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화 70년: 23회) 혁명공약 역이용 부패·독재 비판한 정치소설…5·16 직후 신문연재 중단
(서울=코리아위클리) 임헌영 교수(민족문제연구소장) = “외유내강(外柔內剛)이란 말이 있다. 하지만 한국민족은 변질된 외유내강의 종족이라 하겠다. 즉, 외세에 대해서는 지극히 연약하면서도 자기 민족에 대해서는 영악하고 잔인한 민족인 것이다. (중략) 자유당 놈들은 썩을 대로 썩었건만 권력 연장과 이권 독점을 위해 얼마나 많은 야당 인사들을 괴롭히고 테러하고 나중에는 억울한 죄명까지 씌워 투옥케 했으며, 민주당 놈들과 신민당 놈들은 백성이야 도탄속에 빠져 있거나 말거나 자기들의 권력 다툼과 이권 운동에 눈이 뻘게 돌아가지 않았던가.” “이승만의 말이라면 똥도 떡이라고 핥아 먹을 이승만의 ‘개’들.”(박계주 <여수(旅愁)>)
신문 연재소설에서 이런 막말 정치비하의 만용은 거의 없다. 5·16쿠데타 직후 서슬 퍼런 시기니까 더욱 수상쩍다. 이용도 목사의 기독교적 휴머니즘 사상 신봉자였던 박계주(朴啓周, 1913~1966·사진)는 독재와 부패를 고발하려고 작심하고 장편소설 <여수>를 제2공화국 때 구상했다. 그러나 5·16쿠데타로 난감해지자 “모든 부패와 구악을 일소”한다는 ‘혁명공약’을 역이용했다. 이승만·장면 정권을 싸잡아 ‘구악’으로 몰아붙이며 자신의 민족사적인 입장을 은근히 짜깁기해 넣은 것이다.
1961년 6월11일 동아일보에 연재를 시작한 <여수>는 결국 11월28일자에서 필화를 만나 강제 중단당하고 말았다. 분단 이후 정치적 쟁점으로 신문 연재소설이 중단되기는 처음이다.
‘반탁 비판’으로 필화
“춘우는 문득 고하 송진우(古下 宋鎭禹)를 생각했다. 그는 신탁통치를 찬성했기 때문에 암살당했던 것이다. 그러나 지금 와서 생각하면 그 당시 송진우의 의견대로 5년간의 국제신탁통치를 받았던들 오년 뒤엔 국제기구인 유엔에 의해 오스트리아처럼 통일되었을 것이다. 국제신탁통치를 하게 되면 북한 남한으로 양단되지 않은 채 몇 개 통치 국가들이 남북을 공동감시하며 공동통치하게 되기 때문에 양립된 불가침의 군정은 없었을 것이다. 그러한 견지에서 본다면 신탁통치를 반대한 이승만 김구 이시영 등의 인사들은 독립투쟁을 한 애국자이기는 하지만 앞을 내다보거나 앞을 저울질할 줄 아는 정치가가 못되는 반면 송진우는 독립투쟁은 하지 못하였을 망정 앞을 내다보는 구안(具眼)의 정치가라 할 수 있다. 대체 해방 직후 아무런 경제적 지반도 없고 경찰력도 군대력도 없고 행정적 정치적 훈련도 없고 산업도 마비상태였는데 ‘돈립국가’라는 문패만 붙잡고 어쩌자는 것이었는지 한심하기 짝이 없는 일이 아닐 수 없다.”(‘비엔나의 야화’, 1961년 11월28일)
주인공 이춘우는 대학교수로 자유당 독재를 비판하는 반정부 작가인데, 유럽 여행 중 오스트리아에서의 착잡한 사념을 서술한 대목이다. ‘돈립국가’란 돈으로 나라를 세우려 한다거나 정신이 돌아버린 독립국가란 풍자일 수 있다. 작가가 직접 작은 따옴표를 한 것으로 미뤄볼 때 오자는 아닌 듯하다.
송진우는 엄연히 독립유공자이고, 신탁통치를 찬성한 서술에는 무리가 있지만, 중요한 건 반탁세력이 지배하던 살벌한 시기에 금기사항을 토로한 작가의 용기다. 반격은 너무나 빨랐다. 동아일보는 바로 이튿날(29일) 1면에다 아래와 같은 2단 상자 사고(社告)를 싣는다.
“사고(社告). 그간 본지 조간 4면에 연재해 오던 박계주씨 집필인 소설 <여수>는 비록 소설이라 할지라도 지난 28일자 조간 게재 내용이 본사의 견해와 현저히 상이하므로 본사는 해 소설을 금후 게재 중지하기로 결정하였음을 독자제현에게 알리오며 아울러 사전에 발견하여 시정치 못하였음을 송구히 여깁니다. 이 점 독자제현의 양찰을 바라마지 않습니다. 동아일보사.”
반탁운동의 심장부였던 동아일보인지라 수사기관보다 더 발 빠르게 조처했다. <동아일보 사사(社史)>는 “송진우를 암살한 테러범은 그런 그릇된 착각으로 범행을 저질렀는지 모르지만 송진우가 신탁통치를 찬성한 일이 없다”면서, “소설 <여수>에 묘사된 송진우에 관한 내용은 본사로서는 도저히 가볍게 보아 넘길 수 없는 일이었다”고 기록한다. 소설조차도 해당 신문사 입맛에 맞춰 써야 하는가?
박계주는 갓 설치(1961년 5월20일)된 중앙정보부에 연행돼, 치도곤을 당하고는 후유증을 씻을 겨를도 없이 연탄가스에 중독(1963년 5월21일)돼 투병하다가 작고했다.
“깡패정치…통곡할 노릇”
미완의 이 작품은 1960년대 신문 연재소설 중 가장 치열한 정치소설이다.
이춘우는 파리에서 항독 레지스탕스들이 나치에 의해 총살당했던 유적지와, “프랑스의 제국주의자들은 알제리아에서 손을 떼라” “알제리아는 알제리아인의 손으로”라는 구호를 벽에다 페인트로 쓰는 청년들과 의기투합한다. 이런 투쟁 현장에서 춘우의 뇌리에는 일제 치하 한국이 떠오른다. “36년간 일본에 대한 항쟁이 있었다면 (…) 만주에 있던 독립군들이 무력항쟁을 한 일은 있으되 국내의 백성들이나 지도자들이 육탄이 되어 일본 사람들을 죽이고 일본 관청에 불지르며 투쟁한 경력이 언제 있었던가. 부끄러운 일이다.”(‘레지스탕스’)
독립운동사의 정통을 무장투쟁사로 잡고 있는 박계주는 분단 독일의 상황을 소상하게 소개한다. 주인공 이춘우는 동베를린에서 서독으로 탈출한 사람들의 검문과정을 듣는다. 위생 검사 후 “심문은 5분에서 10분 내에 끝나야 하며, 묻는 것도 다섯 가지뿐이다. 성명, 연령, 가족, 탈출하게 된 동기, 동독에서의 직업과 생활상태, 희망하는 직업과 희망하는 주(州). 심문이 끝나면 수용소에 7~8일간만 유하게 하다가 비행기 편으로 희망하는 지방에 직장을 알선해서 보낸다.” “특히 춘우를 놀라게 한 것은 동부 베를린 노동자가 하루 4만명에서 6만명까지 서부 베를린에 아침에 일찍 와서 일한 뒤 임금을 타 가지고 저녁에 돌아간다는 사실이었다.”
춘우가 검찰 간부에게서 스파이와 국가 변란죄가 5년형이라 듣고 놀라 한국에서는 사형이라고 하니 그가 깜짝 놀라며, “그 사람은 당신네 나라 백성이 아닙니까”라고 반문한다.
당시 서독의 1마르크는 동독의 4마르크에 해당되었지만 서베를린 극장에는 “동독 손님이거든 동독 화폐 1마르크로 그냥 들어와도 됩니다”란 간판을 달았다. 교역 역시 최우선적으로 동·서독끼리 하며 통일이 되면 다 독일 재산이라는 주장 앞에서 춘우는 불쑥 남북한 학생들의 수학여행 실현을 상상한다.
이어 안보문제도 언급한다. “서독 경찰들은 아마 동독의 악질 중앙당원들의 리스트를 거의 장악하고 있어서 장차 통일되는 때에는 누구의 무고나 중상모략에 의한 밀고”에 흔들리지 않는다고 했다.
그런데 안보 타령만 해대는 한국은 어떤가. “한국 수사기관들은 국민의 혈세에 의한 거대한 정보비를 쓰면서도 (…) 부패 정부를 반대하는 인사들의 리스트를 만들기에만 급급했고, 심지어는 생사람을 공산당원으로 만들어내는 일에만 혈안이었던 것이다. 독일만치 건설해 놓고 부흥시켜 놓아 국민으로 하여금 잘살게 하면서 그러한 장난질을 한대도 또 모르겠다. 이건 그렇지 못하면서 깡패정치만 하니 한심한 노릇이다. 한심한 노릇이 아니라 통곡할 노릇이다.”
<꼬리 기사>
소설 ‘여수’ 중 ‘형장의 여인’ 한 대목
“얼마 뒤 이 마을의 지서에도 순경들이 몰려들기 시작했다. 공산군이 점령했을 때는 항쟁은커녕 어디엔가 도망치고 숨어버려 짹소리 한번 치지 못하던 것들이 개선장군인 양 의기양양하게 나타나 큰소리치며 그 위세가 도도하였다. 경찰관들만이 아니라 국민을 버리고 저희들만 도망쳤던 다른 관공리들도 마찬가지였다.
수원에 도망쳤던 정부는 하룻만에 서울에 환도한다는 성명을 발표하여 국민을 기만했고, 국회도 서울을 사수한다 했고, 일부 군의 지도자는 아침을 해주에서 먹고 점심을 평양에서 먹는다고 큰소리치며 해주를 이미 함락했노라고 거짓 발표를 하고는 한강 다리를 몰래 끊어버렸건만, 그 대통령, 그 장관, 그 판사, 그 검사, 그 경찰관들이 그대로 뻔뻔한 얼굴로 나타나서 국민에게 사죄는커녕 도리어 국민을 죄인시하며 조지기 시작했다. 실로 구토 나는 일이요, 이러한 자들에게 혈세를 바쳐 먹여살렸던 국민만이 불쌍하고 어리석었을 뿐이다. 공산당원이 아닌 바에야, 그리고 국민 전체가 모조리 땅속에 들어가 버틸 수 없는 바에야 개죽음을 당하지 않기 위해서 다소의 협력이 있었기로 그 협력한 죄가 누구 때문에 저질러졌던 죄였기에 등신 대통령과, 병신 장관과, 바보 국회의원과, 그 밖의 덜돼먹은 관공리들의 호통이 이다지도 심할까. 철면피도 이쯤 되면 가위 후세의 자손들을 위해 박물관에 비치할 만도 하다.” (* 경향신문에 먼저 올려졌습니다. 필자의 허락을 받아 게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