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의 순례 성지는 예루살렘, 로마, 스페인의 성 야고보의 무덤이 있는 도시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이다. 그중에서도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는 길이 아름다워 트레킹 코스로 인기가 높아 많은 사람들이 찾는 곳이다.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로 떠나는 중요 순례 출발지는 파리, 투르 (Tours), 베즐레 (Vézelay), 르 퓌 (Le Puy), 아를르 (Arles)이다. 투르는 ‘골Gaule족의 성자’로 추앙받는 성 마르탕 (st Martin)의 도시로, 베즐레는 마리 마들렌느 (Marie Madeleine: 마리아 막달레나)의 유해가 모셔진 도시로, 르 퓌는 5세기에 성모 마리아가 발현한 도시로, 아를르는 남프랑스의 유서 깊은 종교적 도시이기 때문이다. 이들 도시는 순례자를 따라 성당, 수도원, 병원, 숙박업소들이 들어서게 되며 도시는 번성했다.
순례 출발지 중의 한 곳인 베즐레는 파리에서 동남쪽으로 200Km 떨어진 작은 마을로 오세르와 가깝다.
마을은 언덕 위의 생트 마리 마리엔 성당을 중심으로 세월의 바람에 곱게 마모된 붉은색의 지붕과 돌담길이 중세 느낌 가득한 마을로 역사적인 가치와 아름다움을 인정받아 성당과 언덕이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되어 있고, 내셔날 지오그래피는 세계에서 전통보존이 잘 보존된 곳으로 선정했다. 마을의 주민은 4백여 명이지만 이곳을 찾는 관광객은 해마다 백만이 넘을 정도로 유명하고, ‘장크리스토프’로 1915년에 노벨문학상을 받은 로맹 롤랑이 말년에 살다 세상을 떠난 집도 있다.
생트 마리 마리엔 성당의 역사
생트 마리 마들렌 대성당 (La basilique Sainte-Marie-Madeleine)은 꽃으로 아름답게 장식한 고풍스런 집들을 지나 언덕 꼭대기에 자리해 베즐레 주변의 풍경을 바라보기 가장 좋은 곳이다.
지금의 성당이 들어서기 전 이곳은 9세기에는 베네딕트 수도원이었다. 막달라 마리아가 말년을 프로방스 지방에서 은둔하며 보내다 세상을 떠난 후, 한 수도사가 그녀의 유골을 이곳에 안치하며 순례지의 성지가 되며 순례자들이 찾기 시작하자 1096년 현재의 대성당을 세운 것이다.
성당은 큰 규모의 거대한 공사로 많은 비용이 들었고, 주민들은 고된 노동과 가난으로 폭동을 일으키며 수도원장을 죽이는 일까지 일어나며 불행하게 들어섰고, 1120년에는 스페인의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로 순례를 떠나려는 순례자들이 출발 전날 성당 본당에서 잠을 자다 화재가 발생해 1000명이 사망했다. 1146년 2차 십자군을 지지하는 성 베르나르의 설교가 있었고, 1190년에 영국왕 리차드 1세와 프랑스의 필립 2세가 3차 십자군 원정을 떠나기 전에 3개월을 머물기도 했다. 1295년에는 가짜 유골이라는 교황의 판정이 내려지면서 성당의 명성은 몰락하게 되면서 1만명의 주민이 살던 도시는 급격하게 쇠퇴했다.
그러나 성당의 아름다움은 다시 마을을 관광지로 살리고 있고, 첼로의 거장 므스티슬라프 로스트로포비치(1927~2007)가 60세 되던 1991년에 이곳에서 바흐의 ‘무반주 첼로모음곡’을 연주해 음반에 담았다. 바흐의 '무반주 첼로모음곡'은 140년 만에 1889년 스페인 바르셀로나의 헌책방에서 13세의 파블로 카잘스가 찾아낸 곡이다.
로스트로포비치는 기적적으로 세상에 드러낸 바흐의 첼로 협주곡을 자신의 음악 인생의 완성을 위한 작품으로 고르고, 음향을 갖춘 완벽한 장소를 찾다가 어렵게 생트 마리 마리엔 성당을 발견했고, 이곳에서 녹음을 하며 성당의 새로운 역사를 남기게 된다..
성당은 로마네스크 양식의 걸작으로 교회당 중앙의 신랑은 추력으로 살짝 뒤틀려 아케이드의 리듬을 강조하며, 아케이드에는 말굽아치들이 늘어서있고, 아치를 받치는 기둥머리에는 성서와 성인들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성당을 가장 돋보이게 하는 것은 현관의 조각품들로, 서유럽 로마네스크 미술의 기념비적인 예술품으로 꼽힌다.
베즐레를 방문한 후에는 잊지 말고 생 페르 수 베즐레(Saint-Père sous Vézelay)를 둘러보아야 한다. 이곳은 베즐레에서 약 2km 떨어진 곳에 위치한 작은 마을로 노트르담 성당이 아주 유명하다. 13세기에 지어진 고딕양식의 성당으로 성당 자체가 섬세한 예술품이다.
위인의 삶을 조명한 로맹 롤랑
로맹 롤랑 (Romain Rolland 1866.1.29 ~ 1944.12.30)은 소설가, 극작가, 평론가로 ‘장 크리스토프’로 1915년 노벨 문학상을 수상하였다. 평화운동에 힘쓰고, 국제주의 입장에서 애국주의를 비판하던 작가로 부르고뉴 클람시에서 태어나 자라다, 1888년 파리로 이주해 고등사범학교에서 역사학과 음악사를 공부했다. 이 시절에 롤랑은 톨스토이에게 인생과 예술에 대한 고민을 편지에 담아 보냈고, 톨스토이는 예술가로서의 진정한 조건은 인류에 대한 사랑이라고 가르침을 주었고, 이는 롤랑의 삶에 지표가 된다. 1889년에서 1891년에는 로마의 프랑스 유학원에서 유학하고 귀국 후에 결혼하였지만 8년 만에 이혼한다.
학업을 끝낸 후에 롤랑은 고등사범학교 예술사 교수가 되었고, 이어 파리대학교 음악사 교수로 재작하며 희곡과 ‘베토벤의 생애’, ‘미켈란젤로의 생애’, ‘톨스토이의 생애’ 등의 전기를 썼고, 자신이 참여한 창간지 ‘반월 수첩’에 1904년부터 1912년 동안 ‘장 크리스토프 (Jean Christophe)’를 연재했다. 후에 ‘장 크리스토프’는 총 10권으로 출판되었다. ‘장 크리스토프’는 베토벤과 롤랑 자신의 정신을 담은 독일 태생의 천재 음악가 장 크리스토프의 생애를 감동적으로 표현한 훌륭한 음악소설로 롤랑은 세계적인 작가로 인정받았고, 1915년 이 작품으로 노벨문학상을 받게 된다.
제 1, 2차 세계대전 시에는 애국주의가 전쟁을 일으킨다며 국제주의를 지향하며 평화운동에 힘썼고, 1944년 베즐레에 머물며 작품 활동을 하다 세상을 떠났다.
로맹 롤랑은 톨스토이의 영향을 받아 인도주의적 작품에 이어, ‘영웅이란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해낸 사람이다. 범인은 할 수 있는 일을 하지 않고 할 수 없는 일만을 바라고 있다.’라며 위대한 인간을 담은 위인전을 통해 물질주의. 이기주의 등 세기말적인 문명과 도덕을 비판했다.
롤랑이 말년에 살던 베즐레 집은 현재는 현대미술관으로 개관 중으로, 제보 박물관 혹은 로망 롤랑의 집(Le musée Zervos , maison Romain-Rolland)으로 불린다. 박물관은 크리스티앙 제보(Christian Zervos)의 수집품들로 20세기 작품들이다. 피카소, 자코메티, 칸디스키, 미로 등의 20세기 작품들과 롤랑의 유품과 문헌들도 있다.
베즐레를 뒤로 하고 마을을 벗어날 때는 롤랑의 “인생은 왕복차표를 발행하지는 않는다. 한번 여행을 떠나면 다시는 돌아오지 않는다.”가 들리는 듯하다.
MUSÉE ZERVOS - MAISON ROMAIN-ROLLAND
주소: Rue Saint-Étienne 89450 Vézelay
개관시간 : 10시-18시(화요일 휴관)
【한위클리 / 조미진 chomijin@hotma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