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흑룡강신문=하얼빈) 아름다운 흥개호반 밀산시에는 '흑룡강신문'과 인연이 되여 장장 53년을 남다른
애착으로 신문을 열독하고 수장하여온 전기인물 한분이 있다. 그가 바로 일생을 교육사업에 종사하다 정년퇴직한 밀산시 흑태진의 박만복(77세)
선생님이다.
밀산시 '가장 아름다운 민간서재' 미명을 가지고 있는 그의 서재에 들어서면 눈에 확 뜨일 정도로 책이 많다. 30여평방미터되는 면적에
2만여권의 고금중외 다양한 종류의 책들과 십여가지 신문들이 분류별로 네면을 골똑 채우고 중간중간 책자를 따라 빼곡히 진렬되였는데 그중에서도
석줄로 키넘게 쌓아놓은 '흑룡강신문'은 53년을 끊이지 않는 필연으로 이어온 그와 '흑룡강신문'의 남다른 인연을 이야기해주고 있다.
그가 '흑룡강신문'과 첫 인연을 맺게 된것은 1963년이였다. 일찍 목단강사범학원 수학전업을 졸업한 그는 1962년 모교인 밀산조중에
배치받아 교편을 잡게 되었다. 당시 그의 한달 로임은 47원이였는데 '흑룡강신문'의 일년 주문비용은 3원 50전이였다. 1961년 10월 1일에
창간된 '흑룡강신문'은 당시 한돐 푼했는데 당의 방침과 정책을 제때에 전달하고 전반 사회발전 방향과 동태를 즉시적으로 보도했으며 나아가서 세상을
담고 세상을 알게 했다. 읽을거리, 볼거리 많은 신문에 남달리 매혹된 그는 그때로부터 신문을 주문하기 시작했는데 그후 사업의 수요에 따라
동흥학교, 흑태중학교를 전전하면서도 언제 한번 중단한적이 없었다.
그의 서재는 '흑룡강신문'의 과거와 현재가 모두 공존하는 곳이였으며 53년 긴 력사의 모습을 한눈에 살필수 있는 곳이였다.
'중국-아프가니스탄 련합공보(1966년 4월 10일)', '모택동주석의 보귀한 고무에 충심으로 감사를 드린다. -윁남 ‘인민보’평론(1971년
3월 29일)', '조선 자유경제무역구를 설립하기로 결정(1991년 12월 31일)'... 차곡차곡 모아둔 신문속 이야기에는 시대의 문화적특성이
반영되였고 그때 그 시절을 또렷하게 기념으로 남긴 사진까지 있어 곳곳에서 과거의 력사를 만날수 있었으며 성인들에게는 추억을 불러일으키고
후대들에게는 과거와 력사에 대한 공부로 되었다.
충실한 애독자인 그는 수십년동안 신문을 한장도 빠짐없이 읽어왔는데 특히 제1면은 한글자도 빠뜨리지 않고 정독했다. 신문을 읽노라면
시간가는줄 몰랐고 특히 퇴직(1998년)한 뒤로는 더 시간여유가 있어 느긋하게 신문을 읽는 재미가 그렇게도 좋았다. 매일마다 신문을 기다리는
시간은 가장 행복한 시간이였으며 연고없이 신문없는 날은 괜히 답답하고 허전해 나기까지 했다.
애독자인 동시에 그는 착실한 신문수장가였다. 매달초면 그는 지난달의 신문들을 날자순서대로 한 장한장 쌓아놓고 백지를 펴놓아 다음달
신문과의 계선으로 삼았다. 그가 지금까지 수장한 신문은 근 1만 5천장에 달했으며 신문값만 해도 5000여원이 되었다. 신문 수장과정에서 그는
또한 많은 애로를 겪었고 심지어 '미움'을 받을때도 있었다. 신문이 분실되면 흑태진 우전국 국장, 밀산시 우전국 국장을 찾아갔고 그래서 해결
안되면 나중엔 흑룡강신문사 발행처에 전화해 보충받군 하였는데 지금까지 신문사에서 책임지고 부쳐준것만 해도 50여부 되었다. 적지 않은 사람들이
재료를 찾느라고 신문을 빌려갔다가 가져오지 않을때도 있었는데 그때마다 그는 신고를 무릅쓰고 직접 가서 찾아오군 하였다.
'흑룡강신문'을 애독하며 '성장'한 그의 반세기 남짓한 세월은 '흑룡강신문'의 '성장'을 재조명할수 있는 력사이기도 했다. 그는
“조선족인구의 절대 감소와 류출 등 원인으로 독자층이 점점 줄어들고 다양한 온라인 매체의 등장으로 지면신문이 위기를 겪고있는 오늘, 재중국
민족언론의 리더로 불리우고 있는 ‘흑룡강신문’은 수익하강과 리윤창출의 어려움속에서도 민족정신을 고취하고 민족사회를 이끌어가고 있다.”고
감개하면서 “나는 평생을 '흑룡강신문'과 함께 해왔고 살아있는 한 계속 읽어갈것이며 내가 수장한 신문을 후대들에게 보귀한 문화유산으로
남겨주겠다.”고 남다른 애정과 소망을 피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