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체성이 확장성이다!
뉴스로=소곤이 칼럼니스트
난 아직 누구한테 투표할지 정하지 않았다는 전제하에서 이 글을 쓴다.
문재인은 5년 전 대통령이 될 수 있었다. ‘댓글공작원’을 비롯한 국가기관의 파울플레이와 광범위한 부정선거의 정황 등 공정한 기회가 보장됐다면 그는 박근혜 대신 청와대 주인이 되어 퇴임 마지막 해를 즐기고 있었을 것이다.
우리 국민들은 ‘박근혜최순실 게이트’라는 국정대농단의 충격도 받지 않았을테고 역사상 첫 대통령 파면의 비극을 겪지도 않았을 것이다. 국민의 불행이자 문재인의 불행이다.
하지만 난 정권교체의 실패가 문재인과 그를 둘러싼 세력의 욕심에서 비롯됐다고 생각한다. 5년전 안철수와 단일화 힘겨루기를 할 때 그를 밀어주고 차기를 기약(期約)했다면 오늘날 민주세력의 집권연장까지 99% 가능했다고 믿고 있다.
5년전 안철수의 힘과 이미지는 대단했다. 그는 현실정치의 때도 묻지 않았고 압도적인 지지속에 서울시장이 유력했지만 불과 5%의 지지를 받는 시민운동가 박원순에게 양보하는 아름다운 모습을 보였다.
문재인의 비토세력은 그때도 적지 않았다. 모든 여론조사에서 선두를 달렸던 안철수를 어거지로 주저앉힐게 아니라 깨끗한 새 정치인을 후보로 옹립하고 선대위원장이 되었다면 댓글원 할애비가 난리부르스를 춰도 부패세력의 정권연장은 불가능했을 것이다.
양보를 통한 대인배 이미지로 중도보수세력의 반감을 씻어버리고 ‘초보대통령’ 안철수의 곁에서 책임 총리로서 권력의 상당부분도 행사 할 수 있었다. 그리고 19대 대선에서 ‘준비된 후보’로 정권 재창출도 가능했을 것이다. 문재인 지지자들은 단일화에 환호했지만 안철수 지지자들이 입은 마음의 상처를 미처 헤아리지 못했다.
그는 가까운 역사에서도 교훈을 찾을 수 있었다. 1987년 대선에 야당후보 김영삼 김대중과, 여당후보 노태우가 나왔을 때 YS와 DJ가 단일화만 했다면 민주정권의 탄생은 10년 일찍 이뤄졌을 것이다. DJ는 1971년 박정희가 영구 총통시대를 열기전 마지막 직선당시 야당 경선에서 YS에게 큰 빚을 진 일이 있다. 40대 기수론을 선도한 YS는 1차 경선에서 1위를 차지했지만 과반수미달로 2차경선을 벌였고 3위 이철승의 반란표덕분에 DJ가 역전극에 성공했다. YS는 뼈아픈 패배에 밤새 통음(痛飮)하며 괴로워했지만 “김대중 씨의 승리는 우리들의 승리이며 곧 나의 승리다. 나는 가벼운 마음으로 김대중 씨를 앞세우고 전국을 누빌 것을 약속한다”고 선언하고 DJ의 당선을 위해 끝까지 최선을 다했다.
전두환정권 초기 DJ가 미국에서 망명(?) 생활을 할 때 YS는 가택연금속에 목숨을 건 단식으로 꺼져가는 민주주의의 불씨를 되살렸다. 훗날 DJ가 돌아왔을때는 이미 YS가 민주산악회 활동으로 독재세력과 한판 승부를 할 수 있도록 기초를 만들어 놓은 상황이었다.
난 그때 굳이 순서를 따지자면 YS가 단일후보가 되는게 맞다고 생각했다. 당시 진보 후보였던 백기완 선생이 막판 단일화를 위해 양 후보를 접촉, 타협안을 제시했을 때 YS는 수용했지만 DJ는 거부했다. 결국 백기완선생은 후보를 사퇴하며 YS에 대한 비판적 지지를 선언했다는 사실을 사람들은 거의 잊고 있다.
노태우가 불과 36%의 득표로 대통령이 되버린데 DJ의 책임이 중하다고 생각하는 것은 그러한 배경 때문이다. 더욱 통탄할 일은 양자의 분열이 박정희가 조장한 영호남의 지역감정을 더욱 첨예하게 만들었다는 사실이다. 두 사람이 상대 지역에서 유세할 때 날아오던 돌팔매들을 기억하는가.
대부분의 진보와 DJ지지자들에게 불편하게 들리겠지만 당시 하나회의 견고한 입지를 고려하면 DJ 집권시 기득권층의 반발과 보복에 대한 두려움, 이를 빙자(憑藉)해 군사반란의 개연성이 있었다는 점에서 YS는 상대적으로 안전한 카드였다.
결국 YS는 ‘3당야합’으로 여당의 대통령이 되었지만 아이로니컬하게도 독재와 반민주의 성채를 무너뜨린 ‘트로이의 목마’같은 역할을 했다. 금융실명제로 지하경제를 지상으로 끌어냈고 군부의 암적 존재 하나회를 해체했으며 전두환 노태우까지 법정에 세워 역사바로세우기를 하는 등 일정부분 개혁에 성공했다. YS의 정지작업과 완충효과로 DJ는 오랜 세월 군부와 수구 기득권층이 덧씌운 좌파 이데올로기에서 탈출할 수 있었다.
역사는 되돌릴 수는 없지만 미래를 위한 교훈을 던진다. 보수후보가 지리멸렬(支離滅裂)한 이번 대선은 야당후보인 문재인과 안철수의 양자대결이라는 보기드문 구도로 진행되고 있다. 그리고 시간이 갈수록 안철수는 보수후보화 되어가고 문재인 또한 중도‧보수 표심을 위해 오른쪽으로 슬그머니 이동하고 있다.
따지고보면 문재인은 경선 구도부터 불운했다. 경쟁자 안희정, 이재명, 최성 모두가 지자체장을 맡고 있어 경선 후 현직을 포기해야 유세를 도울 수 있기 때문이다. 세 사람은 처음부터 이기면 좋고 안되더라도 현직 핑계를 대고 돕지 않아도 되는 이기적 상황이었다.문재인은 경선에서 이들과 치받으며 상처속의 승리를 거뒀지만 도움받는거라곤 넷이서 화합의 맥주를 들이키는 쇼이벤트 외엔 할 게 없었다.
안‧이‧최가 ‘나 아닌 우리의 정권교체’라는 진정성이 있었다면 이미 대선후보로 출마할 때 현직 사퇴를 함으로써 ‘우리 당 후보의 승리를 위해 백의종군(白衣從軍) 하겠다’는 자세를 보여줬어야 한다. 대통령이라는 큰 일을 목표삼은 사람이 어찌 작은 자리에 연연하며, ‘내로남불’의 오해를 살 필요가 있냐는거다. 깜도 안되는 자유(한국)당 후보를 거론하고 싶지 않지만 홍준표가 경남지사 보궐선거를 막기위해 웃지못할 꼼수를 부린거나 민주당 세 후보가 잠시 외출하듯 현직을 유지한거나 오십보백보(五十步百步)인 이유다.
대선을 20여일 앞두고 문재인 캠프에서 안희정에게 다급하게 SOS를 치고 있다는 보도가 나왔다. 중도‧보수의 안철수 지지현상이 예사롭지 않아서다. 협치와 대연정으로 야당지지자들에겐 혹독한 비판을 받았지만 수구‧기득권그룹의 환영을 받았던 안희정이 도와주면 안철수로 이동한 표심을 돌려세울 수 있다고 계산했기때문이리라. 안희정은 문재인을 돕자니 충남도민이 뽑아준 지사직을 버리는 무책임한 모습이 될 것 같아 고심하고 있다는 말도 나온다. 과연 그럴까.
내가 안희정이라면, 당연히 지사직을 그만두고 유세를 도울 것이다. 그게 차기에 득이 되기 때문이다. 만일 문재인이 승리하면 안희정은 일등공신이 된다. 일약 차기 대표주자로 올라서고 대통령 못지않은 실세가 될 수 있다. 문재인정부에서 요직을 차지하는 것은 물론, 당권 경쟁 등 모든 조건에서 유리한 입장이 되는데 고작 1년 남은 충남지사직에 연연할 이유가 있나? “불감청(不敢請)이지만 고소원(固所願)”이라는 한자성어가 딱 맞는 상황이다.
<OBS 화면 캡처>
자 그럼 문재인 입장에서 생각해보자. 내가 문재인이라면 안희정에 러브콜을 하지 않겠다. 득보다 실이 많기때문이다. 첫째, 보수는 안희정이 돕는다고 문재인에게 가지 않는다. 애당초 야당에 대한 호감이 거의 없는 그룹이다. 그들이 안철수를 지지하는 것은 보수후보로 빙의(憑依) 됐다고 믿는 덕분이다. 둘째, 반기문 지지자중 대안으로 안희정을 선택했다가 안철수로 이동한 중도층도 마찬가지다. 가령 당신이 지지하던 후보가 어느날 갑자기 경쟁 후보를 찍어달라고 호소하면 그대로 따르겠는가? 극소수 호응하는 이도 있겠지만 조직에 속한 사람이 아니고는 대부분 무시한다. 다른 후보를 뽑거나 투표 자체에 대한 흥미를 잃게 된다. 미국 대선에서 샌더스가 힐러리 유세를 도왔지만 샌더스 지지자들이 상당수 거부한 결과를 떠올려보라.
문재인은 ‘안희정카드’로 돌아올 중도‧보수층이 기대보다 적은 반면, 자신을 지지하던 진보층을 실망시킬 가능성이 더 크다. 안그래도 사드배치에 대해 조건부 찬성 등 점점 자신의 정체성을 훼손하고 있는 문재인이다. 산토끼를 잡으려다 집토끼만 잃을 위험성이 있다. 요행히 승리하더라도 안희정에 대한 배려와 보장이 대통령으로서 통치에 걸림돌이 될 수도 있다. 어쨌든 신세는 갚아야 한다.
문재인은 오히려 정통 야당후보로서 선명성(鮮明性)을 강화하는 것이 승리의 가능성이 높아진다고 생각한다. 안희정 영입은 ‘안철수 따라하기’ 정도로 폄하될 것이고 효과 또한 제한적이다. 지지율의 추이로 볼때 안희정 지지자 상당수는 충성도보다 차선으로 선택한 사람이 많다. 그래서 안철수로 쉽게 선회한 것이다.
안철수도 마찬가지다. 중도‧보수 표심을 틀어쥐게 될 것이라고 기대하지만 이도저도 아닌 두루뭉술 행보는 종내는 지지율 정체를 불러 일으킬 것이다. 그로써 승리의 상수(常數)는 야당의 정체성을 유지하고, ‘대안 야당’으로서 차별화된 모습을 보이는 것 외엔 없다. 그러나 현재로선 그럴 가능성이 없어 보인다. 안캠프나 문캠프나 공히 “정체성(正體性)이 확장성(擴張性)”이라는 것을 간과하고 있다.
결국 이번 대선은 자충수(自充手)를 덜 범하는 후보가 대통령이 되는 ‘본전치기 전쟁’이 될 것 같다. 둘 중 누가 되어도 외견상 정권교체이지만 실은 변형된 정권의 연장이라는, 봄은 왔으되 봄이 아닌 춘래불사춘(春來不似春)의 망연함에 70년 적폐청산 또한 공염불이 될까 아찔해진다.
* ‘글로벌웹진’ 뉴스로 칼럼 ‘소곤이의 세상뒷담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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