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희정승도 울고갈 청렴
뉴스로=이계선 작가
1979년 11월 11일 정부는 10대 대통령선거 일정을 발표했다.
“12월 6일 장충체육관에서 10대 대통령 선거를 실시합니다. 선거인단은 통일주최국민회의 대의원 2560명입니다. 당선자는 12월 21일 10대 대통령으로 취임합니다. 그러나 박정희대통령이 남기고간 잔여임기 5년을 다 채우지 않고 빠른 시일 안에 민주헌법으로 개헌을 하게 될것입니다. 그리고 민주헌법으로 당선된 직선제 대통령에게 정권을 이양하고 물러나게 됩니다”
일명 체육관선거다. 당선돼 봤자 과도정부 역활만 하게 된다. 과도정부기간을 군부는 2년으로 잡았다. 민간정치인들은 1년 이하로 당겨서 계산했다. 누가 입후보 할 것인가? 그러잖아도 10.26이후 차기 대통령감으로 자연스레 3김이 부상했다.
그러나 민주시대의 대권을 노리는 3김이 체육관선거에 출마할리가 없다. 천상 정부쪽에서 나오게 마련이다.
이를 논의하기 위해서 국무회의를 열었다. 모두가 꿀 먹은 벙어리들이었다. 성격이 괄괄한 신현확총리가 참다못하여 일어섰다.
“어차피 1년짜리 과도정부 관리직대통령입니다. 야심있는 정치인들이 나올 리가 없어요. 덕망있고 야심이 없으신 최규하대행께서 나오셔서 민주화로 가는 교통정리를 해주셨으면 합니다”
모두가 좋아했다. 최규하는 사양했다. 두번 세번 강청할수록 강하게 사양했다.
“아이구, 그런 말씀 마세요. 힘 있고 강단 있는 분이 나와서 춘추전국처럼 시끄럽게 얽혀 있고 말썽 많은 정국을 풀어나가야 합니다. 나 같은 사람은 어림도 없어요. 박대통령같이 군부를 좌지우지하는 강력한분도 쓰러지는 판국에 나 같이 아무런 세력도 없는 사람이 어떻게 난국을 감당합니까? 난 죽어도 못해요. 차라리 영남출신이요 강력한 리더십이 있는 신현확총리를 대통령후보로 내세우자 구요“
앞장섰던 신현확만 난처하게 됐다. 신현확이 분연히 다짐했다.
“좋습니다. 그럼 제가 하겠습니다. 제가 난국을 풀어나가는데 앞장서겠다는 겁니다.
최규하권한께서는 그저 대통령자리에 앉아만 계셔주시면 됩니다”
더 이상 고사할수 없게 됐다. 그래서 정부쪽에서는 최규하가 대통령후보로 나서게 됐다. 그러자 그동안 아무도 관심을 안 가졌던 체육관대통령후보 자리가 갑자기 스포트라이트를 받기 시작 했다.
<이하 유투브 자료화면>
민주공화당에서 강경파들이 목소리를 냈다.
“공화당 정권이 망했지만 국회의원은 우리공화당이 붕당인 유정회를 합쳐 절대적입니다. 선거인단인 통일주체대의원들도 모두 우리소속이구요. 우리측에서 후보를 내세우기만하면 최규하를 제치고 당선 되는 건 문제가 아닙니다. 김종필총재를 후보로 옹립해야합니다. 개정헌법후의 민선대통령을 생각하겠지만 우선 체육관대통령이 되는 것도 나쁘지는 않습니다. 정국이 불투명해요. 군부가 어찌 나올지 몰라요. 벌써부터 정승화참모총장은 군부 쿠데타 설을 퍼뜨리고 다니고 있어요. ‘3김은 안된다. 김영삼은 무능하다. 김대중은 과격하다. 김종필은 부패했다. 그래도 삼김이 정권을 잡으면 우리군은 쿠데타를 일으켜서라고 막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정권을 잡으면 군대도 별수없이 우리를 따를것입니다. 공화당의 뿌리가 군부이기 때문입니다. 과도기를 우리페이스대로 움직이면 정국을 얼마든지 유리하게 끌고 나갈수가 있습니다. 그런 후에 민선대통령선거에 나와 당선하는 겁니다. 국민들이 싫어하는 10월 유신 국민투표때도 90% 지지를 받아냈지 않았습니까? 강하게 압박하면 잘 따르는 게 국민들입니다. 우리공화당의 뿌리는 군부이기에 괜찮은 시나리오예요”
공화당에서는 김종필을 10대 대통령후보로 내보내기로 결정했다. 허를 찌른 일격에 난리가 났다. 야당이 반대했다. 정부도 반대했다. 군도 반대했다. 정부측에서 구자춘내무장관이 찾아와 따졌다.
“법적으로야 누구나 나올수 있어요. 그러나 김종필총재가 나오는건 죽은 박정희각하를 욕보이는 일입니다. 나오려면 기다렸다가 개헌후의 직선제대통령선거에 나오시오“
그래도 꿈쩍 않자 신현확총리가 찾아왔다.
“당신들은 염치가 있소 없소? 당 총재인 박대통령이 참혹하게 시해 당했어요. 그렇다면 슬퍼하고 근신해야지요. 애비죽고 49제도 끝나지 않았는데 애비의 후첩을 빼앗겠다는 후레자식같은 처사입니다. 후보를 철회하시오. 그래도 나오겠다면 난 정부권력을 총동원하여 이를 막아버리겠소“
할 테면 해보라지. 정부권력이라니? 세무조사를 하겠다는 건가? 김종필도 완강했다.
“남자가 칼을 빼들었으면 두부라도 잘라야지요. 그대로 칼집에 넣을수야 없지 않습니까?”
그러자 이번에는 정승화참모총장이 칼을 빼들고 달려왔다. 계엄사령관 정승화대장의 칼날은 중령으로 예편한 김종필의 칼날보다 날카롭고 무서웠다.
“공화당에서 박정희 총재 대신으로 김종필총재를 세웠으니 똑같은 공화당 총재라고 생각 마시오. 박대통령이 없는 공화당은 토끼도 잡을수 없는 이빨 빠진 호랑이에 불과하오. 박대통령이 휘두르던 칼은 지금 계엄사령관인 내가 갖고 있소. 내 칼을 안 맞으려면 조심하시오“
계엄사령관의 시퍼런 협박성 경고를 듣고 결국 김종필은 출마를 포기한다. 이렇게 해서 최규하가 단독후보로 나섰다. 12월 6일 투표결과.
“대통령선거 투표결과를 발표 하겠습니다. 통일주체국민회의 대의원 총 2560명중 참석 2549명. 그중 최규하후보가 2465표를 얻어 10대 대통령으로 당선이 확정됐습니다”
12월 21일에 10대 대통령으로 취임한 최규하대통령. 그러나 최규하는 전두환신군부에 시달리다가 국권수호에 실패하고 8개월 만에 쫓겨난다. 최규하는 어떤 사람인가?
1919년 강원도 원주에서 태어난 최규하는 어려서 사서삼경을 공부한 신동이었다. 경기고보를 거쳐 일본에 유학하여 영문학을 전공했다. 서울대교수로 지내다 관계(官界)에 부름을 받는다. 그때가 1945년이다. 영어실력과 성실성을 인정받아 이승만정권에서 박정희정권에 이르기 까지 승승장구한다. 주일공사 외무부장관 국무총리를 거쳐 대통령직에 까지 오른 것이다. 일도양단(一刀兩斷)으로 난세를 해쳐나가는 카리스마는 없다. 청렴결백한 원칙주의자다. 8개월간 대통령 재직시절 그는 전두환에게 계속 시달렸다. 그러나 후일 전두환이 코너에 몰려 재판을 받게 됐을 때 보복성 증언을 거부하고 침묵으로 일관했다. 무덤에 갈 때까지 입을 열지 않은 걸 보면 대단한 내공이다. 대통령직에서 물러난 생활은 절약검소였다. 낡은 선풍기 한 대로 여름을 견뎌냈다. 40년된 에어컨이 있었지만 전기를 절약하느라 꺼놓고 있었다. 구두 한 켤레를 8년 동안 신고 다녔다. 구두창이 떨어지거나 가죽이 찢어지면 손수 고쳐 신었다. 말년에는 생활고로 시달렸다.
그를 괴롭혀댔던 전두환과는 아주 대조적이다. 전두환은 재직시절 수조원에 달하는 비자금을 거둬들였다. 대통령을 그만둘 때는 수천억을 자녀들에게 숨겨놓는다. 부정축재자로 몰려 2천억을 추징당하게 되자 몰래 자녀들 앞으로 빼 돌려놓은 것이다. 그리고 자기는 29만원밖에 없노라고 오리발을 내밀었다. 배를 쨀 터면 째보라는 전두환식 배짱이다. 그래놓고 옛날 부하들을 수백명식 거느리고 수천만원을 뿌려가면서 호화골프장을 들락거린다. 얼굴만 유들유들 한 게 아니다. 철판을 깔았다. 최규하와 전두한은 둘다 체육관대통령출신들이지만 이렇게 달랐다.
최규하는 황희정승에 비교할만하다. 황희는 여러 임금을 섬기면서 19년 동안 영의정을 지낸 인물이다. 영의정은 국무총리다. 그러나 그는 정부가 주는 녹봉을 모두 거절하고 가난하게 살았다. 지붕이 뚫어진 초가삼간에서 방안으로 비가 새면 우산으로 비를 바쳐가며 살았다. 최규하도 황희에 지지 않는다. 이승만정부에서 박정희정권을 거쳐 최규하정부까지 34년을 고급공무원으로 지냈다. 그러나 공직 은퇴후에 그가 소유한건 선풍기와 낡은 에어컨 한 대뿐이었다.
<계속>
* '김재규 복권소설'의 소설같은 사연
http://www.newsroh.com/bbs/board.php?bo_table=lks&wr_id=3
* 등촌이계선목사는 광야신인문학상 단편소설로 등단했다. 독자들은 등촌을 영혼의 샘물을 퍼 올리는 향토문학가라고 부른다. 저서로 ‘멀고먼 알라바마’ ‘대형교회가 망해야 한국교회가 산다’ ‘예수쟁이 김삿갓’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