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는순간까지 당당했던 박흥주
뉴스로=이계선 칼럼니스트
그 시각 대통령 노태우는 저녁을 먹고 홀로 청와대 뜰을 산책하고 있었다. 저녁을 배불리 먹어서 그런지 행복에 겨운 포만감이 올라왔다.
‘내가 드디어 대통령이 되어 청와대 뜰을 거니는 구나!’
지내온 시절이 주마등처럼 떠 올랐다. 구절양장(九折羊腸)으로 느껴졌다. 양의 창자처럼 꼬불꼬불 얽혀진채 길고도 험하게 달려온 구절양장 인생길. 얽히고 설키면서 살아온 인연중에 잊을수 없는 두 사람의 얼굴이 떠 올랐다. 전두환과 정병주였다.
전두환은 같은 대구출신 육사동기. 그런데 사람들은 노태우를 전두환의 꼬봉이라고 불렀다. 꼬봉은 밑을 닦아주는 하인을 말한다. 일본 스모선수들은 큰일(대변)을 보고난 후 스스로 밑을 닦지 못한다. 워낙 덩치가 큰 거구라서 자기손이 닿지 않기 때문이다. 옆에서 화장지를 들고 기다렸다가 일이 끝나면 달려들어 밑을 닦아주는 사람이 있어야 한다. 그를 꼬봉(붕)이라 부른다. 똥구멍을 닦아주는 하인, 그게 꼬봉이다. 노태우는 전두환의 꼬봉이었다. 밑을 닦아 준 적은 없지만 평생 전두환의 뒤를 바짝 따라다니면서 명령대로 움직였다. 그러다 전두환이 영전하면 기다렸다는 듯이 그 자리를 꿰 차고 들어갔다. 특전사공수여단장, 9사단장, 보안사령관자리를 그렇게 물려받았다. 그러다 대통령 자리까지 물려받은 것이다.
바보 노릇을 하는 꼬봉은 그냥바보가 아니다. 주인보다 영리한 바보다. 사실 노태우는 전두환보다 공부를 잘했다. 꼬봉은 주인곁을 바짝 따라다니면서 주인비위를 맞춰준다. 그러다가 주인이 천하를 얻으면 얼른 주인을 밀어내고 주인이 된다. 최초로 일본을 통일한 풍신수길은 노부가나의 꼬봉이었다. 노부가나의 견마잡이가 되어 말궁둥이를 따라다니다가 노부가나를 끌어내리고 대장이 됐다. 덕천가강은 풍신수길의 꼬봉이었다. 아들처럼 떠 받들다가 풍신수길이 죽자 일본을 차지했다.
꼬봉 노릇하기가 여간 힘든게 아니다. 남의 똥구멍을 씻겨주기가 얼마나 더럽고 치사한가? 실력이 한참 뒤지는 친구를 상전으로 받드는 꼬봉의 괴로움. 노태우는 자기만이 꼬봉이 아니었다. 아내 김옥숙은 영부인 이순자의 꼬봉이 돼야했다. 이순자가 외출하면 김옥숙은 앞장서서 길라잡이노릇을 했다. 김장철이 되면 장관부인들을 데리고 청와대로 들어가 무 배추를 다듬어야 했다.
그런데 노태우와 김옥숙이 전두환 이순자를 밀어내고 청와대 주인이 된 것이다. 30여 년 간 서러웠던 꼬봉신세, 이 은혜(?)를 어떻게 갚지? 그때 야당이 들고 일어나 전두환을 규탄했다. 불감청고소원(不敢請 固所願). 노태우는 야당요구에 못이기는 척 전두환부부를 백담사로 유배 보냈다. 아들에게 왕위를 빼앗긴 후백제 견훤은 금산사로 유폐당한다. 전두환은 대통령을 물려준 친구에게 백담사유폐를 당한 꼴이 된 것이다.
“인생은 새옹지마. 이랑이 고랑이 되고 고랑이 이랑이 되고 쥐구멍에도 볓 들 날이 오는구나“
회심의 미소를 흘리던 노태우의 얼굴에 수심이 끼기 시작했다. 갑자기 정병주생각이 난 것이다. 노태우준장이 특전사공수여단장시절 정병주소장은 특전사령관이었다. 직속상관인 것이다. 특전사의 아버지로 통하는 정병주는 노태우를 끔찍이 아꼈다. 노태우에게 정병주는 아버지요 형님이요 스승이었다. 그런데 전두환과 하나가 되어 정병주를 체포하고 옷을 벗긴 것이다. 대통령이 되자 노태우는 정병주를 선배스승으로 모시려고 했다. 그러나 정병주는 매몰차게 거절했다. 노태우의 호의를 거절한 정병주는 산하를 찾아 나섰다. 그 옛날 중국의 충신 백이숙제가 불의한 임금의 호의를 거절하고 수양산으로 들어가 굶어 죽었듯. 노태우는 정병주의 신상에 무슨일이 일어나면 어쩌나 걱정이 됐다.
‘정보부 보고에 의하면 정선배님께서 집을 나가 전국을 떠돌아 다닌지 5개월이 됐다고 한다. 3월초라서 아직은 추운겨울 날씨인데 선배님은 지금쯤 어느 산속을 해메고 계실까?’
그때 인왕산쪽에서 소쩍새 우는 소리가 들렸다.
“촉촉촉촉 쪼옥 쪽쪽쪽쪽...”
“초저녁인데 소쩍새가 우네”
노태우는 바보처럼 중얼거렸다.
10.26을 생각 할때마다 제일 먼저 생각나는 이가 있다. 박흥주대령이다. 거사를 끝내고 제일먼저 사형당했기 때문이다. 서울고등학교를 나온 박흥주는 육사를 수석으로 졸업한 엘리트장교였다. 중위 시절 6사단장 김재규의 전속부관이 된 이후 계속 김재규가 데리고 다닐 정도로 실력과 신임이 남달랐다. 동기중에 제일먼저 대령진급을 하여 김재규정보부장의 비서관이 됐지만 달동내 12평짜리집에서 사는 청렴강직한 무관이었다. 전두환의 오른팔이 된 장세동마저 아끼는 동기였다. 육사동기들은 그를 장래 참모총장으로 불렀다.
김재규의 명을 따르다 거사가 실패하는 바람에 사형언도를 받았지만 박흥주는 당당했다.
“상관인 김재규부장님의 명령을 따른걸 후회하지 않습니다. 두 번 다시 같은 일을 당해도 그리 했을 겁니다. 상명하복(上命下服)은 대한민국의 군인정신이니까요”
박흥주는 유일한 군인신분이었다. 그래서 대법원에 상고할수도 없었다. 초등학교 4학년과 2학년에 다니는 두딸이 프래카드를 들고 거리로 나섰다.
“우리 아버지를 살려주세요”
그러나 전두환독재정권은 어린애들이 피맺힌 목소리를 막아버렸다. 신문에 한줄도 실리지 못하게 통제했다. 10.26사건의 재판이 진행중인데 박흥주는 경기도 광주야산에서 총살형을 당했다.
전두환이 대통령이 되자 사형당한 10.26가담자들은 신원이 복권됐다. 유족들에게 연금이 지급되어 생활을 돕게한것이다. 대령에서 일병으로 강등당한 박흥주만 복권되지 않아 연금이 없었다. 장세동이 전두환에게 사정했지만 소용없었다.
죽는 순간까지 김재규에게 존경을 아끼지 않은 박흥주의 기개가 미웠기 때문이다. 박흥주 대령은 죽기 며칠전 죽음을 예감하면서 아내와 두 딸에게 편지를 보낸다. 유서였다. 거기에 이런 구절이 나온다.
"부인에게
애들에겐 이 아빠가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했으며 그때 조건도 그러했다는 점을 잘 이해시켜 열등감에 빠지지 않도록 긍지를 불어넣어 주시오. 앞으로 살아갈 식구를 위해 할 말은 못하고 말았지만 세상이 다 알게 될겁니다. 그리고 우리 사회가 죽지 않았다면 우리 가정을 그대로 놔두지는 않을 게요. 정신적으로나 경제적으로나 도와줄 것이라고 생각하오. 설령 그렇지 않다 하더라도 의연하게 떳떳하게 살아가면 되지 않겠소.
두 딸에게
아빠가 없다고 절대로 기죽지 말고 전처럼 매사를 떳떳하게 지내라. 아빠는 조금도 부끄러움이 없는 사람이다. ...너희들은 자라는 동안 어머니와 친척 어른들의 지도를 받고 양육되겠지만 결국 너희 자신은 커서 독립하여 살아야 하는 것이다. 독립정신을 굳게 가져야 한다... 조금 더 철이 들 무렵이나 어른이 된 후에도 공연히 마음이 약해지거나 기죽지 말고 용기를 가지고 헤쳐나가려는 강한 정신력을 가져야 한다...우리가 살아가는데 가장 중요한 것이 바로 선택을 어떻게 하느냐가 아니겠느냐. 자기 판단에 의해 선택하면 그 선택에 대한 책임은 지게 되어 있다. 후회하지 않는 선택을 해야 한다. '슬기로운 선택' 여기에 세상의 성공과 실패가 좌우된다. ...주일을 잘 지키고 건실하게 신앙생활을 하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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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속>
* '김재규 복권소설'의 소설같은 사연
http://www.newsroh.com/bbs/board.php?bo_table=lks&wr_id=3
* 등촌이계선목사는 광야신인문학상 단편소설로 등단했다. 독자들은 등촌을 영혼의 샘물을 퍼 올리는 향토문학가라고 부른다. 저서로 ‘멀고먼 알라바마’ ‘대형교회가 망해야 한국교회가 산다’ ‘예수쟁이 김삿갓’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