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산업의 적폐청산과 다양성을 외치는 영화인들
뉴스로=클레어 함 칼럼니스트
그간 미국과 독일에서 신문사, 영화제, 제작등 다양한 활동을 해온 나는 오랜만에 예술영화들의 메카라 불리는 전주국제영화제를 찾았다. 올해로 18회는 맞는 전주영화제는 역대 최대 매진과 최다 관객수를 기록하며 막을 내렸다.
며칠간의 짧은 방문동안 방대한 영화 프로그램을 다 살펴볼 기회는 없었지만, 영화제가 주최하는 여러 리셉션이외에도 행사 뒷풀이에서 적지 않은 수의 영화 관계자들을 만날 수 있었다. 해외에서 활동하는 나는 최근 촛불정국과 관련하여 국내 영화계의 적폐(積弊)는 무엇인지가 제일 궁금하였고, 크게 이슈가 되었던 문화예술계 블랙리스트의 폐해가 어느 정도인지 궁금하여 이 주제에 대한 의견을 귀기울여 들었다.
그 어느 때보다도 적폐청산과 정의로운 사회의 열망이 높은 요즘, 전주영화제를 찾은 국내 영화인들의 분노의 목소리와 위기감 또한 예외가 아니었다.
또한, 박근혜정권 당시의 문화계 블랙리스트로 인해 영화 관련 펀딩의 기회를 박탈당했던 영화인들에게는 이런 부정부패가 그들의 생존을 위협하는 다급한 문제였다. 소자본이 필요한 다른 예술 분야와는 달리 막대한 자본이 필요한 영화작업은 더욱이 그 폐해가 클 수 밖에 없는 것은 자명하다.
국내 영화 산업의 가장 큰 폐해를 묻는 필자의 질문에 모든 영화인들은 이구동성으로 대자본이 지배하는 기형적 독점구조를 지적했다.
국내 영화 산업도 다른 기타 산업과 마찬가지로, 대기업들의 폐해가 심각하다. 한마디로, CJ, NEW, 롯데, 쇼박스 4대 기업이 90%에 가깝게 영화 투자, 제작, 배급을 아우르는 영화산업 전 과정을 독식하는 불공평한 현실로 인해, 다양한 목소리를 가진 영화인들의 참여 기회가 심각한 수준으로 배제되고 있다고 들었다. 비단 저예산 독립영화인들만의 문제가 아니라, 한국의 주류 중견 영화인들도 같은 비판의 목소리를 냈다.
과거 단관개봉 시스템으로 극장업자를 통한 토착자본(土着資本)이 주먹구구식으로 영화를 제작하고, 극장 상영과 비디오 판매 수입으로 재투자를 하던 시절보다는 현재의 산업화된 구조가 외형으로는 조금 더 세련되어 보이지만, 관련 종사자들간의 기회의 불평등은 여전하다.
80년대 후반, 대기업 자본이 토착자본을 매각하고 영화시장으로 유입한 후, 한국의 영화계는 산업화를 맞이하였으나, 영화 산업 전 과정을 독점하는 대기업 독식구조는 다양한 영화를 생산하는데 필수적인 건강한 제작사들의 붕괴로 이어졌다.
한 중견 제작자 K씨는 "2000년대 중반까지만 하더라도, 투자사들이 제작사에 제공하는 기획및 개발비 지원이 있어서 제작사들이 소신껏 작품을 기획하여, 봉준호 감독의 <살인의 추억>같은 훌륭한 작품들도 가능했다.'며 "하지만, 이제는 이런 성공이 불가능한 힘든 여건이 되었다"며 무척 아쉬워했다.
필자가 만난 한 독립영화 감독 P씨도 영화 작업에 있어서 제일 힘든 것은 "뭐니뭐니해도 완성된 작품을 소개할 경로가 부재하다는 현실"이라고 지적했다. 영화 투자가 이뤄지는 초기 상황에서부터 배급자가 따라서 정해지기 때문에 이런 대기업 시스템에서 소외된 영화인들은 극장을 통한 배급은 꿈같은 이야기일 뿐이다.
이런 암울한 현실때문에 미봉책으로 국내에도 규모가 큰 부산영화제나 전주영화제는 일부 작품들에 재정지원을 한다. 특히, "메이드 인 전주"라 불리는 전주프로젝트마켓은 창의적인 프로젝트를 발굴하기 위해 총 1억원의 기금으로 연간 10편 내외의 프로젝트를 선발하여 각 1천만 원의 개발지원금을 지원하고 일부 작품에 대해서는 제작 및 투자도 검토한다. 하지만, 이런 영화제의 재정지원은 극히 제한적일 수 밖에 없다.
물론, 스토리펀딩 사이트처럼 일반 시민들이 참여할 수 있는 플랫폼이 존재하기는 하나, 외국의 Quickstart나 Indiegogo 사이트처럼 활성화되어 있지도 않을 뿐더러, 일부 제작자들은 심지어 스토리펀딩 플랫폼에도 콘텐츠의 사전 승인을 받아야 하는 불편한 현실에 불만을 토로했다.
대안적 플랫폼으로 일반인들이 영화투자자로 참여할 수 있는 주식/증권 형식의 와디즈 사이트도 있지만, 최소한의 투자액을 요구하며, 계좌이체 과정이 복잡하고, 공인인증서를 요구하는등 까다로운 절차로 기술적인 문제를 해결해야 할 숙제를 안고 있다. https://www.wadiz.kr/
영화의 다양성이 중요한 이유
정치적 이슈를 주로 다루는 어느 제작사의 K 대표는 "국내 시장에서는 진정한 벤처 영화기업이 성장할 수 있는 경제적 문화적 제반여건이 형성되지 않았다"고 지적했다. 그는 "빈익빈 부익부가 심화된 현 상황에서는 정치적인 다큐를 지지하는 층들이 존재한다고 하더라도, 경제력이 약한 그들의 지원을 기대하기 힘들기 때문"이라며 또다른 문제점을 지적하기도 했다.
물론, 이런 영화산업의 불평등 문제에 대한 가장 근본적인 해결책은 분명히 이런 독과점(獨寡占)을 제대로 규제할 수 있는 영화법의 개정일테고, 실제로 일부 대선후보들은 이런 문제를 인식하고 해결책을 공약으로 제시했다.
대선이 코앞인 요즘, 한국의 많은 시네필들이 대선후보들의 영화 관련 공약에도 큰 관심을 보여주었으면 좋겠다. 단순히 영화제에 와서 관객으로서 훌륭한 영화를 보고 감동을 받고 가는 것도 좋지만, 영화산업의 이런 구조적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다면, 앞으로 다양한 한국영화나 외화를 감상할 귀한 기회는 급격히 줄어들 것이 자명하기 때문이다.
영화의 다양성은 정말 중요한 문제가 아닐 수 없다. 다양한 주제의 영화를 통해 접하는 여러 사회적 이슈들과 아울러, 스크린을 통한 외지로의 여행, 타인의 삶을 통한 간접적인 배움 등은 우리네 삶을 더욱 풍요롭게 해줄 수 있기 때문이다.
한국 영화산업의 구조적 문제는 비단 영화인들만의 문제가 아니다. 영화라는 매체의 엄청난 힘은 의식적 또는 무의식적으로 우리의 인생관및 세계관에 큰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해외에 사는 나는 이런 점을 피부로 많이 느낀다.
20년전 해외에서 한국인이라고 소개하면 "한국인들이 개고기를 먹는 것이 사실이냐" 또는 "북한과 언젠가 통일이 될 것 같냐'는 두 질문이 유일했었는데 어느 순간 한국 영화들이 해외영화제 상을 휩쓸고 더욱 많이 소개되면서 외국인들의 한국에 대한 이미지와 인식은 크게 개선되었다. 나의 한국인으로서의 자긍심(自矜心)은 아마도 한류, 특히 한국 영화의 우수성으로부터 기인한 것 같고, 이런 이유로 나는 한국의 영화인들에게 많은 애정이 있다.
너무나도 획일화된 사고가 강요되는 어쩌면 '근대와 현대가 공존'하는 보수적인 한국 사회에서 다양한 사고를 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영화들이 제작되고 활발하게 소개되는 문화 여건을 조성하는 것, 이것도 우리 기성세대의 중요한 몫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앞으로 정권교체후, 영화제에 가면 술을 마시며 울분을 토로하는 영화인들의 힘든 얼굴보다는 그들의 밝은 미소를 볼 수 있기를 바라며.
글 사진 클레어 함
* 에필로그
이젠 유명한 배우와 감독으로 변신한 박진표 감독과 배우 문소리씨를 전주영화제에서 오랜만에 다시 뵈니 무척 반가웠어요. 2003년 시애틀영화제에서 <오아시스>와 <죽어도 좋아>를 포함, 한국 영화 13편을 상영했었는데, 제가 당시 전 기간 통역을 맡으며 많은 독립영화인들과 즐거운 시간을 보낸지가 엊그제 같은데, 벌써 세월이 흘러 흘러 이 분들이 제 영화를 볼 날이 얼마 남지 않았군요. ㅎㅎ
세월호 다큐라고 고맙다며 박감독님과 문소리님 꼭 챙겨보신다네요. 특히, 박감독님은 차고 있던 노란 팔찌를 보여 주시며 세월호 가족분들도 응원해 주셨습니다 ^^
- |
- IMG_1589.jpg (File Size:138.2KB/Download:50)
- IMG_0925.jpg (File Size:88.3KB/Download:47)
- IMG_0977.jpg (File Size:77.9KB/Download:46)
- IMG_1570.jpg (File Size:112.8KB/Download:51)
- IMG_1593.jpg (File Size:136.3KB/Download:46)
- IMG_1595.jpg (File Size:102.4KB/Download:4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