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화 70년: 25회] 정부도 외면한 ‘60년대 주한미군 만행’…문학으로 다루다 혹독한 조사 받아
▲ 1969년 어느 날 집 서재에서 집필 중인 류주현 작가. 아들 류호창 건국대 교수 제공 |
(서울=코리아위클리) 임헌영 교수(민족문제연구소장) = 보수파들이 집회 때마다 성조기를 요란하게 흔들어 줬건만 렉스 틸러슨 미국 국무장관은 중국행 비행기(3월18일)에서 일본은 최우선 동맹국, 한국은 파트너라고 굳이 하지 않아도 될 꼬투리를 달아 친미파들 자존심을 긁었다. 만찬 초대를 했느니 말았느니 따위 논란까지 고려하면 이런 콩쥐 처지에서도 왜 사드 배치 부지까지 덥석 내주나 부아가 치민다. 주체성을 갖춘 나라라면 그들이 우리에게 손발 닳도록 간청하며 온갖 무역 특혜를 제안해와도 어깨에 힘줄 판인데 이게 무슨 허수아비 국격 망신인가.
‘명백한 운명(Manifest Destiny)’이란 미합중국이 갖춘 풍성한 장단점 중 제국주의 속성을 나타낸 촌철살인이다. 미 대륙 동부 애팔래치아 산맥 부근에 머물렀던 독립전쟁 전후의 청교도들이 인디언 살육과 멕시코와의 전쟁 등으로 광막한 토지에다 하와이까지 점령하는 과정에서 “우리는 대서양에서 태평양까지 행진해야 한다. 그것이 백인의 운명이다”라는 데서 ‘명백한 운명’ 사상은 형성됐다.
“한국은 미군이 소유한 자회사”
정복의 야욕에는 상한선이 없다. 1894년 오빌 플랫 상원의원은 “현재의 미국 영토는 너무 좁다. 국가방위와 경제발전을 위해 더 넓은 토지가 필요하므로 당장이라도 다른 영토를 정복해야 한다”고 ‘명백한 운명’ 대부흥회의 불을 지폈다. 미국·스페인 전쟁(1898년) 승리 후 카리브해 일대와 필리핀까지 움켜쥘 기회를 포착하자 변호사로 진보적 역사학자였던 인디애나주 출신 상원의원 앨버트 비버리지는 상원에서 ‘미 제국을 지지하여(In support of an American Empire)’란 연설(1900년 1월9일)을 했다.
“필리핀은 영원히 우리 것이다. (…) 게다가 필리핀 건너편에는 중국이라는 무한한 시장이 있다. (…) 태평양은 이제 우리의 바다다. (…) 태평양을 제압하는 자가 세계를 지배할 것이다. 그 자리는 지금도 그리고 앞으로도 영원히 미국이 차지할 것이다.” “우리는 세계를 지배할 인종이다. (…) 우리는 세계의 문명화를 담당하라는 사명을 신으로부터 위탁받은 특별한 인종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 역할을 방기하지 않을 것이다. (…) 신은 우리를 선택하셨다. (…) 야만스럽고 망령든 사람들을 통치하기 위해 신은 우리를 통치의 달인으로 만드셨다.”
미국은 군산복합체라 “멕시코 침공은 미국 석유회사의 이익, 아이티와 쿠바 침공은 내셔널 시티은행의 이익, 니카라과 침공은 국제금융회사인 브라운 브라더스의 이익, 도미니카 침공은 미국 설탕회사의 이익, 온두라스 침공은 미국 과일회사의 이익”(최천택·김상구 공저, <미 제국의 두 기둥 전쟁과 기독교>, 책나무)이었다. 필시 한국의 사드 배치는 록히드 마틴 주머니를 두둑하게 만들 것이다.
이 군산복합체가 한국에서는 기독교 신앙과 찰떡궁합으로 ‘명백한 운명’의 번식력이 왕성해진다. 두 차례나 주한 미대사관에 근무했던 한국통 그레고리 헨더슨은 “한국은 미국 군부가 전 소유권을 장악하고 있는 자회사와 같은 양상을 띠고 있다”고 했다. “한국은 장군에서 졸병에 이르기까지 주한미군이 물질적 향락을 만끽할 수 있는 나라다. 그런 향락 중에는 몇 천명, 몇 만명이라는 단위로 공급되는 젊은 여성의 육체도 포함되어 있다.”(오연호, <노근리 그 후>에서 재인용)
그러니 목포발 서울행 열차에서 미군 4명이 부녀 3명만 남기고 모두 다른 칸으로 몰아낸 후 돌려가며 능욕(1947년 1월7일 밤 9시경)하는 엽기적인 사건을 비롯해 온갖 만행이 벌어지지 않았겠는가.
그들의 여러 만행에 대하여 양유찬 주미 한국대사는 “그러한 사건은 어디에서도, 심지어는 미국 내에서도 있을 수 있는 일이라고 외신기자에게 언명하고 그러한 일개 사고를 가지고 떠들어대면 공산주의자들에게 이용만 될 뿐일 것”이라고 술회했다. 이에 국민들이 격분하자 조정환 외무장관은 “직책상으로는 내 부서 밑에 있다고 하지만 일국 원수를 대표하여 외국에 주재하는 대사의 언동을 내가 무엇이라고 논평하고 싶지 않다”고 했다. “이러한 외무부 장관 밑에 그러한 주외 대사가 있다는 사실에 새삼스레 놀라며 이 사람들이 어느 나라 장관이요 대사인지 분간하기 어려움을 느낀다.”( 동아일보, 1957년 10월7일 사설, ‘미군인의 만행과 정부의 책임’)
미군의 잔혹상 고발한 소설 ‘임진강’
▲ 미군에 의한 한국 농민 피살을 다룬 류주현 작가의 단편소설 ‘임진강’과 삽화. 소설은 월간 ‘사상계’ 1962년 7월호에 실렸다. 아들 류호창 건국대 교수 제공 |
국민의 울분을 가장 먼저 달래주는 게 문학이다. 작가 류주현(默史 柳周鉉, 1921~1982년)은 단편소설 ‘임진강’(사상계, 1962년 7월)에서 양공주 소재를 탈피하고 미군 사격에 죽은 두 농민을 처음으로 정면으로 다뤘다. 소설은 같은 해 1월6일 파주군 진동면 하포리에서 발생했던 실제 사건에 근거하고 있다. 땔나무를 해오던 황광길(당시 25세)과 유기용(38세)이 미군 사격으로 죽었다. 그런데 황의 옷이 멀쩡해 조사해보니 알몸에다 사격 후 옷을 입혔던 것. 이 사건은 류주현의 단편 ‘임진강’이 나온 30년 뒤 오연호의 장편소설 <살아나는 임진강>(돌베개, 1992년)까지 낳았다. 앞의 것은 허구가 가미되었으나 뒤의 작품은 실록이다. 류주현의 소설은 일본 조총련계에 소개되면서 미군의 잔혹상과 한국 농민의 궁핍상 문제로 당국의 혹독한 조사를 받았다.
소설의 무대는 임진강 건너 망덕산이 보이는 파주 빈촌 갈(蘆)마을과, 한강을 남쪽으로 흘려보내는 외군과 외인 주택지대 이태원 두 곳이다. 갈마을엔 동생 덕수가 어머니를 모시고 아내와 살고, 이태원엔 전과 3범인 그의 형 덕환이 들장미바 여급으로 세 살 연상인 미스 최와 동거한다.
덕수와 대추나무골 신영태는 정월 초이튿날 얼음을 타고 강을 건너 갈대를 베어 오다가 미군 보초의 총에 맞아 죽었다. 민간인 출입금지구역의 무성한 갈대는 늘 베어왔던 터라 여러 청년들이 함께였는데, 귀가 중 둘만 뒤처져 미군 보초에게 잡혔다. 신영태가 도주하니까 옷을 홀랑 벗은 채로 취조 받던 덕수도 덩달아 달아나다 강 가운데서 사살당했다.
59세인 덕수의 어머니 피씨는 아들의 죽음이 일진과 자기 나이 아홉수 탓으로 돌렸고, 시집온 지 반 년에 임신 석 달인 아내 정임은 팔자소관으로 여겼다. “아들을 죽인 사람은 너무나 강자의 위치에 있는 까닭인지 인욕이 몸에 밴 까닭인지 두드러지게 시비할 염을 내지 않는 게 이상할 정도다.”
덕환은 동생의 참극을 신문기사를 통해서야 알고는 1·4후퇴 때 형제가 목숨을 걸고 길 잃은 미군 두 명을 숨겨주었던 걸 떠올리며 울분을 달래지 못하면서도 모든 죄를 가난 탓으로 몰아간다. 누구도 미군이나 위정자를 나무라지 않았기 때문에 필화를 호되게 당하지 않았다. 더구나 덕환의 도둑질 선배 문태가 최전방 미군 보초로서는 긴장 탓으로 총을 쏠 수도 있다는 말을 하도록 장치했기에 작가는 반미사상의 올가미를 피할 수 있었다.
그러나 덕환의 격분은 다시는 도둑질을 말아달라는 미스 최의 애원조차도 잊게 해 문태를 따라 복면을 쓰고 300만환은 됨직한 돈 보따리를 훔쳐 나오게 만들었다. 인과응보로야 미군부대 보급품을 털어야겠지만 굳이 이런 걸 따질 계제가 아니었다. 마침 주인이 “도둑이야!”라고 고함을 치자 각자 흩어져버려 덕환은 돈뭉치를 들고 동생 장례에 맞추고자 귀향을 서둘렀다.
덕수의 시신이 나가자 그의 아내가 피를 쏟으며 유산한 채 기절해 살아날 기미라곤 없다. 모든 걸 포기한 시어머니 피씨는 강 언덕 서낭당의 소나무 가지에다 무명 허리띠로 맨 올가미를 걸고 죽기 직전 미군부대 초소 쪽의 한 남자를 본다. 덕환은 갈마을 열 집 모두에게 훔친 돈을 10등분해서 나눠줄 꿈에 부푼 채 서낭당 소나무에 시신이 늘어진 걸 본다.
<꼬리기사>
소설 ‘임진강’의 일부
(…) 동생 덕수란 놈은 죄 없이 죽었지 않은가? 죽었단 말이다. 적도 아닌, 우리 편인 미군의 총탄으로 죽었단 말이다. 가만히 있을 수는 없지 않은가 말이다.
“문제는 가난하기 때문이다. 총을 쏜 미군 보초두 죽일 놈은 아니구, 물론 나무꾼도 죽어야 할 죄는 없어. 문제는 가난이 죄야. 가난하기 때문에 위험한 줄을 알면서두 나무를 하러 갔다가 잠깐 실수로 목숨을 뺏긴 거란 말이다. 불쌍할 뿐이다. 그저 불쌍해!” (중략)
그는 동생의 비명을 계기로 자기 자신을 자꾸 슬퍼했다. 가난하기 때문에 죽어간 동생을 빙자해서 뿌리칠 길 없는 유혹과 자신 없는 대결을 해야 했다.
무엇인가 해야 한다는 절박감으로 말미암아 슬퍼지는 것이었다. 선이고 악이고 준법이고 범법이고를 가리기 이전에 무슨 짓인가 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는 초조감이 왠지 자꾸 슬프기만 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