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화 70년 : 마지막회] 전대미문 ‘블랙리스트’로 필화조차 봉쇄하려던 박근혜의 파국
▲박태선장로교 신도들이 1960년 12월 10일 동아일보사에 난입하여 난동을 벌이고 있다. 경향신문 자료사진 |
(서울=코리아위클리) 임헌영 교수(민족문제연구소장) = 2016년 10월6일 경향신문 창간기념일부터 매주 1회 연재해 오던 ‘필화 70년’을 7개월여 만에 총 33회로 일단 종료한다. 원래는 8·15 해방 이후 70년간의 필화를 중요한 사건만 엄선해 30여회에 걸쳐 다루고자 기획했었다. 그런데 막상 시작하고 보니 유신통치 개막 직전인 1971년까지만 다루는데도 예정했던 30회를 넘겨 버렸다. ‘필화 70년’ 시리즈는 결국 ‘필화 26년’으로 마감하게 되어버려 여간 죄송스럽지 않다.
한국의 필화는 곧 분단 독재체제의 존립 명분과 일치한다. 국가보안법이 가장 끔찍한 감시탑이었고, 그 다음이 친일·친미파 비판 금지라는 경고등이 보이면서 계속하여 군부와 기독교 비판은 터부라는 옐로카드가 등장한다. 그러니까 민주화란 곧 외세를 탈피하고 민족 주체성을 확립해야만 실현 가능한 제도란 점에서 필화의 역사는 곧 민주 투쟁사의 피의 얼룩이나 다름없다. 처음 이 연재를 기획했을 때는 박근혜의 몽매한 파렴치 독재가 기승을 부릴 때여서 그 실상을 지난 시대 필화를 통해 야유와 풍자로 실감나게 한껏 부각할 요량이었다.
‘필화’조차 봉쇄한 파국의 사회
필화는 몽매한 독재의 부산물이기에 많을수록 지식인에게는 연옥(煉獄)의 계절이 된다. 그러나 필화가 있어야 할 시대에 필화는 없고 곡필과 망언만 난무하면 더 비참한 지옥의 암흑이 된다. 더 참담한 건 필화의 몸통인 언론매체를 권력이 전면 감시할 뿐만 아니라 언론인 스스로가 자진해서 그 감시와 통제를 한층 가혹하게 집행하는 패놉티콘(Panopticon, 전방위 감시 체계)의 단계이다. 양식을 가진 언론·방송인을 축출해버리고, 직언할 만한 인물들을 아예 등장시키지 않는 필화의 원천봉쇄 사회다.
▲박근혜 정부의 ‘문화계 블랙리스트’ 작성 등 혐의로 구속된 김기춘 전 대통령비서실장이 지난 1월22일 박영수 특검 사무실로 들어서고 있다. 경향신문 자료사진 |
이보다 더 파국적인 경지도 있다. 곡필과 망언이 만고의 진리인 양 세상을 어지럽히는 언론매체들을 복음기관처럼 우상화하는 풍조다. 바로 박근혜 통치 때가 그랬다. 역대 어떤 정권도 시도할 수 없었던 문화계 블랙리스트 작성과 언론매체의 독재체제 홍보기관화가 박근혜에 의하여 톱니바퀴처럼 돌아가고 있었다. 이 체제는 필화의 주역들로 지식인이나 언론인뿐만 아니라 SNS 활동을 하는 국민 다수까지도 감시와 억압의 대상으로 삼았다.
필화가 절정에 이르면 국민의 웃을 권리조차 박탈하려고 날뛴다. 이른바 코미디와 코미디언들의 수난은 막가파 필화 단계다. 코미디 같은 정치가 횡행하는데도 정작 국민들을 위안해 줄 진짜 코미디는 추방당하는 설화(舌禍)의 시대. 그래서 ‘필화 70년’의 첫 장은 만담가 신불출에서 시작하여 마지막 회에서는 현대판 만담가들(김제동·김미화 등)로 마무리 지을 예정이었다.
이런 취지에서 연재를 이어오던 2016년 10월24일, JTBC가 삐끗하면 필화가 될 뻔했던 최순실 게이트를 공개하면서 인류 역사상 처음으로 이뤄낸 웅휘한 1700여만명의 촛불시민혁명이 시작되었다. 세계사는 항상 필화에 의하여 혁명이 일어났다. 탄압이 절정에 이르면 예외 없이 필화가 필연적으로 출현하였고 그에 따라 사회적인 분노가 폭발하는 것이 역사의 생리구조이기 때문이다.
연재 기간 내내 이 황홀경은 분노와 조바심과 투지와 희망으로 점철된 민족사적인 최장기간에 걸친 범국민적인 카니발이었다. 그래서 2017년 5월9일은 분단 이후 최대의 축제일이 되었다.
‘필화 70년’은 되도록 촛불시민들 구호에 걸맞은 필화사건을 찾아 시대별로 다뤄왔다. 그러나 역사적인 대격변의 투쟁에 대한 열정 때문에 조금은 뒷전으로 밀려버린 것 아닌가 하는 조바심이 나기도 했지만 되레 현장성을 지녔기 때문에 공동보조역을 수행할 수 있었다.
다루지 못한 ‘필화’들
미 군정기부터 이승만-장면-박정희 정권 전반부, 형식적이나마 국민의 직접선거로 선출했던 마지막 대통령 선거(1971년 4월27일)까지를 다룬 이 연재는 지면관계상 각 필화사건의 역사적인 배경과 경위 전모를 충분히 다루지 못했다. 그리고 많은 필화사건을 생략할 수밖에 없었다.
예를 들면 미 군정통치 시기에는 이태준의 소설 <불사조>와 염상섭의 소설 <효풍(曉風)>은 필화사에서 매우 중요하지만 부득이 생략했다. 정치사적으로는 조선정판사위폐(朝鮮精版社僞幣) 사건을 둘러싼 해방일보 불법화 및 이 사건을 보도한 언론기관과 언론인에 대한 탄압은 미 군정기 최대 필화였다. 미 점령군의 본색을 여지없이 드러낸 이 사건은 그 이후 분단 한국의 집권세력을 친일·친미로 엮어내는 분수령이 되었다.서울시민들이 벌인 식량배급 청원 데모 기사로 인한 언론인 구속, 진보적인 언론에 대한 전국적이고 대대적인 탄압 강화와 언론기관 폐쇄 문제 역시 필화사가 간과할 수 없는 영역이었다. 미 군정은 필화를 통하여 분단 한국의 기틀을 놓은 것이다.
미 군정이 놓아준 발판에서 땅 짚고 헤엄치듯이 집권한 이승만 독재 12년간의 필화에서 미처 다루지 못한 국민방위군 사건과 대한중석불 사건 등 부정부패 폭로로 인한 언론계의 수난은 매우 중요하다. 독립운동가 이동화는 ‘소련 외교정책의 변화와 해부’ 강연에서 그 냉전체제의 한가운데서 평화공존의 불가피성을 역설하여 국보법 위반 혐의로 기소당했는데, 이 사건 역시 특기할 만하다.
사회적으로는 전후 한국판 카사노바를 풍자한 ‘모의 박인수 사건 재판’ 기획이 중단당한 필화도 흥미를 끌며, 동아일보의 명물 만화 ‘고바우’가 경범죄로 즉결심판에 넘겨져 벌금형을 받은 것도 독재의 풍자로 화제가 됐다.문학 분야에서는 납·월북작가를 다뤘다는 이유로 조연현의 <현대한국작가론>이 판금당했다가 문제 작가를 삭제하고서야 풀렸다.
장면 정권에서 미처 다루지 못한 것 중 최대의 화제는 박태선 장로교도의 동아일보 습격사건이다. 1960년 12월10일 오전 9시 수천명의 교도들이 동아일보 본사에 난입, 1시간에 걸쳐 난동을 일으킨 이 사건은 아마 필화 중 물리적인 피해를 가장 크게 입은 언론참사일 것이다. 박 장로가 ‘성화(聖火)’라며 신도들에게 보여준 그 신비를 과학수사연구소의 입증으로 조작이 가능함을 풀어쓴 기사가 원인이었다.
‘필화의 왕국’을 만든 박정희
5·16 쿠데타 이후 박정희 군부독재 시대는 한국 필화사에서 그 다양성이나 감시와 처벌의 강경성에서 단연 최고였다. 민정이양 후 박정희가 가장 중시한 대외정책은 ‘한·일 국교 정상화’였다. 케네디의 압력이기도 했던 이 협정은 굴욕외교의 표본인데, 범국민적인 반대 열기를 폭압적으로 억누르는 과정에서 동아방송의 ‘앵무새 프로 사건’(1964년 6월4일)이 터졌다. 시사가십 프로그램이었던 <앵무새>는 사회비판 의식이 강했는데, 그중 한·일 두 나라의 협상과정을 ‘굴욕외교’라고 몰아세우자 한·일협정 반대 데모대를 선동했다는 혐의로 최창봉·고재언·이종구·김영효 등을 내란선동 선전과 반공법 위반 및 학생 데모 배후 조종 등으로 기소했지만 무죄를 받았다.
1960년대 후반기 필화로 연행이나 기소 등을 당한 언론인으로는 홍승면·손세일·김진배·박창래(신동아, ‘차관 특집기사’ 사건), 천관우 등(신동아, ‘북괴와 중소분쟁’ 기사 사건), 남재희(조선일보, 공화당 비판 기사), 주돈식(조선일보, 3선개헌 문제) 등등 그야말로 기라성 같은 투사들이 연이어 명멸했다.
군부독재 치하에서는 에로티시즘 관련 필화도 급증했다. 염재만의 소설 <반노>(1969년 입건, 1975년 무죄)와 박승훈의 수필집 <영점하(零點下)의 새끼들>, <영년(零年) 구멍과 뱀의 대화>, <서울의 밤> 등이 엄청난 센세이션을 일으키며 물의를 빚었다. 영화로는 <7인의 여포로>(이만희 감독), <내시>(신상옥 감독), <벽 속의 여자>(박종호 감독), <너의 이름은 여자>(이형표 감독), <춘몽>(유현목 감독) 등이 외설관계로 경고, 소환 조사 등을 당했다.
▲ 1972년 박정희 정부의 유신을 전후해 프레스카드제를 주도하는 등 정부 대변인 역할을 한 윤주영 문화공보부 장관(왼쪽). 경향신문 자료사진 |
박정희는 1971년 12월17일 프레스 카드제를 발표한 이듬해에 유신통치를 실시함으로써 사실상 필화의 왕국을 수립했다. 박근혜는 그 시절 향수를 끝내 떨치지 못했던 것 같다.
귀중한 지면을 내준 편집진과 독자들에게 깊이 감사드린다. (경향신문에 먼저 올려졌습니다. 필자의 허락을 받아 게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