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화 70년: 28회] 박정희 절친의 '중립화 통일론'…야당 의원까지 동원 ‘반공법 공세’
(서울=코리아위클리) 임헌영 교수(민족문제연구소장) = 황용주(南天 黃龍珠·1918~2001) 필화사건만큼 분단사의 치부를 알몸으로 보여준 예는 드물다. 박정희와 대구사범 입학(1932년) 동기였던 그는 독서회 사건으로 퇴학당해 도일, 와세다대 불문과, 학병, 8·15 후 동향인 밀양 출신 의열단장 약산 김원봉의 비서 등으로 혼란기를 보냈다.
이병주가 뒤를 이은 국제신문 주필에서 부산일보 주필(1958년)로 옮긴 그가 부산 군수기지사령부 박정희 사령관을 만난 건 1960년 초였다. 흉중에 쿠데타의 불씨를 품었던 박정희에게 황 주필은 불쏘시개를 지폈다. 그가 “우리도 군사혁명을 통해 이승만 정권을 탈피하고, 새로운 근대국가를 만들 시기가 왔다고 생각한다”면서 “자네 생각은 어떤가?”라고 묻자, “박정희는 씽긋 웃으면서 ‘나도 꼭 그렇게 생각하고 있어’라고 답”(안경환, <황용주-그와 박정희의 시대>, 까치)했다.
▲ ‘세대’ 필화 사건 2년 전인 1962년 12월 당시 박정희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과 황용주 부산일보 사장(오른쪽). 두 사람은 대구사범 동기생으로 절친했다. 안경환 서울대 명예교수 제공 |
“이념보다 권력에 철저한 박정희”
역사는 흘러 4·19혁명 뒤 허정 과도정부 때였다. 둘이 조총련 자금으로 ‘인민공화국’ 수립을 모의한다는 첩보로 이종찬 국방장관이 조사차 하부(下付)했지만 오해를 풀었다(안경환, 위의 책). 여순사건 관련부터 여러 정보들로 박정희는 5·16쿠데타 후 국내 반공세력과 미국에 적잖은 의구심을 불러일으켰다. 강원용 목사도 둘을 의심할 만한 정보를 주한 미 대사관의 하비브 참사관에게 제보했지만 박정희는 그대로 권좌를 지켰다. 월남으로 전근된 하비브가 한국을 떠나며 강원용에게 한 말이 그 이유를 밝혀준다.
“그때 당신이 박 대통령의 배경에 대해 우리에게 알려준 정보는 상당히 유익했습니다. 우리들이 내린 결론도 그가 좌익사상을 가지고 있었던 건 틀림없다는 것이었어요. 그런데 가만 그의 사람됨을 살펴보니까 이념보다는 권력에 대해 더 철저한 사람이더군요. 그래서 처음에는 그를 배척하려다가 정책을 바꾸게 되었지요. 그에게 계속 권력욕을 만족시키고 대신 그 밑에 믿을 만한 사람들로 벽을 쌓아 불순한 세력을 차단하기로 한 것입니다.”(강원용 회고록, <역사의 언덕에서> 3권, 한길사)
박정희의 측근 좌파에 황용주도 있었다. 그는 1964년 9월1일 MBC 사장 취임식에서 “나세르 수상이 수에즈운하를 국유화(1956년)하였을 때 영·불의 막강한 군사력이 이에 대항할 수 없었던 것은 카이로 방송의 ‘아랍의 소리(Voice of the Arabs·1953년)’ 위력 때문이었다. ‘아랍의 소리’는 그때까지 전체 아랍민족의 단결과 독립을 이룩해 놓았으며 세계 여론을 이미 자기편으로 기울게 하였다. 우리들의 오늘의 처지는 ‘아랍의 소리’가 달성하려 했던 상황과 다를 바 없다. 유지해야 할 안전보다 전취해야 할 민족적 과업이 앞서고 있는 한 전체 국민의 참여의식을 높이는 데 전파 미디어의 기능은 더욱 존중되어야 할 것이다”라고 말했다.
이낙선의 주도로 1963년 1월 창간한 월간 ‘세대’는 이광훈 편집장(고려대 국문과 4년)에 자문위원은 구상·김동리·김팔봉·김형석·박동묘·백철·오주환·오화섭·이근삼·정병욱·최문환·홍이섭·황용주였으나 황용주가 거의 주도했다.
그는 1964년 7월호부터 매월 문제의 글을 실었다. 그중 ‘매카시즘의 한국적 구조’(9월호)는 학생운동을 ‘빨갱이’로 몰아대는 걸 비판했다. ‘UN의 이상과 한국의 위치’(10월호)에서는 “세계 정세를 통해 유엔을 보아야지 유엔을 통해 세계 정세”를 봐선 안된다고 했다. 한국엔 “유엔 만능주의자”가 너무 많다며, “유엔의 간섭을 받는 나라는 가장 불쌍한 나라”들뿐이라고 직격탄을 날렸다. “유엔이란 수속을 거친 미국의 의사” 집행기관에 불과하기에 “신뢰해야 하지만 의존할 수는 없다. 유엔의 통한론(統韓論)은 우리가 자주성·독립성을 가지고 주체적으로 요리하고 소화하기 이전에는 탁상의 공론에 불과하다”고도 했다.
야당 의원을 동원한 ‘공작 필화’
필화로 비화된 논문 ‘강력한 통일정부에의 의지-민족적 민주주의의 내용과 방향’(11월호)은 특집 ‘현대 민주주의의 제 양상’(필자 박동운·조세형·양흥모·박무승·임방현·황용주·갈홍기) 중 하나였다. 요지는 반외세 중립화 통일론, 남북한 유엔 동시가입, 남북한 제3국에서의 회담, 휴전선에서 남북한 군대 철수 및 극소수 유엔 경찰군 주둔 등 신선감이 넘쳤다.
그런데 생뚱맞게 국회 국방위원회에서 야당 의원들이 문제를 제기했다. 한건수 의원이 김성은 국방장관에게 국시 위배 여부를 추궁하고, 국방부 소관 업무가 아니라는 답변에 “김일성이와 무전연락을 하는 민간인이 있다면 김 국방은 내 소관이 아니라고 잡지 않겠는가?”라고 고함쳤다(1964년 11월10일).
한때 진보파였던 김준연 의원도 나섰다. 제네바 정치회담(1954년 4월27일)에서 ‘북괴 남일’이 한 말을 교묘한 필법으로 복사한 것이라며, 관계 장관을 출석시켜 따질 때까지 국방예산 심의를 거부하겠다고 버텼다. 정보부장 김형욱은 제5대 대통령선거(1963년 민정이양)에서 야당 후보들을 난립시키려고 그들의 사퇴를 막은 박정희의 공신이었다. <김형욱 회고록>에 따르면 미국 의도대로 박정희 주변의 좌파 척결 차원에서 정보부가 김준연에게 공작했다는 것이다. 반미주의에 ‘거의 빨갱이’인 황용주가 뻔질나게 청와대에 드나들며 중립화 통일론을 제창하자 김형욱은 서울대의 반공교수들을 동원하여 그 허구성을 선전하는 책도 냈건만 동기생 대통령의 배경을 믿고 황용주는 여전했다. 이에 김형욱은 박정희의 내락을 받고자 국회에서 문제 삼도록 공작한 것이다.
“권력 주변의 세력 다툼”
미 대사관 문정고문관 그레고리 헨더슨의 보고서에도 박정희 주변 좌익인사 명단에 황용주가 포함되어 있었다. 황용주를 구속(11월11일)한 이튿날(12일) 국방부에서 외무·국방·법무·공보·내무장관 등과 주한 미 대사, 8군사령관 등이 참석한 비공개 회담이 열렸는데, 황용주 문제였다고 한다. 이걸 신직수 검찰총장이 특명으로 추진했는데, 이후락·김종필도 부담스러운 존재였던 황용주를 제거하고자 묵시적으로 담합했다는 것이 황용주 자신의 후일담이다.
민족 주체성을 말살한 이런 추악한 정치공학 음모에 하필 야당이 맹활약한 수치스러움은 몇몇 ‘야꼴’(야당 꼴통)의 정체를 엿볼 수 있게 해준다. 이름을 대면 알 만한 인물들이 이 문제로 설쳐댔는데, 요즘도 이런 ‘야꼴’이 한 둘 아니다.
김영삼(민정당)은 달랐다. “국회가 먼저 떠들어주도록 만든 것 아닌가 의심스럽다. 이 때문에 이 사건은 박 대통령 주변을 둘러싸고 있는 사람들 사이에서 벌어진 하나의 세력 다툼에서 나온 것이 아닌가도 생각된다”(경향신문 1964년 11월17일)라고 공작정치의 내막을 꿰뚫어보았다. 진실이야 어쨌든 상관없이 검찰은 ‘세대’ 발행인(이철원), 주간(이준희), 편집장(이광훈), 기자(김달현)를 반공법 위반으로 조사했지만 곧 다 풀려나고 황용주만 기소(11월19일)됐다. 변호사는 대구사범 동기 김종길이 맡았으나 별 덕은 못 봤다. 그는 박정희의 민정이양 자문을 받고 반대해서 절교 상태였다(이병주 <대통령의 초상>). 황용주는 구속적부심과 보석 신청을 모두 기각당했다. 서울형사지법은 1965년 4월30일 황용주에게 징역 1년, 집행유예 3년, 자격정지 1년을 선고하여 거의 반년 만에 출소했다.
만약 박정희가 권력욕에 도취하지 않고 황용주의 말을 들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혹 본바탕이 그럴 위인은 아니었는데, 황용주가 동기생을 과대평가한 것일까.
<꼬리기사>
“우리는 남북 군사적 대치 해소 방안 찾아야”
‘강력한 통일정부에의 의지’는
▲ 동아일보 1964년 11월12일자 기사에 실린 ‘세대’ 11월호 표지와 황용주의 논문 제목. 안경환 서울대 명예교수 제공 |
국토 양단의 현실을 타개하기 위해서 관계 강대국의 협상이 개시되지 않을 수 없게끔 우리들 남북한의 적대 상황 해빙 작업부터 착수되어야 하는 것이다. 물론 우리는 6·25동란 이래 휴전상태에 있다. 그러나 이 같은 반주체적인 상황에 구애받을 수는 없는 것이다. (중략)
우리는 남북한의 적대관계를 조성하고 있는 군사적 대치를 해소하는 방안을 강구해야 할 것이다. (중략)
남북한의 불가침이란 민족정기의 이름 아래 지켜야 할 명백한 약속과 이에 따른 군비 축소화는 당연한 정도(正道)이며, 이상을 말하면 경계선에만 치안을 위한 UN경찰군의 극소 주둔으로 족해야 한다. UN의 동시 가입과 제3국을 통한 대화 방안도 수립되어야 하겠다. 과거 20년간이나 부질없게 계속된 비난의 소리가 오늘날 무엇을 이 민족에게 플러스하였을까 하는 기본적인 반성 같은, 전체 국민이 홀로 있을 때 본능적으로 솟아나고 있는 인간성의 자연 앞에 성실하자는 것이다. (경향신문에 먼저 올려졌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