연회장으로 간 것도 이상했다. 연회장에서 나와 자꾸만 들락거리는 것도 수상했다. 차지철이 대통령을 저격했다고 하지만 믿어지지 않았다.
그렇다면?
지금 나를 인질로 잡은 김재규는 저의 말을 들어주지 않으면 나를 죽일 것이다. 김재규는 나를 잡고 중앙정보부로 갈 것이다. 중정요원들의 살벌한 감시 하에 날 협박하여 전 국무위원들을 중정으로 불러낼 것이다. 나에게 계엄령을 선포하게 한 후 김재규는 정권을 장악할 것이다. 내가 그의 말을 듣지 않으면 날 죽여 버리겠지.이젠 난 죽었구나. 어떻게 하면 살아날수 있을까? 내가 사는 길은 중앙정보부가 아니라 내 부하들이 있는 육본으로 가는 길뿐이다. 무슨 수로 중정으로 가지 않고 육본으로 갈수 있을까? 달리는 차안에서 격투를 벌릴까? 그러나 상대는 두명 모두 총을 갖고 있다. 나는 맨손이다. 꼼짝없이 죽었구나. 사는 길은 김재규를 받드는 길 뿐이로구나. 정승화는 몸을 부르르 떨었다. 정승화의 생각은 맞는 말이었다.
그런데 엉뚱한 일이 벌어졌다. 김재규는 무심코 운전을 하고 있던 박흥주 대령에게 자신의 운명을 가르는 한 마디를 하게 된다. 대통령을 사살하는 엄청난 일을 치르느라 심신이 지쳐 있었다. 순간 판단능력이 떨어져 버렸다. 그는 심심했던지 해서 는 안될 질문을 해버렸다.
"박대령, 남산(중앙정보부)으로 갈까? 용산(육군본부)으로 갈까?"
순간 정승화는 자기 귀를 의심했다. 김재규가 저가 사는 뻔한 길을 가지 않고 길을 물은 것이다. 지옥으로 끌려가는 정승화에게 한줄기 서광이 비치는 듯 했다. 박흥주가 대답하기 전에 내가 먼저 대답해야 한다. 정승화는 속으로 반가웠다. 육본으로 오시는 걸 환영합니다. 육본으로 오시면 50만 육군병력이 김재규 당신을 대통령으로 추앙하여 받들겠습니다. 그렇게 말하고 싶었다. 그는 부드럽고 은근하게 말했다.
<사진 MBC 자료 화면>
"김 부장, 육본으로 갑시다."
놀라운 반응이 나타났다. 머뭇거리던 박흥주대령이 정승화의 제의에 동조해버리고 만 것이다. 아니 말려든 꼴이었다.
"부장님, 육본으로 가는 게 낫겠습니다."
죽으려고 환장을 했나? 상관 정보부장이 실수를 했으면 옆에 있는 부하가 얼른 바로잡아야 한다. 그런데 망조가 들렸는가 보다. 정승화총장의 간절한 염원에 녹아내린 듯 박흥주는 얼떨결에 패착을 저지르고 만 것이다. 육본으로 가는 게 낫겠습니다.
김재규는 저 죽으러 가는 줄도 모르고 덜렁거리며 도살장으로 가는 당나귀 꼴이 돼버렸다.
“그래 육본으로 가지”
아! 김재규부장. 그 길로 가는 게 아닌데!
프로스트의 시가 생각난다.
“노란 숲길에 두 갈래 길이 있었답니다.
나는 두 길을 다 가지 못하는 것을 안타깝게 생각하면서
오랫동안 서서 한 길이 굽혀 꺾어진 곳까지
바라다 볼수 있는 곳까지 멀리 바라다보았습니다.
그리고 똑같이 아름다운 다른 길을 택했습니다.
그 길에는 풀이 더 있고 사람이 걸은 자취가 있어
아마 더 걸어야 될 길이라고 나는 생각했던 거지요
그 길을 걸으므로 그 길도 거의 같아질 것이지만
그날 두 길에는
낙엽을 밟은 자취는 없었습니다.
아! 나는 다음날을 위하여
한 길은 남겨 두었습니다.
길은 길에 연하여 끝없으므로
내가 다시 돌아올 것을 다짐하면서
훗날에 훗날에 나는 어디선가
한숨을 쉬며 이야기 할 것입니다
숲속에 두 갈래 길이 있었다고
나는 사람이 적게 간 길을 택했다고
그리고 그것 때문에 모든 것이 달라졌다고“
-프로스트
남산(중앙정보부)이냐? 용산(육군본본)이냐? 차는 용산후암동 육군본부로 달리고 있었다. 정승화에게는 행운이 김재규에게는 불운이 기다리고 있었다.
그리고 실수한 게 또 있다. 궁정동의 목격자들을 붙잡아 뒀어야 했다. 대통령비서실장 김계원, 가수 심수봉과 신재순이 목격자다. 김계원은 정승화와 같은 차에 태우고 남산중정본부로 끌고 가야 했었다. 그런데 김재규는 김계원이 아군인지 적군인지 가려지지도 않았는데 덥석 뒷수습을 부탁하면서 놓아줬다. 심수봉과 신재순에게는 박선호가 20만원씩 주어 귀가시켰다. 거사에는 성공했지만 뒷수습이 너무나 엉성했던 것이다.
김재규는 정승화와 김계원을 자기편으로 생각했다. 박정권에서 차지철은 강경파의 보스요 김재규는 온건파의 중심이었다. 덕장 정승화참모총장과 교회장로인 김계원비서실장도 온건파였다. 그러나 권력은 이해관계로 움직인다. 의리로 뭉치지 않는다. 사태가 불리하면 의리도 우정도 여지없이 내 팽개쳐 버리는 게 권력의 속성이다. 김계원은 최규하 국무총리에게 제일먼저 김재규를 밀고하게 된다. 정승화는 김재규를 체포한다. 김재규에게 의리의 남자들이 없는건 아니었다. 특전사령관으로 있는 안동농림학교 후배 정병주소장과 3군사령관 이건영중장이 있었다. 만부부당의 맹장들이었다. 이들은 부탁만 하면 즉시 일지군마를 이끌고 달려올 우군들이다. 그러나 이런 이야기는 먼 훗날 먼 거리에서 후회하면서 나눌 아쉬운 회고담 일뿐.
<계속>
* '김재규 복권소설'의 소설같은 사연
http://www.newsroh.com/bbs/board.php?bo_table=lks&wr_id=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