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우당일기
Newsroh=김지영 칼럼니스트
지난해 무섬마을에서는 김씨 문중의 큰 고유제(告由祭) 행사가 있었다. 종택(宗宅)에서 열린 전통방식의 고유제에는 주한 외국대사들을 비롯한 200여명의 손님이 몰렸다. 고유제가 끝나고 점심 순서가 되자 사회를 보던 문중 어른이 마이크로 안내 말씀을 했다. “젊은 사람들은 앉아있지 말고 모두 일어나 빨리 손님들을 대접하라”
말씀이 끝나자마자 이른바 ‘젊은 사람들’이 우르르 일어나 음식을 나르러 나가는데, 보자 하니 그 모두가 60대였다.
내성천과 서천이 합류해 350도 마을을 휘감고 돌아가는 육지속의 섬. 채 50가구가 안되는 이 작은 마을은 반남 박씨와 예안 김씨, 두 성씨만 대대로 살아왔다. 오늘날 도시에서 찾아보기 어려운 집성촌, 즉 혈족 공동체이다. 이곳 사람들의 하루 생활은 아직도 그 대부분이 이웃 사람들의 하루와 엮여서 돌아간다.
이같은 무섬마을에서는 시간도 물길처럼 휘어 돌아간다. 청년들이 전혀 없어 60대가 청년, ‘중년’이 70대, 그리고 ‘노년’이라면 90대는 돼야 한다고 주민들은 생각한다.
젊은 세대가 살지 않고, 자라는 아이들을 볼 수 없는 건 비단 무섬 뿐 아니라 우리의 많은 시골마을이 겪고 있는 우울한 현실이기도 하다. 이런 현실이 국가지정 민속 문화재마을인 무섬의 미래에서도 심대한 걱정꺼리가 될 지는 잘 알 수 없다. 분명한 것은 마을의 강물처럼, 휘어 돌아가는 무섬마을의 시간은 오히려 도시가 잃어버린 좋은 것들을 잘 간직하고 있다는 점이다. 가장 두드러지는 것이 노인의 존재감이다.
도시에서는 이미 오래전부터 대부분의 노인들이 소외계층 취급을 받고 있다. 쓸모없는 존재, 거추장스러운 존재, 갈수록 불어나는 미래의 부담 정도로 인식되는 경향이 강하다. 부실한 사회복지체제 속에서 그나마 정을 나눌 수 있는 이웃사촌 풍조마저 급격히 쇠퇴한다는 조사결과가 이어져 나오고, 노인학대와 고독사도 급증하고 있다. 노동력을 상실한데다 경제력과 건강마저 부실한 노인들은 사회 최하층민이다.
은퇴한 중산층 노인들마저 갈 곳이 없어 방황하면서 도시의 구석으로 내몰리고 있다. 도시에서 가끔씩 들리는 ‘어르신’이란 존칭은 대개 영업 전략상 호칭일 뿐이다.
그러나 무섬 마을에선 아직 노인들의 존엄(尊嚴)이 살아있다. 80세 전후면 ‘어른’으로 불리는 그들은 누구에게도 무시당하지 않는다. 오래 살았다는 이유 하나만으로도.
그들은 오랫동안 마을을 병풍처럼 뒤에서 두르고 있는 달미산의 낙락장송(落落長松)처럼, 또는 마을을 휘감아 도는 내성천이나 그 앞의 드넓은 모래밭처럼, 마을의 역사이며 전통 그 자체로 대우를 받는다. 박씨나 김씨나, 바깥어른이거나 안어른이거나 간에.
무섬의 어른들은 얼굴 표정이 밝고 여유가 있다. 그리고 대개는 장수를 누린다. 아랫 세대에게는 너그럽지만, 그러나 분명히 해야 할 일에는 단호하다.
‘청년’인 마을의 60대들은 이런 마을 어른들을 잘 받들고 그 앞에서 고분고분하다. 마치 진짜 20대 청년인 듯이. 그리고 다른 마을의 청년들처럼 대소사 간에 마을 일에는 팔을 걷어부치고 나선다. 내 또래의 몇몇은 “어떤 때는 스스로 어린이가 된 것 같다”고 토로하기도 한다. 어른들 앞에서 어리게 행동하다 보니 자신도 모르게 어리게 된 것 같다는 말이다.
고향 마을에 살면서 서울을 오간지 1년. 많은 서울 친구들이 “훨씬 젊어졌다”는 말들을 한다. 그게 덕담만은 아니라면, 나 역시 청년이 되어 어른들 앞에서 어리게 행동한 덕을 본게 틀림없다.
* 이 글은 아주경제 7월11일자에도 게재되었습니다
글로벌웹진 Newsroh 칼럼 ‘김지영의 Time Surfi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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