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아시아 고려인들속에서 그들과 함께 살아온 지 벌써 23년째인 필자가 지금도 잊지 않고 있는 작은 ‘기억’이 있다. 바로 ‘한식’과 관련된 추억인데, 그러니까 96년 봄의 일이다.
필자는 당시 근무처인 대학 외 고려일보 기자로서도 일을 하고 있었다. 그 때 고려일보는 한글판 신문 제작인력이 부족하여 절반의 지면을 노문판으로 제작하고 있었지만 그나마도 여의치 않아서 대학신문기자 경력으로 필자가 한글판 기자로 특채되어 근무하게 되었다.
그러던 4월 초 어느 날, 따뜻한 햇살이 좋았던 그 날 지금의 질료늬 바자르 근처에 있던 고려일보사의 편집실이 썰렁한 것이 아닌가? 취재와 기사작성, 교정 작업 등으로 마땅히 분주히 돌아가야 할 편집실에 기자들이 보이지 않았다. 필자는 즉시, “오늘 무슨 일이 생겼냐? 왜 아무도 안보이는가? “ 라고 물었다. 편집실을 지키고 계시던 선배 기자 한 분은 “김선생은 오늘이 한식인 것 모르오? 한국에서는 한식날 산에 안가오? “라는 질문이 오히려 필자에게 되돌아왔다.
순간 과거 책에서 배웠던 한식이라는 명절에 대해 떠올리면서 “아~ 예, 제가 깜빡 잊었네요. 한국에서도 한식을 명절로 여기지만 설날, 추석만큼 큰 명절은 아닙니다’‘라고 얼버무렸다. 그러자 그 분은 “우리 고려인들은 한식날 부모나 형제들 산소에 성묘를 꼭 갑니다. 오늘 사무실에 출근하지 않은 기자들 중엔 저 멀리 우즈베키스탄으로 성묘간 기자도 있소”라고 하셨다.
한국에서 ‘바쁘다’는 핑계로 또는 ‘공부한다’는 핑계로 성묘를 면제받아온 필자에게는 ‘우즈베키스탄’ 이라는 이 단어가 작은 ‘충격’이어서 “성묘하러 비행기 타고 거기까지 가신단 말씀이세요?”라고 되물었던 기억이 난다. “구소련시절, 고려인들은 더 멀리도 성묘를 다녔지만 각각 독립국이 된 지금에는 항공료가 비싸서 과거처럼 다닐 수 없어 안타깝다”는 그 선배 기자는 덧붙여 말씀해주셨다.
원래 한국에서도 한식은 설, 단오, 추석과 함께 우리 민족의 4대 명절의 하나로 조상에게 제사를 지내고 성묘를 하는 풍습이 있었다. 그러나 우리는 설과 추석이 대표 명절로 남고 한식과 단오는 공휴일도 아닐 뿐더러 일상생활속에서 지켜지지 않는 풍습이 되어 버렸다.
사실, 고려시대에는 한식날 관리에게 성묘를 하도록 휴가를 주었을 뿐 아니라 이날만은 어떠한 죄수에게도 형을 집행하지 않도록 금지했다고 하고 조선시대에 들어와서는 한식을 더욱 중요하게 여겼는데, 조정에서 큰 잔치를 베풀고 봄놀이도 하여 이날을 즐겁게 지냈다고 한다
한식날에는 해수병에 좋다고 하여 진달래꽃을 따다 '진달래 술'을 마련해서 먹었고, 콩볶음을 해서 아이들에게 먹도록 했고. 또한 약밥, 쑥떡, 찬밥을 먹으면 일년 내내 병이 없다고 하여 봄내음 물씬 풍기는 쑥을 가지고 쑥떡, 쑥단자, 쑥탕 등도 즐겼다고 한다. 하지만 그 이후부터는 차츰 이런 관습은 사라지고 다만 성묘를 하는 날로서의 풍습만 끊이지 않고 이어져 내려왔다.
올해도 어김없이 며칠 뒤면 한식이다. 유난히 겨울이 끝자락이 길었던 올해는 한식과 함께 씨뿌리기를 해야 할 정도 봄이 늦게 찾아오고 있다. 이 땅에 사는 고려인들은 한식날 부모 산소를 다녀오는 풍습을 지금까지 유지해 왔듯이 올해도 내년에도 지켜나갈 것이다. 이들을 보면서 ‘바쁘다’는 핑계로 소홀히 했던 부모와 가족을 생각해 보고 혹시 떨어져 있다면 전화 한 통씩 돌려보았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