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화 70년: 30회] ‘전환시대의 논리’ 리영희 기자 필화 세 가지
▲ 고 리영희 전 한양대 교수가 1980년 1월9일 광주교도소에서 2년 복역 후 만기출소하면서 부인과 포옹하고 있다. 리 전 교수는 박정희 정권 시절인 1977년 11월 <전환시대의 논리> 등의 저서가 문제가 돼 반공법 위반 혐의로 구속, 2년형을 선고받았다. 뒤쪽은 한승헌 변호사. 경향신문 자료사진 |
“어둠의 시간에 그가 있었다./ 아픔의 시간에 그가 있었다./ 거짓에 길들여지는 시간에 그가 있었다. (…)/ 그는 한반도의 상공에 날고 있는 각성의 붕(鵬)이다. 이와 함께 그는 한반도와 한반도를 에워싼 모든 힘의 논리를 이성의 논리로 이겨내는 물질적 정화(精華)이다./ 리영희!”(고은 ‘어떤 서사’, <리영희 저작집>, 한길사)
리영희의 첫 필화
리영희(李泳禧, 1929~2010년)의 첫 필화는 케네디·박정희 회담(1961년 11월14일) 취재기였다. 5·16쿠데타의 후속 절차였던 박정희의 도미 여정에는 조선일보·동아일보·합동통신 3사 기자만 엄선됐는데, 그는 합동통신 소속이었다. 회담 후 언론들은 공식 발표문대로 “군사원조도 약속하고, 경제원조도 해주고 정치적 승인도 했다는 따위의, 두 손 벌려 박정희의 요구를 전면 수락했다는 취지의 기사를 보냈다.”(리영희-임헌영, <대화>, 한길사)
그런데 리영희는 워싱턴 포스트의 주선으로 심층 취재하여, 케네디가 박정희에게 요구한 구체적인 사실을 밝혀냈다. ‘쿠데타군의 원대 복귀와 정치관여 금지 및 민정이양 실시 때까지 경제·군사 원조를 잠정 동결한다. 조속한 한·일국교 정상화와 베트남 사태에 대한 한국의 협력 등이 거론됐다’는 요지였다. 합동통신은 박두병 사장 주재로 몇 시간 회의 끝에 이 기사를 내보내 민주화를 열망하던 정치인과 지식인들을 열광시켰다. 박정희가 월남 파병을 케네디에게 먼저 제안했다는 사실이 밝혀진 것은 1996년 미 국무부 문서가 공개되면서였다.
맥아더 원수를 예방한 자리에서는 6·25 때 북한에다 “원자탄을 투하했어야 했다”라는 박정희의 발언이 배석했던 최덕신 외무장관에 의해 공개됐다. 거기서 나오는 엘리베이터에서 김재춘(합동수사본부장)은 리영희에게 “서울에 가서 보자!”고 위협했다. 다음 방문 예정지였던 유엔주재 한국 대표부에서 임병직 대사는 리영희에게 “수행 취재 중단, 즉시 귀국”하라는 본사의 긴급 전문을 건넸다. 독재자의 보복과 탄압은 언제나 급행이다.
예정된 일정의 3분의 1도 못 채우고 귀국길에 오른 리영희는 김포공항에서 연행되리라던 예상과는 달리 무사했지만, 다른 기자들은 다 참석했던 청와대에서의 방미외교 성공 축하연에는 초청조차 받지 못했다.
▲ ‘남북한 유엔 동시 가입안 준비’ 기사로 리영희 정치부 기자와 선우휘 편집국장의 구속 사실을 전한 11월22일자 조선일보 1면 보도. |
두번째 필화는 조선일보 정치부 시절(1964년, 이듬해 외신부장, 1969년 강제해직)에 일어났다. 출입처인 외무부에서 그는 축적된 연구와 자료를 바탕 삼아 ‘남북한 유엔 동시 가입안 준비’ 기사를 썼다.
1955년 반둥에서 싹이 튼 아시아·아프리카회의는 냉전 시대에 미·소 두 동맹에 가담하지 않은 제3세계 나라들의 연대 기구였다. 국제적인 영향력이 막강해지자 남북한을 동시에 초청하고 유엔에도 동시 가입안을 제출하겠다는 움직임이 일어났다. 분단 이후 ‘대한민국은 유엔이 인정한 한반도의 유일 합법정부’라는 명분으로 남한만의 유엔 단독가입을 꾸준히 추진해 왔던 시절이었기에 남북 유엔 동시 가입이란 날벼락이었다. 조선일보는 1면 머리기사로 우 탄트 유엔사무총장의 “유엔 문호 중공 북괴 등에도 개방을 제의”라는 기사 바로 아래에 리영희의 기사를 실었다.
“우 탄트 유엔사무총장이 연례보고에서 제의한 것을 공식화하기 위해 인도네시아, 아랍공, 알제리, 캄보디아, 가나, 말리 등이 남북한 동시 유엔 가입안을 총회 개막 전 정식 의제로 제출할 것 같은 움직임이 있다는 해외공관으로부터의 보고를 받았다고 20일 정부 고위층 소식통이 전했다. 고위 소식통은 이 제안이 있을 경우에 남한 단독가입 문제는 유엔 의제에서 탈락되어 금년 총회를 마지막으로 한국 문제 토의가 불가능하게 될 것이라는 우려를 표명했다.”(조선일보, 1964년 11월21일)
중앙정보부는 사전 통고도 없이 전국 주요 철도역에 도착한 신문 1·2판과 서울시내 가판을 압수하고는 조선일보사에 들이닥쳐 그 기사를 삭제하도록 강압했다. 그 지면에는 “각 지방서 본보를 압수/ 오늘 새벽 선우휘 편집국장, 이 기자 연행”이란 기사로 채웠다.
선우휘는 새벽 1시30분에 연행됐다가 7시30분에 일단 귀가시켰고, 리영희는 자택에서 4시경 연행됐다. 풀려났던 선우휘는 리영희와 함께 같은 날 오후 9시15분 서대문구치소에 수감됐다. 조선일보는 11월22일자 1면에 이 사실을 두 구속자 사진과 함께 게재하고 사설로 정부당국의 불법 만행을 비판했다.
여러 언론단체들이 부당함을 지적하는 가운데 조선일보는 김형욱 중앙정보부장으로부터 “구사옥 철거지로 환지 결정한 성북동 땅 시행을 보류하고 일본 도쿄기계에 주문한 윤전기 도입 허가를 취소”(방우영, <조선일보와 45년>)당하는 등의 보복과 탄압이 있었다고 밝혔다.
11월27일 구속적부심에서 선우휘는 석방됐으나 리영희는 기각당해 12월6일 서울지검 공안부의 무혐의 불기소 처분으로 27일 만에 석방됐다.
정작 코미디는 리영희의 석방 이후에 그 진면목을 드러냈다. 최연소 외무장관이었던 이동원의 시선으로는 이 기사가 전혀 문제될 것이 없었다. 더구나 ‘빨갱이’ 운운한 데 진노하여 다이얼을 남산(정보부)으로 돌리자 정보부장 김형욱은 “빨갱이가 아니라고? 아니 국가기밀을 누설해 이적행위를 했는데도 말인가? 이 장관, 당신 말이야, 당신 하고 친하다고 그러는 모양인데…”, 이에 이동원은 육두문자도 서슴지 않았다. “야 인마, 장관인 내가 기밀이 아니라는데, 네가 뭔데 마음대로 잡아넣나? 당장 풀어줘, 알았어?”
가만있을 김형욱이 아니다. 다음날 아침 출근길의 이동원은 지프 두 대에 연행되어 아예 죄인 취급을 당하자 폭발했다. “야, 이 자식아, 그래도 대통령이 임명하고 헌법이 신분을 보장한 장관인데, 네가 날 납치할 수 있어? (…) 너 그따위로 아무나 네 비위 거스른다고 빨갱이 만들어버리면 되는 줄 알아? 그리고 그 기사, 장관인 내가 기밀이 아니라 하잖아 인마. 너 분명히 얘기하지만 만일 각하께서 이 일을 아시면 너 큰 손해 볼 줄 알아, 알았어?”
“야, 이 새끼들아, 아침에 커피나 한잔 하려고 정중히 모셔 오랬더니 왜 이렇게 기분 상하게 해드렸어. 꼴도 보기 싫으니 당장 꺼져버려!” 김·이, 둘은 견원지간이었는데, “그의 이런 과잉충성”이 빚은 일로 이동원은 기록하고 있다(이동원, <대통령을 그리며>, 고려원, 1992년).
‘미쓰야 계획’을 폭로하다
리영희의 필화 제3탄은 1965년 조선일보에서 외신부장이 된 직후에 터졌다. 이 사건은 한반도의 운명을 좌우할 매우 심각한 정보였지만 정작 세상은 그리 주목하지 않았다. ‘미쓰야(三矢, 세 화살) 계획’은 일본에서는 ‘미쓰야 연구’로 점잖게 부른다. 자위대 통합막료회의(自衛隊統合幕僚會議)가 만든 한반도 유사시에 대비한 시뮬레이션인 이 계획의 정식명칭은 ‘쇼와 38년도(1963년) 총합방위도상연구(昭和三十八年度總合防衛圖上硏究)’이다. 한반도 공산화를 막기 위한 한·미·일의 군사협력 동맹으로 유사시에는 한반도와 중화인민공화국, 사할린까지도 진출해 미국이 최종적으로 승리하도록 짠 작전계획서다.
리영희는 이 극비사실을 신미·일안보조약 체결(1960년) 후 총리에서 물러난 기시 노부스케(岸信介)가 1965년 방한, 워커힐에 머물렀을 때 인터뷰로 얻었다. 그는 즉각 정보부로 연행당했으나 도리어 자신들도 모르는 일본군 비밀을 어떻게 알아냈느냐고 묻는 선에서 마무리되었다. 그의 필화는 점점 더 가혹해진다.
<꼬리기사>
일본군, 한반도 유사시 개입 미래 시나리오 - ‘미쓰야 계획’의 문제점
“지금 자칭 우익. 반공주의의 목소리를 높이고 있는 사람들을 보시오. 그들은 미국이 명령하면 오히려 일본과의 동맹작전으로 북한을 파멸하자고 할 거예요. 지금(2005년)은 그때(1965년)보다 훨씬 그 숫자가 늘어났다고 봅니다.”
“불행하게도 남한의 숭미주의자, 냉전식의 반공·반북한 전쟁주의자들이 얼마나 막강한가 보세요.(…) 희망적 상황을 실제적·객관적 현실로 착각하지도 말고요.”
“(기시 노부스케) 그는 만주·중국 침략의 최고 원흉으로 패전 후 1급 전쟁범죄자로 사형을 선고 받았어요. 그러나 미국은 아시아 반공정책에 이용하기 위해서 곧 석방하여 일본 정부 수상으로 만듭니다. 박정희 중장이 1961년 케네디에게 불려가면서 동경에 들러 한·일회담 문제 해결을 서약하고 일본의 정치·경제·외교적 지원을 약속받은 것이 기시 노부스케예요. 일본군 내부의 정복파(정규 군인)가 비정복파와 일본 안보에 관심을 가지는 개인들과 합작해 만든 미래의 시나리오였어요.”(리영희-임헌영 <대화>) (*경향신문에도 올려졌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