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업 이외에 뜨거운 열정을 지닌 취미나 특기가 있다면 그만큼 우리의 삶은 풍성해지기 마련이다. 삶의 진정한 원동력이 되는 열정적인 여가활동과 관련하여 ‘앵그르의 바이올린(Violon d'Ingres)’이라는 독특한 불어표현법이 있다.
19세기 미술계를 평정했던 앵그르(Ingres, 1780-1867년)는 이상적인 아름다움, 선명한 윤곽과 우아한 자태를 담아내는 초상화의 대가로 크게 명성을 떨쳤다. 하지만 그림은 천직으로 여겼을 뿐, 그가 진정으로 환희를 느끼며 정열적으로 혼신을 바친 분야는 바이올린이다. 그의 연주 솜씨 또한 당대의 기라성 같은 바이올리니스트와 어깨를 겨룰 정도로 재능을 인정받았다.
바로 여기에서 ‘앵그르의 바이올린’이라는 표현이 생겨났다. 본직을 제쳐놓고 더 열정적으로 몰입한 나머지 전문가 못지않은 재능을 발휘하는 취미활동으로 19세기 말엽부터 사용해오고 있는 고급표현법이다.
사실 멋진 삶을 추구하는데 기준을 재는 잣대는 없다. 오토바이 레이스에 푹 빠져 있는 정비공장 직공이 있다고 치자. 낮에는 기름때 묻은 작업복으로 자동차 바퀴 밑에서 땀을 뻘뻘 흘리지만, 퇴근 때면 머리에 포마드를 발라 뒤로 싹 넘기고 멋진 스포츠바이크에 시동을 걸며 유유하게 휘파람을 불 수 있다면 이 또한 남부럽지 않는 인생이다.
한 저명한 외과의사는 본업에서 생겨나는 스트레스도 해소할 겸 틈이 나면 색소폰을 즐긴다. 어느 날 사교모임에서 ‘대니 보이’를 자지러지게 연주하며 실내분위기를 완벽하게 사로잡는 순간 비로소 삶의 진정한 희열을 느끼며 어깨가 우쭐해졌노라고 토로했다. 어느 딱딱한 수학선생님은 주말이면 화구를 짊어지고 야외로 나가는 것이 유일한 소일거리. 그러다보니 개인전을 여는 수준까지 이르렀는데, 개인전을 통해 삶의 진정한 충만감을 맛본다고 밝혔다.
이렇듯 자동차정비공장 직공에게는 오토바이가, 외과의사는 색소폰이, 수학선생님에게는 물감이 그들의 삶에서 떼어놓을 수 없는 열정이요, 바로 ‘앵그르의 바이올린’이 되는 셈이다.
졸라는 대단한 사진애호가였다. 따라서 ‘Le violon d’Ingres de Zola, c’est la photographie‘ 라는 아주 간단한 문장이 만들어진다. 다만 ‘앵그르의 바이올린’이라는 표현법을 모르면 해석하기 곤란해지는 문장이다.
▶ 앵그르의 음악열정
앵그르는 무명 조각가이자 음악가였던 부친으로부터 데생과 바이올린을 배웠다. 툴루즈 보자르미술학도 시절 학비를 충당하려고 바이올린을 연주했는데, 재능을 인정받아 2년 동안 툴루즈 오케스트라단 제2 바이올린 주자로 활약했다.
그는 음악에 본격적으로 심취하면서, 작곡가 구노(1818-1893년), 리스트(1811-1886년), 케루비니(1760-1842년), 파가니니(1782-1840년), 피에르 바이오(1771-1842년) 등 당대 저명한 음악가들과 깊은 친분관계를 맺었다. 이들과 베토벤 4중주를 연주하느라 열기에 취해 밤을 새우는 일도 허다했다.
이러한 음악열정이 그의 미술세계에도 깊은 영향력을 주었던 것은 물론이다. 그런데 천재화가는 자신의 화폭에 대한 비판은 너그럽게 받아주고 넘겼지만, 바이올린 연주에 대한 이런 저런 뒷소리는 참지 못하고 버럭 화를 냈던 것으로 전해진다.
▶ 앵그르와 만 레이
사진작품 ‘앵그르의 바이올린’은 미국인 사진작가 만 레이(1890-1976년)의 대표작으로 간주한다. 1924년 초현실주의 작가 앙드레 브르통(1896-1966년)이 이끈 ‘문학’지 6월호에 처음 소개되었고, 이후 세계적으로 큰 관심을 모은 작품이다.
터번 수건만을 머리에 두른 여인이 체크무늬 시트가 드리운 침대 모서리에 등을 보이고 걸터앉아 있다. 앞으로 모아진 팔과 다리는 보이지 않아 어깨에서 골반부분으로 이어지는 곡선이 유난히 돋보이는 포즈이다.
이 사진은 앵그르의 유명한 그림 ‘목욕하는 여인(1808년)’과 ‘터키탕(1859년)’, 두 화폭에 동일하게 등장하는 터번 두른 여인의 모습을 모방한 작품이다.
사진모델의 얼굴은 왼쪽으로 프로필이 살짝 드러내고, 빛은 오른쪽을 향해 스며들면서 모델의 등을 음영 없이 비춰준다. 누드모델의 하얀 신체가 어두운 배경과 분리되면서 흑백 명함은 뚜렷해지고, 몸의 곡선 윤곽도 선명하게 드러난다.
▶ ‘몽파르나스의 키키’
사진모델은 20세기 초반 파리 장안에 자자했던 ‘몽파르나스의 키키’이다. 본명은 알리스 프렝(Prin, 1901-1953년). 모딜리아니, 미국인 조각가 칼더 등 당대 유명한 몽파르나스파 아티스트들로부터 인기를 모았던 뛰어난 미모의 모델이었다. 카바레댄서, 가수, 배우로 활발하게 활동하여 ‘몽파르나스의 여왕’이라는 칭호까지 받았다.
만 레이는 키키를 몽파르나스의 한 카페에서 만났다. 그는 첫눈에 독특한 미모에 사로잡혀 사진모델이 되어줄 것을 요청했지만, 키키는 이 프로포즈를 거절했다. 사진이 실제를 반영할 뿐 그림과는 차원이 다른 별개의 것이라고 여겼기 때문이다. 그러자 만 레이는 ‘그림을 그리 듯 사진을 찍고, 화가처럼 나름대로 오브제를 해석하여 변경할 것이다’고 설득했다.
1921년부터 키키는 만 레이의 사진모델이 되며, 이들은 사랑하는 깊은 연인관계로 발전했다. ‘몽파르나스의 키키’는 만 레이가 붙여준 애칭이다.
▶ 여성누드와 바이올린
만 레이가 키키에게 설명했던 것처럼, ‘앵그르의 바이올린’은 그림과 사진을 접목한 작품이다. 작가는 연필과 잉크를 이용하여 사진촬영 후 인화된 사진 위에 바이올린 몸통의 좌우대칭으로 뚫린 공명구멍 ‘f’자를 그려 넣었다.
이를테면 키키의 허리곡선은 바이올린 몸통의 곡선을 의미한다. 이렇듯 여성의 허리곡선과 바이올린의 몸통을 하나로 연결시키면서, 만 레이는 당시 유행하던 사조 다다이즘과 초현실주의적인 아이디어를 과감하게 표출했다.
그렇다면 이 사진작품의 제목을 하필 ‘앵그르의 바이올린’이라 정했던 것일까? 앵그르의 화폭을 모방했고, 여성의 아름다운 신체를 바이올린으로 비유했기 때문일까?
만 레이는 천직인 사진작업 이외에 자신의 삶을 끌어가는 진정한 원동력이자 환희가 무엇인지를 불어 표현법 그대로 표출했다. 바로 아름다운 곡선을 이루는 여성 신체에 대한 탐미이다. 결론적으로 그의 ‘앵그르의 바이올린’은 바로 키키를 향한 미칠 듯한 사랑이었다.
사실 키키가 없었더라면 사진작가 만 레이는 존재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키키는 만 레이에게 예술적 영감을 고취시켰을 뿐만 아니라, 사생활에서도 불어구사 등 프랑스 사회에 정착하고 적응하는데 다방면으로 큰 도움을 주었던 여인이다.
요컨대 ‘앵그르의 바이올린’이라는 고급불어표현법을 제대로 알고 사용했던 아티스트는 바로 미국인 사진작가 만 레이이었다.
【프랑스(파리)=한위클리】이병옥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