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의진 회장
김의진, 그의 이름 석자 앞에는 타이틀이 참 많다. 북경일진위업투자자문회사(투자 및 컨설팅)와
북경금협윤과학기술발전유한회사(자동차도장, 복원 가맹업), 북경금협윤설비제조유한회사(기계제조), 대륙주식유한회사(투자),
제주중국성개발(부동산개발)의 동사장, 북진국제여행사 부사장에 북경조선족기업가협회 회장, 중일한경제발전협회(외교부 산하)부회장,
중한기업연의회(전국상공련 산하)부회장, 전국조선족기업인 골프협회 회장, 명예회장, 중국조선민족사학회 이사,중앙민족대학 특별초빙교수
,민족교육발전기금회 리사장 등을 역임해 오면서 지금까지 거침없는 행보를 이어왔다. 몸이 열개라도 모자랄 것 같은 이 많은 일들을 성공적으로
이끌어 올수 있는 비결은 무엇일까? 5월의 마지막 금요일, 북경조선족기업가협회 설립 3주년을 앞두고 기념행사준비로 분주히 보내고 있는 김의진
회장을 협회 사무실에서 만났다.
인터뷰에 응한 그는 누구보다 자신의 생각을 소탈하고 솔직하게 표현할 줄 아는 사람이었다. 하지만 이날 첫 대화는 다소 의외적인
내용으로 시작되었다. 강인하고 카리스마 넘치는 김의진 회장도 이젠 "손녀바보"--할아버지가 된 것이다. 손주가 자식보다 열배로 더 예쁘다더니
핸드폰에 담긴, 이제 겨우 20여일 되는 손녀의 사진을 보여주는 김의진 회장은 너무 사랑스럽다는 흡족한 미소를 지어보이며 "손녀바보"의 면모를
감추지 못했다. 이젠 "손녀바보"의 타이틀까지 거머쥐게 된 셈이다.
협회 설립까지의 진통
2011년 6월 8일 설립된 북경조선족기업가협회는 올해로 설립 3주년을 맞이한다. 하지만 협회 설립까지는 적잖은 진통을 겪었다.
수도 북경에서 조선족이 군체로 생활하기는 사실 50년대부터였다. 개혁개방과 더불어 80년대부터는 지방에서 상경해 사업을 시작한
기업인을 비롯한 많은 기업인들이 나타났다. 불완정한 통계에 의하면 지금은 약 10만명에 달하는 조선족이 북경에서 생활하고 있다. 하나의 성숙된
조선족 사회임에도 불구하고 또한 상당한 기업인 군체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북경은 단일 민족의 공식적 단체는 허가가 잘 나오지 않는 등 특수한
객관적인 원인 때문에 그동안 조선족기업인 단체를 출범하지 못했다.
동북3성, 예를 들면 연변이나 심양, 할빈 등 지에서는 보다 일찍 공식적인 조선족기업인 단체를 확보하고 있었다. 이로 인해 매번
전국적인 조선족정재계포럼이나 기타 행사를 조직하거나 참가할 때면 입장이 난처한 경우가 한두번이 아니었다고 김의진은 말한다. 북경의 기업인들이
이끄는 기업은 타지역과 비해 제조업이 상대적으로 적은 반면 비지니스의 거의 모든 영역에 진출해 있으며 머리로 승부를 거는 IT를 포함한
하이테크산업,무역과 문화산업, 서비스업이 발달한 특성이 있다.
또한 북경의 유수의 대학의 조선족 졸업생들이 수도에 남아 창업의 꿈을 펼치면서 북경의 조선족 기업인들은 전반적 교육수준이 높은
편이다. 이같은 수도에 기업인단체가 없다니. 김의진은 이러한 현실을 개변하기로 마음먹고 주변의 뜻있는 기업인들을 모아 수도의 이미지에 걸맞는,
사회 전체를 통합할 수 있고 높은 차원의 품위를 지향하는 협회를 만들기 위해 심혈을 기울여 왔다. 여러 가지 시도 끝에 당시 외교부 산하의
중일한경제발전협회에서 부회장직을 맡고 있던 김의진은 2011년 6월 8일 이 협회 소속 단체로북경조선족기업인연의회를 설립하기에 이른다. 후에는
행사의 편리와 이미지 등을 고려하여 김의진은 또 북경의 소수민족민간행사를 관장하고 있는 북경시민족연의회와 여러 차례 교섭을 거쳐 끝내
북경조선족기업가협회의 비준, 설립을 도출해내여 오늘의 두개의 타이틀을 확보하게 된다.
김의진 회장
화합과 통합의 장
김의진 회장의 말처럼 북경조선족기업가협회는 늦둥이지만 보다 높은 목표를 지향하는 단체이다. 지금은 회원사 200개 정도, 단체
회원으로 등록된 월드옥타지회까지 합하면 회원수는 수백명에 이른다. 여기에는 이미 상장한 낭시주식유한회사 신동일 이사장, 동화원의료설비유한회사의
남룡 이사장, 세계한식문화에 큰 기여를 한 한라산그룹의 장문덕 사장, 또 최근에 10주년 행사를 크게 치룬 의료기기유한회사인 커시안의 박걸
이사장 등 기업인들이 이끄는 굵직한 기업들이 있는가 하면 바야흐로 상승세를 타기 시작한 기업들도 많다. 김의진 회장의 말 그대로 많이 알려진
조선족 기업이나 조선족 오너가 운영하는 회사는 거의 다 망라됐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3년간 보다 높은 차원을 고집하는 협회는 학습형, 봉사형
협회를 지향하면서 이러한 브레인들을 이끌고 화합을 다지기 위해 많은 일들을 추진해 왔다.
시대의 발전수요에 따라 2013년 9월에는 협회를 5개 분회로 나누었고 또 차세대 양성 및 청년기업인들의 활약을 이끌어내기 위해
청년분회를 별도로 설치한데 이어 최근에는 연교분회까지 설립했다. 이를 통해 회원수가 늘어남에 따라 행사조직이 갈수록 어려워지는 등 난제를
효과적으로 해결해 주었고 회원들의 참여의식, 주인공의식, 협회행사의 능률성과 효과성,내부 응집력을 크게 향상시켰다.
아울러 회원들을 위해 더 잘 봉사하고 북경에 있는 제한된 자원을 활용하는 차원에서 북경의 큰 병원의 주임 의사, 교수급 이상
의료진들을 건강고문으로 초빙해 회원들의 건강을 체크해 주고 있고, 지난해 연말부터는 북경의 정계,학계,문화예술계의 유지 인사들을 고문으로 모시고
협회이미지향상은 물론 협회와 회원사들의 사회자원활용과 기업문화건설에 도움을 주고 있다.
김의진 회장은 이를 모체로 향후 더 한층 확장해 궁극적으로 전 북경시조선족사회를 아우르는 조선족협회로 발전할수 있길 바라며 지금은
이를 위한 인적자원 확보 외에도 여러 단체들이 서로 손을 맞추는 단계라고 말한다. 2011년 12월에는 회원들사이에 서로 교류하고 소통할 수
있는 플랫폼—협회지인 <조기련>잡지를 창간해 매기 마다 우수 기업인을 표지 인물로 선정해 집중 조명하면서 서로의 경험과 좋은 생각을
공유하는 동시에 또 대외로는 협회의 활동, 회원과 회원사를 홍보하고 관련 제품을 보급하는 장으로 활용해 오고 있다. 북경은 물론 전국 각 관련
기구,협회,언론 등에 배포되는 <조기련>잡지는 회원뿐아니라 사회 각 계층에서도 비교적 높은 평가를 받고있으며 오는 6월8일에는
<조기련>잡지와 협회가 주최하는 제1회 우리말매체합작심포지엄이 북경에서 개최되며 최초로 우리말 방송,신문,잡지,온라인매체 등 관영 및
민간매체들이 한자리에 모여 상호 교류와 협력,자원공유와 윈윈 등 관심사를 연구,의논하게 된다.
잡지 외에도 협회 사이트, 위챗 등도 남보다 발빠르게 만들어 상호교류와 대외홍보,회원사 및 그 제품 홍보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김의진 회장은 회원들을 위해 봉사하는 것이 협회의 생명이라며 이러한 노력을 통해 보다 단합되고 발전하는 협회를 만들어갈 수 있길 바란다고
말한다.
현재 협회는 회원발전,내실강화,대외지명도 제고 등 여러면으로 순항 중에 있다.뭉쳐야 산다는 말이 있듯이 협회란 플랫폼의 힘을
보여주는 일례로 김의진 회장이 이끌고 있는 제주중국성개발프로젝트를 들 수 있다. 이 프로젝트에는 협회 회원들을 위주로 전국 각 지역의30여명
투자자가 공동으로 약 3억달러를 투자하는 별장,리조트건설프로젝트이다. 어느 개인이나 한개 회사가 시도하기에는 너무나도 부담스러운 일이다. 특히
해외 부동산 개발같은 경우는 거의가 경험이 없는 상황에서 이들은 아이디어,자금, 부동산 개발, 건설능력, 마켓팅, 인적자원 등 분산되었던 다양한
자원을 한데 모아 거대한 단합의 힘(合力)을 구성한 것이다. 이를 보고 한국인을 포함한 많은 사람들은 '어떻게 주식투자도 아닌데 이렇게 많은
사람이 함께 공동투자를 할 수 있는가?'하며 놀라움을 표하면서 주의깊게 지켜보고 있다. '이 모든 것은 협회라는 큰 울타리가 뒷받침되어 힘과
믿음이 되고 뜻을 성사시켜서 이루어지지 않았나 생각한다'며 김의진 회장은 말했다.
문화인에서 기업인으로의 변신
어떤 질문에도 막힘없이 답하는 그의 입담은 분명 타고난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도 그럴 것이 어릴 때 작가의 꿈도 지녔었다는
김의진 회장은 문화대혁명 후 대학입시제도를 회복한 이듬해인 1978년 중앙민족대학 조선언어문학학부에 입학하고 졸업하던 해인 1982년에는 그때
당시 인기가 좋았던 중앙민족번역국에 배치받아 번역과 글쓰기에 종사해 온 문화인이었다. 하지만 80년대 말, 김의진은 8년간의 안정적인
기관공무원생활을 박차고 여행업에 발을 들여놓는다. 이처럼 새로운 변신을 결심한 계기는 무엇이었을까?
80년대 말부터 중한 양국간에는 민간교류의 물꼬가 터지기 시작했다. 그때만 해도 양국간에는 수교 전이어서 정경분리(政經分離)원칙을
고수하여 민간교류만 허용하던 시기였다. 김의진은 번연국의 위임을 받고 한국의 중국고찰단 통역을 시작으로 수차 <죽의 장막>이라 불리며
수십년간 서로 벽을 쌓고 살아왔던 한국인들과 만나게 된다. 그때는 한국인들과 조선족 동포들이 만나면 반가워서 남자들도 서로를 부둥켜 안고 눈물을
쏟아내는 때였다. 매사에 정열적이고 부지런한 김의진은 통역 임무를 원만히 수행하는 외에도 문화,국정이 틀려서 중국과의 교류에서 의사소통에 여러
가지 어려움을 겪고 있는 한국업체와 관련 인사들을 진심으로 도와 나섰다. '진심은 통한다'고 이국땅에서 이토록 친절하고 똑똑한 조선족 젊은이를
만난 한국인들은 김의진에게 강한 호감을 갖게 된다.
김의진은 이러한 입소문을 타고 "유명"해지며 중국을 찾는 한국업체와 한국인들은 너도나도 통역으로 지정하는 것은 물론이고 여러 가지
중국방문 행사와 관련된 업무를 김의진에게 맡기기 시작한다. 이런 과정이 반복되는 와중에 젊은 청년 김의진은 빠른 템포에 생산주기가 짧고, 노력의
성과가 금방금방 보이는 여행업에 보람을 느끼며 여기에 깊이 매료된다. 그동안 번역국에서 주로 경전 문헌을 번역해오며 성취감을 잘 느끼지 못했던
딱딱한 일상과는 사뭇 다른 체험이었다. 그러던 차에 북경시 국유기업인 성향무역그룹산하 신화여행사가 김의진에게 그때 처장대우, 당시 국장급 수준에
맞먹는 세칸짜리 아파트 제공 등을 전제로 러브콜을 보내왔다. 당시 아파트도 아닌 기숙사 식 건물에서 생활하고 있던 김의진에게는 파격적인
제안이기도 했지만 <사대부는 자기를 알아주는 이를 위해 목숨도 바친다(士为知己者死)>고 자신의 노력과 능력을 알아주고 중용해주는 이
기회를 포기할 수 없었다. 심사숙고한 끝에 김의진은 스카웃 제안을 받아들이고 안락한 번역국 생활을 접고 힘들지만 성취감을 만끽할 수 있는 젊은
시장인 여행업계에 본격적으로 뛰어들며 뒤이어 중국여행업계 한국관광객 유치시장을 주름잡기에 이른다. 그리고 보다 더 크고 자유로운 무대를 갈망해온
김의진은 90년에 말에 이르러서 개인사업체 성격의 북진국제여행사 한국부를 설립하고 거침없는 행보를 이어왔다.
인생의 전성기
자신의 자리에서 최선을 다하며 열정을 불태우는 김의진 회장의 전성기는 언제일까? 혹 아직 오지 않은 건 아닐까 하는 질문에 그는
단도직입적으로 이미 지났다고 답했다. 무서운게 없었던 20대를 지나 정열적으로 일하고 창업하던30대, 어느 때보다도 책임감을 느끼며 소신있게
행동해 왔던 40대 그리고 마음의 여유를 갖고 날로 성숙된 자신을 발견하는 50대를 되짚어보면서 김의진 회장은 단순히 사업적으로만 보면 여행사에
몸담고 있을 3,40대가 제일 보람있고 스스로가 멋있게 느껴지는 전성기였다고 한다. 이 시기에 추진했던 장가계 관광코스 개발을 예로 들면서
김의진 회장은 잠시 추억에 젖어본다. 당시 장가계 시장(市長)은 1년에 관광객 3천명만 보내주면 명예 시민권을 주겠다고 약속했다. 그런데 첫해에
2만명을 보냈고 가장 많을 때는 이 숫자가 16만명을 웃돌았다고 한다. 거기에 한글 간판 등 많은 아이디어들도 김의진 회장의 생각에서 비롯된
것이다. 김의진 회장의 말처럼 그 시기는 씨앗을 뿌리면 금방이라도 무성해지는 느낌이었다고 한다. 장가계 뿐만 아니라 김의진 회장은 또 당시
관광코스가 북경, 서안, 계림 등 도시에만 국한되어 있던 국면을 타파하고 과감하게 해남도, 절강, 운남 등 지역으로 확장해 갔다. 인생의 격차는
30대에 이루어진다는 말이 실감나는 대목이었다. 허나 복합적, 종합적으로 고려했을 때 좀 더 뜻있게 살아온 40대후반 50대 초반이 인생의
전성기였던 것 같다고 김의진 회장은 덧붙였다.
김의진 회장을 보면서 성공한 사람들은 사고와 행동이 일반인들과는 확연히 다름을 느꼈다. 또한 참 "촉"이 좋고 트렌드의 "맥"을 잘
짚는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다면 한 분야도 제대로 하기 힘든 일을 지치지 않고 성공적으로 이어올 수 있는 비결은 무엇일까? 돌아온
대답은 책임감이었다. 그는 8살에 아버지를 여의고 4형제에 어머니, 할머니까지 여섯 식솔이 살아가면서 많은 고초를 겪었다. 비빌 언덕, 도와줄
사람이 없었기에 김의진 회장은 성공하자면 그리고 세상의 인정을 받자면 반드시 각고의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고 스스로 다짐했고 매사에 최선을 다하는
습관을 뼛속까지 새겼다. 될성 부를 나무 떡잎부터 알아본다더니 김의진은 소학교 때부터 늘 간부직을 맡아왔다. 그러다가 제일 방황하기 쉬운
사춘기에는 가족을 따라 농촌에 내려가 3년간 생활했었다고 한다. 어쩌면 그 3년의 시간이 김의진의 인생의 터닝 포인트가 됐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왜냐 하면 어지러웠던 그 당시 고향 화룡 다른 동년배들은 싸움꾼에 술군으로 바뀌어져 있었고 시골피난 덕분에 그는 질풍노도의 사춘기를
안전하고 무난하게 넘겼기 때문이다.
문화인 출신의 친화력, 격의 없이 사람들과 소통하는 모습이 김의진 회장에게서 느껴진 또 하나의 남다른 모습이었다. 김의진 회장은
최근 연간에 들어와서 아량이 넓다는 소리를 자주 듣지만 사실은 지금까지 너무 엄숙하고 칭찬에 인색한 편이였다고 한다. 하지만 지금은 의식적으로
칭찬을 많이 하려 노력하며 또 칭찬을 습관화하니 세상이 아름답게 보인다고 한다. 그야말로 '생각을 바꾸면 세상이 달라진다'는 말이 실감난다.
김의진 회장은 나름대로의 성취와 즐거움을 느끼며 이젠 일밖에 모르던 시기를 지나 가치를 우선하는 삶, 거칠 것 없이 자유로운 생활, 또 집사람과
여행을 즐기면서 보다 건강한 삶, 기존의 기부와는 다른 좀 더 계획적인 나눔을 즐기는 삶을 살고 싶다고 한다.
김의진 회장
퇴임을 앞두고
무에서 유를 창조하고 짧은 시간 안에 성숙되고 이젠 자타가 공인하는 리더 단체로 성장한 북경조선족기업가협회를 지켜보며 김의진은 이젠
마음놓고 회장직을 내려놓을 수 있게 됐다고 한다. 협회 약관에 의하면 협회장 1회 임기는 3년이며 연임할 수 있다. 여러 회원들이 협회를 위해
연임해 달라고 요청, 만류했지만 현실에 안주하기보다는 훌륭한 후임을 적극 발굴,추천하여 새로운 장을 이루어가는 문화를 초대회장부터 실천하는 것이
필요하며 또 항상 '물은 흘러야 하고 사람은 바뀌어야 한다'며 이제는 보다 더 젊고 새로운 생각을 가진 적임자가 협회를 이끌어 가는 것이 협회
발전에도 더 이롭다고 말한다.
명성과 이미 이룬 성과에 연연하지 않는 김의진회장의 자세도 보기좋았지만 그동안 튼튼하게 쌓아올린 협회 조직, 형성된 리더그룹,
건강한 조직문화에 대한 자신감이 비친 선택임을 엿볼 수 있었다.
외형과 내실의 조화로운 발전 속에 멈추지 않는 북경조선족기업가협회의 건실한 내일이 기대된다.
(글: CRI 한창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