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질랜드=코리아포스트) 세미나의 메카인 제주의 5월은 무척이나 바쁘다. 요즈음은 금한령(禁韓令)으로 중국 관광객이 현저히 줄었지만 일본의 연휴로 온 관광객과 중고생 수학여행으로 공항은 거의 시장통과 같다. 항상 제주를 방문할 때마다 느끼는 것이지만 이국적인 풍경이 과연 우리 나라가 맞는지 의아할 정도다. 공항에서 마주치는 야자수가 그런 이국적인 기분을 들게끔 한다.
서양에는 체스터필드 (Philip Chesterfield, Philip Stanhope) 가 아들에게 보낸 편지를 엮어 책을 만들어 내어 지금까지 교양서로 꾸준한 인기를 누리고 있다.
국내에는 여러 이름으로 번역되어 나와 있으며, 가장 최근 것이 ‘아들아, 영원히 살 것처럼 배우고 세상을 다 품은 것처럼 살아라’이다.
이 책에서는 소소한 가족사 보다는 어찌 보면 자식 교육을 위한 자기 개발서 수준의 글이며, 시대를 뛰어 넘어 아직도 꾸준하게 스테디 셀러(steady seller)로 자리를 잡고 있다.
이 책 외에 자식과의 대화를 책으로 엮은 것은 거의 없는 것으로 알고 있다. 그런데 최근 우리 나라에서 조선 선비들이 아들에게 보낸 편지가 책으로 엮어져 나왔다.‘아버지의 편지’가 바로 그 책이다.
이황, 백광훈, 유성룡, 이식, 박세당, 안정복, 강세황, 박지원, 박제가, 김정희. 조선 후기의 유학자 10인이 아들에게 보낸 편지를 엮은 것이다.
가족간의 대화 부재는 예전보다 지금이 더 심한 것 같다. 아마도 SNS로 소통이 안 되기 때문이기도 한 것 같다. 그리고 가부장적인 사회에서 아버지와 아들과의 대화는 점점 더 힘들어져 가고 있다. 그래도 딸과 엄마, 엄마와 아들과의 대화는 있지만, 아버지와 아들간의 대화는 거의 없는 듯싶다. 그나마도 대화가 아닌 문자나 이메일을 이용해 일방적이 지시나 전달이 대부분이다.
그렇다면 그 옛날 조선 시대에 부자간의 대화는 과연 어떠했을까?
다루는 주제나 내용은 그때나 지금이나 대동소이하다고 본다. 아버지의 일방적인 훈계가 주를 이룬다. 하지만 극성인 어머니의 치마 바람의 사랑과는 전혀 다른 아버지의 자식 사랑이 있다. 언제나 마음 속에 품고 있는 자식에 대한 사랑은 예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다.
조선시대의 아버지가 아들에게 보내는 편지의 대부분은 자식들의 공부에 관한 내용이 주를 이룬다. 그 당시의 최대 관심사인 과거 시험 공부에 관한 것이다.
요즈음처럼 취업 하기가 하늘에 별 따기 보다 어려운 시기에는 고시보다도 도리어 취직 시험이 과거 시험에 비할 수 있을 것 같다. 이 책을 읽으면서 예나 지금이나 기러기 아빠들이 많았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은 자녀들의 외국 유학 때문에 아버지가 고국에 남아 돈을 벌어야 하므로 자발적 기러기 신세가 되었지만, 예전에는 지방 선비가 서울에 부임하면 두 집 살림을 할 수 밖에 없어 어쩔 수 없이 기러기 신세가 되었다. 서울의 고관대작들이야 아무 일도 아니지만 지방 말직이나 선비들은 급여가 박해서 공무상 가족과 떨어져 살아야 할 수 밖에 없었다. 이 모든 것이 예나 지금이나 다 교육문제 때문이라고 느껴졌다.
생활비를 쪼개 자식 교육을 위해 책과 문방사우들을 사서 보내주는 모습은 현대의 아버지와 다를 바가 없다. 묵뚝뚝하기로 세상에서 둘째 가라면 서러워할 우리의 아버지들이지만 편지의 내용에는 너무나도 세세한 삶이 녹아 있다. 사소한 일상사까지 걱정하는 모습에 조선 선비의 또 다른 면모를 볼 수 있었다.
비록 표현하는 데 인색할 지라도 항상 집안 일과 자식걱정으로 한 평생을 살아가는 것이 우리 아버지들의 자화상이다.
특히, 연암 박지원의 편지를 읽다 보면 살가운 부정을 느낄 수가 있다. 박지원의 초상을 보면 우락부락한 무장 타입인데 편지에서 느끼는 정은 그와는 정반대다. 혼자 현감을 지내며 남자가 고추장을 담았다는 것도 기이하지만, 보내준 고추장을 잘 먹었다는 답신이 없어 서운해 하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똑같다고 본다.
다소 아쉬운 점은 조선시대의 최고의 석학으로 가장 자식들과 편지 교류를 많이 한 다산(茶山) 정약용의 서찰이 빠진 것이다.
다산은 모두 500여 권에 이르는 방대한 저술을 남겼고, 이 저술을 통해서 조선 후기 실학사상을 집대성한 인물로 평가되고 있다. 다산의 편지는 정민의‘다산의 재발견(humanist: 2008)’에는 자식들과의 편지 외에도 많은 문인과 제자들과의 편지도 함께 수록 되어 있다. 특히 관심을 끄는 것은 비단 치마폭에 그린‘매조도(梅鳥圖)’는 일품으로 딸에게 그려 준 것이다.
어쨋든 조선시대의 우리 아버지들의 관심사나 생활 면모를 볼 수 있는 좋은 책으로 오늘의 아버지들에게 잔잔한 파문을 일으켜 줄 것이다.
칼럼니스트 김영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