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로=김원일칼럼니스트
러시아에서 가장 큰 국가기념일은 5월 9일로 2차대전 승전기념일(勝戰紀念日)이다. 뜻 깊은 러시아의 국경일에 한국에서는 대통령 보궐선거가 진행되어 문재인 후보가 비교적 큰 득표율로 무난히 당선되었다.
필자는 이같은 우연의 일치가 마치 앞으로 기대되는 문재인 대통령과 러시아의 특별한 인연을 예고라도 하는 듯이 느껴져 감회가 새로웠다.
지난 이명박 박근혜정부 9년은 한국에서 국가 전반에 거쳐서 퇴행(退行)이 지속된 시기였다. 이러한 국가적 위기상황을 맞아 한국민들은 마침내 저항권을 발동하여 촛불혁명이라는 세계사에서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평화적 시민혁명을 일으켰다. 촛불혁명은 박근혜 전대통령에 대한 탄핵과 보궐선거를 통한 문재인 대통령의 선출로까지 이어졌다..
지금 한국에서는 그 동안 사회 각 분야에 쌓여온 낡은 폐해(弊害)들에 대한 청산과 개혁이 시대적 과제로 제기되고 있다. 여기에는 물론 한국의 정치, 경제, 사회적인 개혁이 중심 과제로 놓여있다. 하지만 이와 동시에 우리가 놓치지 말아야 하는 또 하나의 중요한 개혁의 대상은 한국외교정책의 무능이라는 적폐(積弊)이다. 이명박 박근혜정부의 지나친 미국편향 대외정책의 뼈 아픈 결과로 지금 남북관계는 파탄에 이르렀고, 중국 러시아와의 관계가 매우 악화되어 있다.
본래 러시아 중국과의 관계강화는 보수정부인 노태우시대에 이른바 북방정책으로 시작되어 한국정부의 보수 진보 이념적 성향에 관계없이 비교적 꾸준히 추진된 한국의 국가전략적인 정책이었다. 한국과 같이 주변이 강대국에 둘러싸인 반도국가는 주변 강대국과의 관계는 국가의 명운(命運)을 좌우할 수도 있는 매우 중요한 과제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난 한국정부들의 균형외교의 노력들은 이명박 박근혜정부의 미국편향 일변도의 외교로 인해 크게 훼손되고만 실정이다.
근래에 한러관계의 퇴행에는 양국에 내재된 두가지 요인이 큰 영향을 미치고 있다고 보여진다. 첫째는 우크라이나사태 이후에 미국과 서방의 러시아에 대한 제재국면에서 한국이 미국의 동맹국으로서 부득이하게 대러관계에서 미국의 의향을 살필 수밖에 없었다는 점, 둘째는 북핵문제로 촉발된 한반도위기 상황에서 러시아가 자국의 이해관계에 따라 한반도 내에서 남북한 사이에서 나름의 전략적 균형정책을 추구하고 있다는 점이다.
하지만 이같은 점으로 고려하더라도 한국 정부의 지나치게 러시아를 경시하는 듯한 외교행태는 이해하기 어려운 측면이 있다. 필자는 한국이 대러시아 관계를 대미국관계 심지어 대북한관계의 하위종속변수로 평가하고 이에 따라서 러시아에 대한 정책방향을 설정해 오고 있는 매우 그릇된 외교관행에서 찾을 수 있다고 본다.
한편 일본은 한국과 같이 미국의 동맹국이고, 러시아와는 북방영토문제와 평화협정문제로 갈등이 외교적 갈등이 적지 않다. 뿐만 아니라 일본은 한국과 달리 우크라이나사태에 따른 미국 서방의 대러시아제재에도 공식적으로 참여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베 수상은 푸틴대통령과 매년 수 차례의 만남을 가지고 있다. 양국 정상은 개인적 친분을 쌓아가면서 공식 비공식 정상회담을 지속적으로 진행해 오고 있다. 또한 일본 정부 내에 러시아담당 부까지 신설해서 러시아에 대한 전략적 정책과 투자 협력사업에 대해 전담하도록 하고 있다.
그 결과, 일본의 러시아극동지역개발사업에 대한 투자와 참여가 활발히 이루어지고 있고, 러일간 에너지협력사업 등 러일 양국 사이에는 다양한 협력사업들이 계속해서 개발되고 확대되고 있다. 이에 반해 한국은 2014년 이후 대러시아 교역액이 꾸준히 감소하고 있다. 러시아에 대한 투자도 거의 이루어지지 않고 있으며 그나마 한러, 남북러협력 사업으로 상징적 의미가 매우 컸던 나진 하산프로젝트마저도 북한에 대한 제재를 명분으로 철수한 실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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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듯 한러관계가 정치 경제적으로 악화일로(惡化一路)를 걷고 있는 상황에서 문재인정부의 출범은 한러 양국 모두에 큰 기대를 불러 일으키고 있다. 문재인 대통령은 야당대표시절과 대통령후보 신분일 때에 한국의 정치지도자로서는 거의 유일하게 공개적으로 한러 협력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관계강화에 대한 의지를 밝힌 바 있다. 그리고 중국과 러시아가 강하게 반대하는 사드배치 문제에 있어서도 다른 대통령후보들과는 달리 한미간에 재조정의 필요가 있다는 점을 거듭 지적해 왔다. 러시아 또한 문재인 대통령의 러시아와의 관계발전을 희망하는 발언들에 대해서는 우호적으로 평가하곤 했다.
필자는 작년에 블라디보스톡에서 개최된 동방경제포럼에 참석하였다. 당시 극동개발부장관 기자회견장에서 갈루슈카 장관은 한국의 나진 하산프로젝트 불참 결정에 대해서 매우 애석해하며 “시범사업으로 진행되었던 백만톤의 석탄 운송이 한러, 남북러협력사업에 가지는 가치는 수십억톤에 이를 것”이라고 지적했다. “러시아는 이제라도 한국이 나진 하산프로젝트에 복귀하길 바라며 기다리고 있다”면서 안타까움을 토로하던 그의 모습이 아직도 기억 속에 생생히 남아있다..
문재인정부가 의지만 있다면 러시아가 한국이 사업에 복귀하기를 기다리는 나진 하산 프로젝트에 다시 참여하는 것만으로도 한러협력사업의 물꼬를 다시 틀 수 있을 것이다. 이를 계기로 협력사업의 범위는 지난 정부들 사이에서 협의 되었던 에너지, 철도, 식량 등 대규모 국가전략산업과 과학기술협력, 북극항로, 극동지역개발 등에 관계되는 크고 작은 다양한 협력사업들로 자연스럽게 넓혀 나갈 수 있을 것이다.
지금은 동북아에서 국가간에 정치적인 갈등이 깊어가는 시기이다. 이럴 때일수록 주변국과의 경제협력의 필요성은 절실하다. 경제협력의 강화는 정치적 갈등을 완화(緩和)시키는 역할을 할 수 있다. 한국과 러시아의 경제협력은 한국이 미국 일본과 중국의 정치적 갈등으로 상징되는 동북아지역 세력경쟁에서 큰 우군을 확보할 수 있는 매우 중요한 영역이다.
필자는 새로 출범하는 문재인정부가 한러 협력이 시사하는 전략적 의미와 가치를 제대로 평가하고 적극적으로 대러시아 정책을 수립하여 집행해 나갈 수 있기를 기대한다. 일본이 이미 앞서가는 “미국과의 동맹강화와 러시아와의 협력강화”라는 길을 시급히 따라 잡아 동북아 외교의 지렛대를 옮겨와야 할 것이다.
* 글로벌웹진 뉴스로 칼럼 ‘김원일의 모스크바 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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