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민사회의 국민의례 남용
[i뉴스넷] 최윤주 발행인 editor@inewsnet.net
국민 모두가 매일 국민의례를 했던 때가 있다. 그 시절 극장에서는 영화가 시작하기 전 “애국가를 상영하니 모두 일어나 달라”는 방송이 나왔다. 친구들과 정신없이 놀다가, 바쁘게 길을 가다가, 동네 어귀 평상에 앉아 있다가도 오후 5시나 6시가 되면 어김없이 울려 퍼지는 애국가에 남녀노소 모두 ‘동작 그만’ 상태가 되어 오른손을 왼쪽 가슴에 올려야 했다.
매주 월요일 학교 운동장에서 열리는 애국조회를 할 때마다 남들 다하는 경례를 안하는 친구가 있었다.
어떤 선생님은 그 아이에게 회초리를 들기도 했고, 반친구들 앞에서 그 친구의 행동을 조롱하는 선생님도 있었다.
“넌 왜 국기에 대한 경례를 안 해?”
“너네 매국노 집안이야?”
돌이켜보건대, “조국과 민족의 무궁한 영광을 위하여”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몸과 마음을 바쳐 충성을 다할 것”이 어떤 의미인지, 왜 학교에서 이런 장황하고 알 수 없는 맹세를 강요하는지는 궁금하지 않았다.
그보다 나라를 사랑하지 못하게 하는 그 애의 종교가, 그 애의 행동이, 이상했고 무서웠으며 두렵기까지 했다.
머리가 커가고 학교생활에 익숙해지면서 국민의례를 하지 않는 행위가 대수롭지 않게 여겨진 건 “몸과 마음을 바쳐 충성할 것”을 맹세하게 했던 국민의례가 애국심의 잣대가 아님을 깨달았던 시기와 얼추 비슷하지 않을까 싶다.
1971년 유신정권부터 시작해 전두환 군사독재 시절인 1984년 법제화된 국민의례는 독재정권의 철권통치 수단으로 남용되다 민주화 운동이 절정에 달했던 1989년 1월에서야 폐지됐다.
현재 국민의례는 2010년 7월 제정된 ‘국민의례 규정’에 따라 진행된다. 정부행사 등 각종 공식적인 의식이나 행사에서 국기에 대한 예를 표하고 애국가를 제창하며 순국선열과 호국영령들의 숭고한 희생을 기리는 격식으로 치러진다.
독재정권이 행한 철권통치를 효율화하는 수단으로 남용됐던 과거를 청산하고, 국민적 통일성을 유지하는 국가의 상징 예식으로 자리매김하고 있지만, 여전히 국민의례를 보는 곱지 않은 시각 또한 존재한다.
이는 국민의례가 지닌 기본정서에 대한 반감 때문이다. 사실 국민의례는 러일전쟁 이후 일본 교단이 태평양 전쟁을 승리하기 위해 ‘궁성요배, 기미가요제창, 신사참배’를 했던 의식에서 비롯된 일제 강점기의 식민용어이자 일제의 잔재라는 주장이 지배적이다.
개인적으로 - 기원이나 용어의 발단을 차치한다면 - 파편화된 한 나라의 개인을 한 국가의 일원으로 결속시키고 국민적 통일성을 유지하는 국민의례는 그 자체로서 선한 의식일 수 있다고 여긴다. 원치 않는 개인에게 국민의례를 강요하는 것은 명백한 잘못임을 전제한다.
국민의례를 하지 않는다고 색깔론과 종북론을 앞세워 마녀사냥을 하는 시각에는 분명히 반대한다.
대통령 훈령에 따르면, 정부행사가 아닌 일반모임이나 행사에서의 국민의례는 전적으로 주최측의 자유의사다. 무엇보다 히틀러 치하의 나치시대도 아니고, 일본 제국주의 시대도 아닌 21세기 자유민주주의국가에서 국민의례는 애국과 종북의 구분 기준이 될 수 없기 때문이다.
문제는 이민사회 속 국민의례의 지나친 ‘남용’이다. 어쩌면 ‘무분별한 습관적 사용’이 더 적절한 표현일 수 있다.
많은 한인단체들이 거의 모든 행사에서 ‘국민의례’를 실시한다. 3.1절 기념식이나 8.15 광복행사 등 국가행사에서의 국민의례는 당연하다.
행사 도중 애국가를 부르며 가슴이 울컥하는 일도 허다하다. 국민의례를 통해 나라를 떠나온 이민자의 애달픈 마음을 위안받거나 한민족으로서 결속력이 증진되기도 한다.
충분히 이해하고 공감하는 대목이다.
그러나 단체나 모임의 일반적인 현안을 논의하는 월례회나 비정기 모임, 특별행사에서까지 국민의례를 해야 할 이유는 마땅히 찾기 힘들다.
공적인 의미를 전혀 찾아볼 수 없는 개별 행사에서, 심지어 먹고 노는 송년잔치에서 조차 국기에 대한 맹세를 읊고 순국선열과 호국영령에 대한 묵념을 하는 것은 쉽게 이해하기 힘들다.
“자유롭고 정의로운 대한민국의 무궁한 영광을 위하여 충성을 다할 것”이라는 다짐은 부조리에 항거해 작은 촛불 하나 들고 광장으로 나오는 시민들의 가슴 속에 담겨 있지, 국가가 정한 의식이나 의례를 통해 만들어지지 않는다.
더 냉혹하게 얘기하자면 독재정권의 국민통제 수단으로 사용되던 국민의례가 자랑스런 대한민국의 민주주의 유산도 아니고, 국가적 전통도 아닌 이상, 모든 행사에서 국민의례를 해야 한다는 강박 자체가 탈피해야 할 ‘구시대의 유물’이 아닐까.
과도할 정도로 무분별하게 사용되고 있는 이민사회의 국민의례 남용, 깊이 고민해볼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