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리 그랑팔레 전시관에서 지난 3월 25일부터 7월 13일까지 진행되는 벨라스케스(Velázquez 1599-1660년)전은 프랑스에서 처음 개최되는 전시회로서 2015년 주요행사로 주목받는다. 일부 매거진들은 올해의 가장 중요한 전시회로 꼽았다.
프랑스에서 벨라스케스의 소장품은 거의 전무하다. 전시작품 중에는 카스트르 미술관 소장품 ‘사냥꾼 차림의 필립 4세(혹은 펠리페 4세)’가 유일하며, 동시대 다른 화가들 작품을 합쳐 3점에 불과하다. 나머지 모든 전시작품들은 마드리드, 런던, 로마, 비엔나, 시카고 등지에서 공수됐다.
스페인을 대표하는 거장 벨라스케스가 남긴 화폭은 약 120점으로 추정되며 해외나들이는 거의 없었던 편이다. 대부분을 마드리드 프라다 미술관이 소장하고 있으며, 타지로 대여해주지 않아 벨라스케스 작품을 감상하려면 마드리드까지 가야한다는 말이 나왔을 정도이다. 2015년 파리 이전의 국제전을 꼽자면 뉴욕에서 개최된 1989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프랑스의 ‘2015년 전시회’로 주목되는 벨라스케스전은 그랑팔레와 루브르 박물관이 공동주관하고, 비엔나 미술사박물관, 마드리드 프라다미술관의 협찬으로 실시되고 있다. 현재 벨라스케스 작품의 절반 가량인 51점이 전시되고 있는데, 이는 유럽 미술관들을 상대로 루브르 측의 끈질긴 ‘빅딜’ 덕분이라고 한다.
프라다 미술관의 소장품인 유명한 화폭 ‘시녀들’, ‘브레다의 항복’, ‘실 잣는 여자들’은 이번 파리나들이에 불참했으나, 그리스로마신화에 등장하는 신들의 불륜을 담은 ‘불카누스의 대장간(1630년)’ 등을 포함하여 작품다수가 그랑팔레에 전시되고 있다.
역시나 해외나들이가 없었던 로마 미술관 소장품 ‘교황 인노켄티우스 10세의 초상화’, 런던 내셔널갤러리 소장품 ‘거울속의 비너스’, 스페인 에스코리알 수도원 소장품 ‘요셉의 외투’ 등 다수의 걸작들이 파리에 총 집결됐다는 점에서 이번 전시회에 큰 의미를 부여한다.
스페인과 프랑스의 외교차원에서도 의미를 지니는 전시회이다. 지난 3월 24일 스페인국왕이 프랑스대통령과 동반하여 직접 개막테이프를 끊을 예정이었으나, 이 화려한 오프닝행사는 매스컴의 스포트라이트를 받지 못하고 갑작스레 취소됐다. 같은 날 스페인 바르셀로나를 출발하여 독일 뒤셀도르프로 향하던 에어버스 A320 여객기가 프랑스 산간지대에 추락하는 대참사가 발생했기 때문이다. 스페인 국왕부부는 6월 초 파리를 다시 방문하여 벨라스케스 전시회에 참석했다.
▶ 야심찬 궁중화가 벨라스케스
신분상승을 노렸던 벨라스케스가 스페인 전성시대의 국왕 필립 4세(1605-1665년)의 궁정화가로 발탁된 것은 24세 때이다. 당시 화가로서 최고 명예직이었던 궁정화가가 된 벨라스케스는 이후 필립 4세의 깊은 신임을 얻어 궁정실내장식 등 왕정살림을 평생 도맡았다. 이로 인해 그림제작에만 전념할 수 없어 남긴 화폭이 120여점에 불과한 것으로 간주된다.
1660년 필립 4세의 딸 마리-테레즈는 프랑스 ‘태양왕’ 루이 14세와 국경근처 바스크지방 해변휴양지 생장드뤼즈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이때 루이 14세의 나이 22세. 벨라스케스가 결혼피로연을 주관했는데, 결국 그는 과중한 업무로 건강이 악화되어 몇 개월 후 사망했다.
벨라스케스는 정물화, 역사화, 풍경화 등을 남겼지만 그의 주요임무는 왕가의 초상화를 그려내는 일이었다. 오늘날 우리가 사진사에게 증명사진을 찍어달라고 요구하듯, 당시 사회특권층은 화가에게 초상화를 주문했다. 화가는 주문자들의 기호와 취향에 맞게 화폭을 제작했다. 예술성보다는 주문자의 환심을 얻는 일이 더 중요했으며, 이를 위해 실물보다 훨씬 미화시킨 모습으로 화폭을 채워야했다.
벨라스케스도 처음에는 화가로서 제대로 대우를 받지 못한다고 불만을 품었다. 당시 궁정화가는 음악가, 문인과 같은 동등한 대열의 예술가로 인정받지 못했다. 국왕의 전속 이발사와 같은 수준의 급료를 받았다. 결국 벨라스케스는 이러한 한계를 뛰어넘고 자신만의 독보적인 예술세계를 구축하기에 이른 것이다.
▶ ‘화가 중에 화가’로 추대
벨라스케스는 왕과 왕족들의 초상화만을 그려냈던 것은 아니다. 궁중시녀들, 난쟁이, 광대 등 사회 각층의 인물들을 그려냈다. 당대 특권층에게 부여된 전용 문화였던 초상화 분야에서 사회의 하류층에게도 중요한 자리를 마련해줬던 것이다. 또한 화폭 배경에 추상적 기법과 예술적 영감을 자유롭게 가미했다는 점에서 이 분야에 혁신을 가져왔다는 평가이다.
특히 벨라스케스는 왕의 모습을 화폭에 담을 때 모델과 화가로서 객관적인 간격을 유지하는 놀라운 초연함을 지녔다. 사회하류층 난쟁이나 광대를 화폭에 담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화가 벨라스케스는 자기 자신과도 철저하게 객관적인 거리를 유지했는데 이러한 초연적인 능력이 훗날 후배 화가나 평론가들에게 교감을 안겨줬다.
오늘날 우리는 17세기 스페인 국왕 필립 4세의 모습을 벨라스케스의 화폭을 통해서 엿보고 있다. 창백한 얼굴에 남달리 비범성이 흘러나오지만 지극히 평범하고 인간적인 모습이다. 루브르에 전시된 ‘태양왕’ 루이 14세의 모습과는 대조적이다.
젊은 벨라스케스가 궁정화가로 발탁되었을 때 필립 4세는 18세였다. 초기에 제작된 화폭들을 X선 투시촬영을 해보니 젊은 왕의 실지 얼굴모습이 드러났는데 어찌나 못생겼던지 ‘헉~’ 했을 정도라고 한다. 벨라스케스는 약 10년 시차를 두고 국왕의 얼굴을 차츰 ‘미남형’으로 변모시켜 초상화에 담았고, 이후 오늘날까지 전해지는 모습으로 일관성 있게 화폭에 담아냈다.
그렇다면 궁정화가는 국왕의 환심을 얻기 위해 초기에 제작했던 초상화들마저 다시 손질을 가했던 것일까? 전문가들은 단연 아니라고 대답한다. 필립 4세 본인은 실지 모습 그대로 그려놓았던 원래의 초상화를 선호했다고 한다.
세월이 흐르면서 왕과 화가 사이에 예술적 공감이 형성되며 끈끈한 인간관계가 성립되기에 이른다. 이때부터 화가가 화폭에 담았던 것은 두 사람사이에 흐르는 내적교감이다. 즉 모델을 바라보는 화가의 내적 투시력에 의하여 화폭에 담는 국왕의 얼굴도 차츰 변화됐다는 해석이다. 화가가 감지하는 내면의 색채에는 물론 모델에 대한 존중과 애착심도 섞여 있다.
1650년 벨라스케스는 이태리 체류 중에 모더니즘을 지닌 걸작 ‘교황 인노켄티우스 10세의 초상화’를 제작했다. 근엄한 교황의 초상화를 아무 화가에게나 허락하지 않았던 시대로서, 당대 최고 명성을 지녔던 루벤스(1577-1640년)도 교황의 초상화를 제작할 권한을 얻지 못했다. 정작 하늘을 찌르는 권위와 존엄을 지닌 교황의 초상화가 완성되어 공개되었을 때 주변의 반발과 동요가 생겨났다.
화폭을 보자면 가장 먼저, 나이보다 더 젊어 보이는 교황(당시 76세)의 깊은 눈매와 풍부한 표정이 시선을 끈다. 눈매에서 영리함, 정직함, 선량함이 묻어나지만 동시에 결단성 없는 우유부단함과 복잡하고 인간적인 모습이 담겨있다. 오른쪽 손에서는 손가락들이 신경질적으로 움직이는 듯 긴장감마저 자아낸다. 벨라스케스는 준엄한 교황을 그리면서 그의 성격을 직시했고 이를 화폭에 담아냈던 것이다. 주변의 반응과 달리 교황 본인은 화폭이 ‘너무 사실적’이라고 호감을 표명하며 그에게 특별선물을 하사한 것으로 전해진다.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누드화로 간주되는 ‘거울속의 비너스’는 미술사에서 가장 미스터리한 화폭 중에 하나로 간주된다. 1647년 혹은 1651년, 마드리드 혹은 로마에서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는 화폭이다. 당시 누드화는 정통 가톨릭국가 스페인에서는 금기사항이었다. 벨라스케스는 당대의 금기사항을 어기면서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다는 엉덩이, 허리곡선, 어깨선을 지닌 비너스를 그려냈다. 아들 퀴피동이 든 거울 속에 비춰진 비너스의 얼굴은 어렴풋할 뿐이다. 이 얼굴 뒤에 무엇이 감춰진 것일까? 아무도 해답을 찾지 못한 수수께끼로 남아있다.
그랑팔레 전시회는 벨라스케스의 출생으로부터 말년까지 연대기 순으로 펼쳐진다. 그의 사부이자 장인이었던 파체코(Pacheco) 작품을 시작으로, 벨라스케스에게 영향을 주었거나 받았던 동시대 화가들의 작품도 함께 전시되고 있다. 당대 최고의 화가로 명성을 얻었던 벨기에 출신 루벤스는 외교특사로서 스페인 궁정에 거주하며 젊은 스페인 화가들에게 다방면으로 깊은 영향력을 주었다. 기원전 4세기 고대 그리스 철학자의 모습을 담은 루벤스의 유명한 화폭 ‘데모크리트’와 이 작품을 복사한 벨라스케스의 화폭도 나란히 함께 감상할 수 있다. 프라다 미술관의 문턱을 한 번도 넘어본 적이 없다는 벨라스케스의 가장 유명한 화폭 ‘시녀들’은 그의 문하생이자 사위였던 델 마소의 복제품으로 대체되어 전시되고 있다.
벨라스케스의 명성이 프랑스에 알려진 것은 그의 사후이다. 2세기가 훌쩍 지나 마네(1832-1883)는 벨라스케스를 ‘화가 중에 화가’라고 추대했다. 17세기 스페인 거장이 19세기 인상파 화가들에게 깊은 영향력을 발휘했던 것은 물론이다. 피카소는 벨라스케스의 작품들을 모방하고 변형시킨 화폭 수십 점을 남겼다.
【한위클리 / 이병옥 ahparis@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