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재규복권소설 연재
뉴스로=이계선작가
진압군측은 전의를 잃고 있었다. 본부를 장태완의 수경사령부로 옮겼지만 손을 놓고 있었다. 장태완 혼자서 용전분투하고 있었다. 그러나 무력동원을 하지 않기로 한 신사협정에 속아있는 육본수뇌부의 반대가 있어 힘을 쓸수가 없었다. 장태완은 자기 예하부대인 33경비단에 탱크출동명령을 내렸다.
“33경비단은 지금 당장 모든 탱크를 필동 수경사령부로 출동시켜라”
“예, 그리 하겠습니다”
다행히 33경비단장 김진영준장이 부대에 없어서 명령이 먹혀들었다. 하나회핵심인 김진영은 그 시간 반란군측 본부인 경복궁 30경비단에 있었던 것이다. 일직사령의 전달을 받자 15대의 탱크가 현저동 33경비단을 출발했다. 진압작전은 탱크로 포위하고 소총으로 공격하는 게 제일 효과적이다. 수경사에는 탱크가 본부에 4대 뿐인데 30경비단과 33경비단에 30대가 나눠 있었다. 현저동을 출발한 15대의 탱크가 지축을 흔들면서 시청앞을 지나고 있었다. 30경비단을 지키고 있던 노태우는 육중한 캐터필러소리에 혼비백산을 했다. 전두환은 장군들을 데리고 최규하를 협박하러 가고 없었다. 그래서 더 무서웠다.
“장태완이 수경사탱크로 30경비단을 포위하면서 공격해 온다면 우리들은 독안에 든 쥐가 되어 꼼짝없이 체포당하고 말 것이다. 하극상 군사반란으로 처벌당할게 아닌가?”
노태우는 권총을 꺼내들었다. 여차하면 자결을 할 자세였다. 그러자 옆에 있는 김진영준장도 권총을 꺼내들었다. 그는 33경비단장 이었다.
“노장군님, 이대로 죽을수야 없습니다. 제가 나가 보겠습니다. 33경비단이 장태완 수경사령관 지휘 아래 있지만 그는 부임한지 40일 밖에 안 됩니다. 직속 지휘관은 저라서 중대장들이 제 말을 더 잘들을 것입니다.”
찦차를 타고 시청앞으로 달려간 김진영은 한시간만에 돌아왔다.
“아슬아슬하게 돌려보냈습니다. 탱크가 구리개(을지로입구)쪽으로 올라가고 있어서 수경사가 있는 필동이 지척이었습니다. 탱크중대장들을 설복했어요. ‘윤성민참모차장과 전두환보안사령관은 피차 무력동원을 안하기로 신사협정을 맺었다. 우리의 상관인 장태완수경사령관님은 지금 술에 취하여 제정신이 아니다. 우리부대가 출동하면 내란이 일어나 김일성이 쳐 들어온다. 직속상관인 내가 책임질 테니 현저동으로 돌아가라‘ 그렇게 해서 모두 회군시켰습니다”
“하늘이 우릴 도왔소. 윤흥기준장이 이끄는 특전사 9공수단이 인천을 출발하여 서울로 달려오고 있었소. 9공수단이 15대의 탱크를 앞세우고 30경비단을 포위하면 우리는 꼼짝없이 항복할 수밖에 없었소. 그런데 고맙게도 우리적군인 윤성민참모차장이 철군명령을 내려줘 영등포까지 왔던 9공수여단이 인천으로 돌아가버렸소. 그리고 김진영장군덕분에 15대의 탱크부대도 현저동으로 철군했고. 이제 장태완은 차포를 뗀 격이니 손을 들게 뻔 하오.“
노태우가 말한 그대로였다. 장태완은 이빨 빠진 호랑이가 돼 있었다. 달려오던 9공수여단도 현저동의 탱크부대도 되돌아가 버리고 말았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포기하지 않았다.
“그래도 경복궁을 공격한다”
그러나 긁어모은 병사는 100명에 불과했다. 그것도 행정병을 포함하여. 탱크는 겨우 4대뿐이었다. 그래도 경복궁을 공격하러 출발하려는데 연락이 왔다.
“사령관님 큰일 났습니다. 박희도가 이끄는 김포의 1공수여단이 행주대교를 거쳐 질풍같이 달려가 국방부와 육본을 점령했습니다. 저들은 수비하고 있던 경비병들을 미리 매수하여 방어는 커녕 환영했습니다. 국방부옥상에 설치한 수경사의 발칸포가 반란군에게 불을 뿜었지만 대공포라서 효과가 없었습니다. 저들이 M16 소총으로 공격하는 바람에 정선엽병장이 사망했습니다. 정병장이 몸에 벌집을 쑤셔놓은 듯 참혹한 모습으로 쓰러지자 모두 도망가 버렸습니다. 그곳에 남아있던 육본과 국방부소속 장군들은 모두 체포당했습니다. 국방부 지하계단밑에 숨어 있던 노재현국방장관은 발각되어 경복궁으로 끌려갔습니다. 노재현은 전두환의 요구대로 정승화참모총장 연행청원서에 서명해줬습니다. 이로서 정승화체포는 사후재가 형식으로 합법이 됐다고 저들은 떠들어대고 있습니다”
윤성민과 장태완은 얼이 빠져버렸다. 윤성민은 전화로 송파에 있는 특전사령관 정병주소장을 찾았다. 정병주특전사령관은 장태완수경사령관과 더불어 육본을 떠받들고 있는 양 기둥이었다. 특전사는 전화를 받을 처지가 못 됐다. 참혹한 일을 당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전두환의 명을 받은 특전사 3공수여단장 최세창은 자기부대가 있는 남한산성으로 달려갔다. 38명의 대원을 이끌고 송파 특전사령부로 차를 몰았다. 직속상관인 정병주사령관을 체포하러 가는 길이었다. 특전사령부 앞에 도착했지만 최세창은 얼른 나설 수가 없었다. 직속상관 정병주는 보통 사령관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정병주는 “특전사의 아버지”로 통했다. 귀신잡는 해병들도 특전사 앞에서는 꽁무니를 뺐다. 특전사를 그렇게 만든 건 정병주다. 정병주는 5년 동안 특전사사령관을 맡으면서 항상 솔선수범을 보였다. 위험한 고공낙하를 87회나 했다. 정병주의 부하사랑은 거의 부정(父情)에 가까웠다.
특히 참모사랑이 남달랐다. 전두환 노태우 박희도 최세창 장기오 윤흥기는 정병주가 데리고 있으면서 별을 달아준 장군들이다.
참군인 정병주 특전사령관(1926-1989)
1년전인 1978년 태안 앞바다에 무장간첩이 출몰했었다. 그때 1공수여단이 실수를 저질렀다. 눈앞에 있는 북괴간첩선을 놓쳐버린 것이다. 여단장박희도가 옷을 벗게 생겼다. 정병주는 참모총장 이세호대장을 찾아가 무릎을 꿇었다.
“박희도를 용서하여 주십시오. 젊고 유능한 준장이라서 용서하여 주면 배우고 노력하여 앞으로 훌륭한 장군이 될것입니다. 그 대신 나이 많은 저를 처벌하여 주십시오. 모든 책임은 상관인 저에게 있습니다”
이세호는 진심어린 정병주의 모습에 감동하여 박희도를 용서해줬다. 정병주는 청렴결백의 표본이요 용기와 사랑의 화신이었다. 특전사의 장교와 사병 모두가 정병주를 따랐다. 그래서 정병주는 특전사의 아버지다. 그러니 어떻게 정병주에게 총 뿌리를 들이댄단 말인가? 특전사령부 앞에 진을 구축한 최세창은 머뭇거리기만 했다. 시간만 흘러갔다. 참모들이 보챘다.
“최장군님, 전두환보안사령관님의 독촉이 심합니다. 박희도장군의 1공수여단은 벌써 국방부와 육본을 점령했는데 3공수여단은 무얼하고 있느냐고 추궁이 대단합니다. 빨리 사명을 끝내고 장충단으로 모이라는 명령입니다”
“알았네. 내 직접 정병주사령관을 찾아가 평화적으로 해결해 보겠네“
최세창은 사령부로 들어가 정병주에게 사정했다.
“존경하는 정병주사령관님. 우리는 모두 사령관님을 존경합니다. 전두환장군 노태우장군도 사령관님을 존경합니다. 사령관님의 충정을 모르는 바가 아닙니다. 사령관님의 눈에는 저희들이 권력을 탐하는 하극상 반란으로 보일 것 입니다. 그러나 저희들은 12.12를 김재규사건의 연장으로 보고 있습니다. 김재규수사를 맡은 전두환사령관을 동해지구로 보내면 김재규는 살아납니다. 이걸 막기 위해 우리들이 일어난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은 옳고 그름을 따질때가 아닙니다. 옳다고 이기고 그르다고 지는 게임이 아닙니다. 육본과 국방부가 무너졌습니다. 육본소속의 장군들이 체포당했습니다. 끌려간 노재현국방장관은 최규하대통령에게 정승화총장 연행을 주청했습니다. 노재현장관은 육본측 장군들에게 무장해제를 명령했습니다. 대세는 이미 끝나버렸습니다. 사령관님, 포기하십시오. 그러면 저희들은 사령관님을 여전히 특전사의 아버지로 모시겠습니다”
“자네 말은 고맙네. 그러나 우리가 진다해도 난 포기하지 않겠네. 하늘이 우릴 버린다 해도 난 정의와 양심의 총을 버리지 않을 거야. 계백처럼 정몽주처럼 비록 싸움에 져 죽는 한이 있어도 청사(靑史)에 더러운 이름을 남기고 싶지 않단 말일세”
<계속>
* '김재규 복권소설'의 소설같은 사연
http://www.newsroh.com/bbs/board.php?bo_table=lks&wr_id=3
* 등촌이계선목사는 광야신인문학상 단편소설로 등단했다. 독자들은 등촌을 영혼의 샘물을 퍼 올리는 향토문학가라고 부른다. 저서로 ‘멀고먼 알라바마’ ‘대형교회가 망해야 한국교회가 산다’ ‘예수쟁이 김삿갓’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