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화 70년: 24회] 펜으로 거침없이 질타하다 중정에 끌려가
▲ 서울대 법대 교수 시절 미국 국무부의 초청으로 미국을 방문한 황산덕 교수. 황 교수는 2개월여의 이 여행 직후 동아일보 비상임 논설위원이 돼 5·16 쿠데타를 비판하는 칼럼과 논설을 잇달아 썼다. 아들 황영준 제공 |
(서울=코리아위클리) 임헌영 교수(민족문제연구소장) = “지도자는 대중과 유리되어 그 위에 군림하는 권위주의자나 특권계급이 아니라 그들과 운명을 같이하고 그들의 편에 서서 동고동락하는 동지로서의 의식을 가진 자라야 한다. 국민을 지도함에 있어서 친절하고 겸손하며 모든 어려운 일에 당하여 솔선수범하여 난관을 돌파하며 사를 버리고 오직 국민을 위하여 희생한다는 숭고한 정신을 그는 가져야 한다. 지도자로서 가지는 모든 권력의 연원은 국민이다. 자기 스스로 창조한 권력도 초인간적 존재로부터 수여된 여하한 특권도 있을 수 없다. 지도자는 모름지기 대중에 깊이 뿌리박고 전근대적 특권의식을 버리라.”(<지도자도(指導者道)>
‘좌빨’ 냄새 물씬 풍기는 이 글은 5·16 쿠데타 총성의 메아리가 미처 사라지지도 않은 1961년 6월29일 조선일보에 박정희의 이름으로 실렸다.
▲ 황산덕 교수와 고재욱 주필의 구속 소식을 전한 동아일보 1962년 8월4일자 1면 머리기사. |
“공보부에서 27일 국가재건최고회의 부의장 박정희 육군소장이 저술한 <지도자도>라는 팜플렛을 공무원 및 일반에게 배부하였다. 지난 16일자로 국가재건최고회의에서 발행한 동 소책자(비매품)의 내용은 아래와 같다”라는 ‘편집자 주’를 달아 3회에 걸쳐 연재했다. “박정희가 이 글을 쓴 날부터 1979년 10월26일 죽음을 당하기까지 그런 지도자도를 걷지 않았다는 사실은 역사가 입증하고 있다”(문영희·김종철·김광원·강기석 저, <조선일보 대해부> 3권). 그의 딸도 그렇다.
“권력 연원은 국민”이라던 군인 박정희
“애국심과 양심에 의해 일으킨 쿠데타는 거의 없었다” “애국심이니, 정의니 하는 본래 아름다웠던 말들이 형편없이 오염되게 된 것은 쿠데타를 일으킨 군인들이 마구 그런 말을 써먹었기 때문”(이병주, <그해 5월>)이다.
국가재건최고회의는 5월23일 포고 제11호를 공포, 전국 912개 일간·주간·통신사 중 82개만 남기고 강제 폐간시켰고, 960명의 기자를 구금·체포 혹은 재판에 회부(1962년 6월22일까지)하여 단군 이래 최고의 언론 탄압 기록을 세웠다. 5월21일까지의 통계로 용공분자 2014명을 검거한 것 역시 최고 기록이다.
“올 것이 왔구나”란 실언 한마디로 쿠데타를 긍정한 듯 곡해받은 윤보선은 바로 민정이양을 촉구(6월4일)했고, 그 기사로 동아일보 김영상 편집국장과 정경부 이만섭 기자가 연행됐다. 깡패나 비밀 댄스홀 소탕, 교통질서 확립 등 경찰의 일상 업무를 국방의무를 맡아야 할 군이 나서서 강제하는 따위로 반짝 대중적 인기를 끌었던 쿠데타는 이내 군 본연의 자세로 돌아가라는 역사적 당위성에 직면했다.
모든 쿠데타는 결코 군 본연의 자세로 돌아갈 생각이 없다. 그래서 6월10일 중앙정보부를 출범시켰고, 특수범죄처벌에 관한 특별법(6월22일)과 반공법(7월4일)으로 옥죄었다. 반공법을 공포한 날 오후, 최고회의 원충연 공보실장은 ‘전 민주당 정권의 용공정책 진상’에 관한 담화문을 발표했다.
“민주당 정부 요인들의 용공음모를 예의 수사하여 오던 바 그 천인공노할 진상이 역력히 밝혀졌다. (…) 이 나라를 공산화할 무서운 용공음모에 가담하여 왔었다. 소위 국무총리 장면을 비롯하여 민주당 정부에서도 가장 핵심이며 장면의 심복이었던 전 법무부 장관 조재천, 전 내무부 장관 신현돈, 전 국방부 장관 현석호, 전 대검찰청 총장 이태희, 전 재무부 장관 김영선, 전 상공부 장관 주요한, 전 무임소장관 김선태, 전 외무부 장관 정일형, 전 조폐공사 사장 선우종원 등이 모조리 이 어마어마한 사건에 관계되어 있다.”
이런 새빨간 거짓 빨갱이 타령으로도 수습이 안되자 박정희는 쿠데타 두 달 만에 민정이양 계획(8월12일)을 발표하지 않을 수 없었다. 1963년 3월 이전 대통령중심제와 단원제 국회로 신헌법을 제정하고, 5월 총선거를 실시한다는 요지였다. 워커힐 사건, 새나라자동차 사건, ‘빠찡꼬’ 사건, 증권 파동으로 쿠데타 세력이 점점 더 궁지로 몰린 가운데 1962년 7월 헌법심의위원회가 구성됐다.
그러자 “헌법에서 생명을 걸고 지키고자 하는 국민의 기본권이나 기타 제 권리는 이것을 더욱 창달하는 방안을 모색할지언정 그를 위축시키는 방안은 손대지 말라”(경향신문 사설 ‘헌법심의위원회의 발족에 기함’, 1962년 7월12일)는 비판이 잇따랐다. 이항녕은 8월23일 시민회관 공청회에서 국가기관이 민의를 대변 못하면 국민에게 저항권이 있다는 조항을 삽입하라고 주장했으나 묵살당했다.
황산덕 “5·16 쿠데타는 위헌”
이때 헌법 논의를 기본 삼아 5·16 쿠데타 자체가 위헌적이라는 취지의 칼럼과 논설을 6회나 썼다가 혹독한 필화를 당한 것이 서울대 법대 취현 황산덕(翠玄 黃山德, 1917~1989년) 교수였다. 미국을 비롯한 2개월여 해외여행 뒤 귀국한 황산덕을 동아일보 이동욱이 비상임 논설위원으로 초치한 게 1962년 5월1일이었다.
▲ 황산덕 교수가 필화 당시 옥중 경험을 1967년에 수기로 발간한 <자화상>의 신문 광고. 경향신문 자료사진 |
“쿠데타의 정신이 아무리 숭고하다고 할지라도 군인이 오랫동안 정권의 자리에 앉아 있는 것은 환영할 바가 되지 못하며, 더구나 국민의 의사를 무시하고 군인이 일방적으로 나라의 정치 형태를 결정짓는 일이 있어서는 안되겠다”(<취현일기>)는 것이 황산덕의 신념이었다. “국가의 참된 정치형태는 국민 전체의 처절한 투쟁을 통하여 유일한 형태로서 쟁취되는 것이며, 몇몇 인사가 책상에서 이리저리로 연습 삼아 그려볼 수 있는 것은 아니다”(‘국민이 원하는 정치형태를 따르라’). “지금까지 우리나라에서 민주정치가 제대로 성과를 거두지 못한 것은 민도가 낮았기 때문이 아니라 (…) 정부가 제 구실을 하지 못하여 결과가 나빠졌음에도 불구하고 그 책임을 민족에게 돌려 간단히 획일주의를 옹호하고 나서는 것은 민족에 대한 모독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민주정치와 민족성의 문제’).
이렇게 민족성을 구실로 독재를 합리화하려는 쿠데타를 질타하며 황산덕은 그들이 의도하는 헌법은 불법이기 때문에 “제2공화국 헌법을 완전히 원상복구시키고 그리고는 헌법상의 국회로 하여금 (…) 합헌적 절차를 밟아서 고치도록 하자”(‘헌법의 제정이냐, 개정이냐-제헌절을 맞이하여-’)고 주장한다. 자신들이 타도한 제2공화국으로의 회귀가 정 싫으면 최고회의에서 총선 규칙을 만들어 총선을 실시한 뒤 국회를 통하여 개헌을 하고서 민정이양을 하라는 취지(‘개헌의 방법과 민정이양의 시기’)의 사설도 썼다.
김종필 중정부장이 직접 조사하다
이러고도 조바심이 나자 1962년 7월28일 결정타인 사설 ‘국민투표는 결코 만능이 아니다’를 썼다. 어용교수들에게 헌법을 만들게 하여 국민투표 절차를 거쳐 국권을 농단하려는 군부의 계략에 황산덕은 격앙했다. 이 문제의 글은 “아직도 극복하지 않고 살아있는 하나의 괴물이 있는데”의 ‘괴물’을 ‘사고방식’으로 고친 것 말고는 그대로 실렸다. <공산당 선언>의 첫 구절에 등장하는 ‘괴물(유령)’이란 단어의 선입견을 불식시키고자 고재욱 부사장 겸 주필이 고친 것이다.
사설은 “대한민국의 주인은 국민이므로 국민은 언제든지 그리고 마음대로 국민투표의 방법으로 헌법을 개정할 수가 있다는 주장”을 악용하여, “군정당국은 당연히 앞으로의 헌법을 창설할 권력”을 멋대로 행사한다고 질타한다. 헌법도 법이기에 “법의 일반원칙”에 따라 국회를 거쳐야 한다는 요지다. 유엔에 대한 언급은 선진국들이 쿠데타를 일으킨 나라를 어떻게 볼 것인가에 대한 경고다. 쿠데타 세력의 개헌은 국내외 모두에서 불법이라는 이 사설은 바로 이후락 공보실장의 묵과할 수 없다는 담화로 나타났다.
고재욱과 황산덕은 연행과 석방을 반복하다가 결국 구속(동아일보 8월4일자 1면 기사와 사진)됐다. 고재욱 부사장은 8월8일 이내 석방됐지만 황산덕에겐 가혹했다. 광교 부근 중앙정보부 분실에서 계장·과장·국장이 돌아가며 조사했지만 뒤집어씌울 죄가 없자 김종필 부장이 직접 나섰으나 별 수 없었다. 장기영 한국일보 사장이 구속되자 국제 여론이 악화됐고, 그와 함께 공소 취하로 128일 만인 12월7일 풀려났다(황산덕 유고집 <법과 사회와 국가> 및 아들 황영준 증언).
<꼬리기사>
‘국민투표는 결코 만능이 아니다’에서 문제 된 단락
우리나라가 아직 유엔에 가입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은 ‘국가’로서의 승인을 아직 받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물론 우리는 유엔에서 ‘정부’로서의 승인은 받고 있지만, 그것도 우리의 정부가 1948년에 유엔 감시하의 총선거로써 구성된 국회에 의하여 제정된 헌법을 모시고 있고, 그 헌법에 의하여 조직된 정부로서 존속하는 한에 있어서 그러한 정부 승인을 계속 보유할 수가 있는 것이며, 만일 그 헌법을 일축하고 새로이 헌법을 만드는 경우에는, 비록 그것이 국민투표에서 압도적 다수의 지지를 얻는다고 할지라도 유엔의 승인은 그 효력을 상실하고 유엔과의 관련의 밑에서 지금까지 이 땅에서 이루어놓은 위대한 사업을 모두 백지로 환원한다는 무서운 이론적 결과를 가져온다는 것을 우리는 간과해서는 아니되는 것이다. (이 글은 경향신문에 먼저 올려졌습니다. 필자의 허락을 받아 게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