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칼럼] 소외된 이웃 포용하는 공동체 되어야
(LA=코리아위클리) 최태선 목사(어지니교회) = 제가 쓴 글을 읽은 분들의 반응 가운데 가장 많은 것은 쉽지 않다는 것과 함부로 댓글을 달기가 어렵다는 것입니다. 왜 그렇게 생각하시냐는 제 질문에 대한 답은 내용이 심오하거나 무게가 있는 글이기 때문이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저는 그런 대답은 저를 배려하는 공식적인 발언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면 왜 제 글이 어렵고 함부로 라는 형용사를 앞세울 정도로 댓글을 달기가 어려운 것일까요
저는 오래도록 시간을 두고 찬찬히 생각해 보았습니다. 우선 제 글은 논리의 비약이 심합니다. 차분히 설명해 나가지 않고 너무 성급하게 생각이 앞서간다는 말입니다. 따라오기가 쉽지 않을 것입니다. 댓글을 달기 어려운 이유도 그리 크게 다르지 않을 것입니다. 이해하기 어려우니 댓글도 달기가 어려울 것입니다. 그래서 가끔씩 달리는 댓글이 그토록 난독증에 걸린 사람처럼 보이는 이유라는 생각도 해보았습니다.
하지만 결정적인 이유는 제 마음에 상대방을 깊이 생각하고 배려하는 환대의 마음이 없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좀 더 친절해야 하고, 좀 더 오래 참아야 하고, 좀 더 상대방을 존중해야 하는데 그런 마음이 모자란 것입니다. 물론 어떤 분들은 제 글이 따뜻하다고 말씀해주시는 분도 있지만 그건 그분들의 마음이 이미 따듯하기 때문이라는 생각을 해봅니다.
기독교의 죽음
일전에 책을 하나 번역하면서 데리다가 말한 무조건적인 환대에 대해 깊이 공감한 바 있습니다. 종교란 모름지기 환대, 그것도 무조건적인 환대를 향해 나아가게 하는 촉매제내지는 기폭제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됩니다. 오늘날 기독교가 안타까운 것은 교회를 오래 다니고 열심히 다닐수록 교인들이 혐오와 배제에 익숙해진다는 사실입니다. 신앙이 깊어질수록 다른 사람들을 더 많이 이해하고 그 사람의 편에 서줄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실제로는 반대의 길을 가고 있는 것입니다.
자본이 맹위를 떨치면 떨칠수록 세상은 점점 더 적대감이 쌓여갑니다. 가진 자는 갑질을 하고 가지지 못한 자들은 언제나 당하기만 하는 것이 아프고 억울해서 상처가 되고 원망이 쌓입니다. 신뢰와 사랑은 사라지고 불신과 적대감이 쌓이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입니다. 그런 마음들이 쌓이면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가 지옥이 되는 것입니다. '헬조선'이라는 말은 그런 의미에서 매우 적절한 단어의 선택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런 사회가 되면 될수록 그 반대의 욕구 또한 커지는 것이 사실입니다. 따뜻한 마음, 안전한 곳에 대한 희구는 더욱 커지고 기대가 생긴 만큼 더 실망하고 절망하게 됩니다. 안타까운 것은 이런 현실 속에서 빛을 발해야 할 교회가 빛을 발하기는커녕 절망의 이유를 더하고 있는 것은 안타까움을 넘어 기독교라는 종교의 죽음이라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열린 손
스위스 태생의 프랑스 건축가 르 코르뷔지에의 작품 가운데 '열린 손'이 있습니다. 평생을 건축 일을 하며 살았던 그가 자신의 인생 말년에 만들고 싶었던 세상에 대한 마음이 담긴 작품입니다. '열린 손'은 건축물도 아니고 조각품 같은 활짝 편 손바닥 형상입니다. 그는 그 작품에 자신의 인생을 담았습니다.
"우리는 도대체 언제, 인생의 어느 지점이 되어서야, 받아들이기 위해 자기 자신을 온전히 무장해제 할 수 있을까?"
이것이 '열린 손'에 담겨 있는 그의 화두입니다. 누구든 다가올 수 있게 하고, 받아들이기 위해 열려야 하는 자신의 마음을 형상화한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또한 날이 갈수록 타자들에게 닫히는 세상에 대한 절규이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끊임없이 자기 자신을 열어가는 코르뷔지에의 삶을 형상화한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스위스 태생의 프랑스 건축가 르 코르뷔지에의 '열린 손'
우리는 과연 어떤 삶을 잘 사는 삶이라 여기고 또 그것을 어떻게 추구하며 살고 있을까요? 사람마다 다를 수 있지만 그의 말대로 자기 자신을 열어가는 삶이 아닐까요?
예수님은 끊임없이 자신을 여는 삶을 사셨습니다. 그분은 도무지 약자들의 신음소리를 외면할 수 없는 분이셨습니다. 그래서 상종할 수 없는 사람들에게 다가가 그들을 만져주고, 위로해주고 고쳐주셨습니다. 그것은 끊임없이 그분을 곤경에 처하게 만들었지만 그분은 아랑곳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분의 삶 자체가 '열린 손'이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오고 오는 모든 시대 그리스도인들의 모범이 되었습니다.
환대의 사람들
따라서 그리스도인들은 적대감이 넘치는 세상에서 환대의 공간을 넓히기 위해 애쓰는 사람들이어야 합니다. 이 역할은 다른 무엇보다 중요합니다. 그것은 곧 하나님 나라의 건설과 직결되기 때문입니다.
복음의 목표는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이 생각하는 것보다 원대합니다. 하나님은 그리스도인들을 통해 온 세상을 구원하시려는 더 큰 목적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것은 옛 이스라엘에게 주어졌던 사명과 같은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이방의 빛이 되어 온 세상을 구원하는 도구가 되어야 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선민이라는 자의식에 빠져 자신들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사명을 망각하였습니다. 그것을 가장 분명하게 보여주는 것이 바로 요나서입니다. 요나는 이방지역인 니느웨 성 사람들이 회개하고 구원받는 것이 싫었습니다. 구원을 자신들에게만 주어진 특권으로 생각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오늘날 그리스도인들 역시 옛 이스라엘이 빠졌던 함정에 똑같이 빠져 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환대의 삶을 통해 믿지 않는 사람들을 보살핌으로써 전혀 다른 세상인 하나님 나라를 건설하고 믿지 않는 사람들의 구원을 책임져야 할 사명을 부여받았습니다. 그리스도인의 구원은 단지 그리스도인 개인의 구원을 위한 것이 아니라 환대의 삶을 통해 하나님 나라 건설에 참여함으로써 구원받은 자로서의 사명을 다 해야 하는 것입니다. 환대란 단순히 선택사항이나 도덕적인 윤리가 아니라 그리스도인의 정체성 그 자체입니다.
나그네
믿음의 조상인 아브라함은 나그네였습니다. 야곱도 자신이 나그네였다고 고백합니다. 모세는 이방인 제사장의 딸인 십보라와 결혼하여 자식을 낳은 후에 이름을 게르솜이라 하였습니다. 이름의 의미는 낯선 땅에서 나그네가 되었다는 뜻입니다. 이스라엘의 인큐베이터가 되었던 애굽에서 그들은 나그네들이었습니다. 출애굽한 이후 광야에서 40년간을 나그네로 지낸 후에야 가나안 땅에 들어갈 수가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세상에서 머리 둘 곳이 없이 사셨습니다. 나그네의 삶을 산 것입니다. 믿음의 전당이라 할 수 있는 히브리서 11장에서는 믿음으로 산 사람들을 이렇게 묘사합니다.
"이 사람들은 다 믿음을 따라 죽었으며 약속을 받지 못하였으되 그것들을 멀리서 보고 환영하며 또 땅에서는 외국인과 나그네로라 증거하였으니 이같이 말하는 자들은 본향 찾는 것을 나타냄이라."(13-14)
이처럼 성서가 이스라엘과 믿음의 사람들을 나그네로 묘사하는 것은 그들이 환대의 사람이 되어야 함을 강조하는 것으로 이해하여도 무방할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이 세상 모든 사람들에게 환대의 사람이 되어야 하는 근본적인 이유입니다.
환대의 공동체
오래 전 기억입니다. 한 기자가 노숙자로 분장하고 교회에 들어가 보았다는 기사를 보았습니다. 노숙자를 환영하는 대형교회는 한 곳도 없었습니다. 단 한 곳의 작은 교회에서 새벽기도회가 시작하기 전에 나가야 한다는 조건으로 예배당 의자에서 자는 것이 허락되었다는 것이 그 기사의 내용이었습니다.
작년 연말의 일입니다. 제가 다니는 공원 등산로에서 생활하는 노숙자 한 분을 섬겼습니다. 처음으로 한파주의보가 내리던 날 그분에게 외투를 한 벌 가져다주었습니다. 그 이튿날은 시장에 가서 내복과 같은 필요한 물품들과 약간의 먹을 것을 사다 드리기도 했습니다. 그것들을 전하며 그분에게 혹 필요한 것이 있으면 말씀하시라는 당부도 하였습니다. 처음에는 그렇게 한 저의 행동이 무척 기뻤습니다. 하지만 산을 다 내려오기도 전에 이 추위에 그깟 내복과 외투로 어떻게 지낼 수 있겠느냐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분을 정말 도우려면 그분을 집으로 모셔오는 수밖에 없었습니다. 하지만 저는 그렇게 할 정도로 신앙이 깊은 사람은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깊은 절망감에 빠졌습니다. 그랬던 저에게 마치 복음처럼 다가온 글이 있었습니다.
"한 사람이 자기 집 문을 두드리는 모든 사람을 들어오게 하여 먹여주고 재워주는 것은 가능하지 않다. 하지만 한 사회가 그 사회에 도착한 모든 낯선 존재들을―새로 태어난 아기들과 국경을 넘어온 이주자들을―조건 없이 환대하는 것은 얼마든지 가능하다. 우리는 모두 낯선 존재로 이 세상에 도착하여, 환대를 통해 사회 안에 들어오지 않았던가?"- 김현경, <사람, 장소, 환대>, 문학과지성사, 2016년 1월 12일, p.192
작가 김현경은 저에게 면죄부를 주는 것 같았습니다. 환대의 사람이 되어도 자기 집 문을 두드리는 모든 사람을 들어오게 하여 먹여주고 재워주는 것은 가능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사회는 그것이 가능합니다. 사회라는 단어가 제게는 교회라는 말로 들려왔습니다. '그렇다 교회는 가능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위 기자의 기사 내용대로 오늘날 교회는 환대의 공동체가 아닙니다. 그것은 단순히 현실적인 요구를 거부하는 것이 아니라 교회가 교회이기를 거부하는 것입니다. 환대의 사람들이 모여 이루어진 교회는 반드시 환대의 공동체가 되어야 합니다.
아브라함의 이야기에도 환대의 이야기가 들어 있습니다. 아브라함을 찾아온 이들은 천사들이었습니다.(창11장 참조) 아브라함은 그들을 지극정성으로 환대하였습니다. 사실 똑같은 이야기가 신약에도 있습니다. 예수님은 지극히 보잘 것 없는 이 하나에게 한 것이 곧 자신에게 한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마25:31-46) 이 내용은 그리스도인들이 허투루 들을 수 있는 내용이 아닙니다. 최후의 심판의 근거가 되기 때문입니다. 누구도 몰랐다고 말할 수가 없습니다. 지극히 보잘 것 없는 이 하나가, 그를 환대했는가 아닌가가 내 구원을 판가름하는 근거가 된다는 것입니다.
저는 단순히 행동하지 않는 그리스도인들을 겁주려고 이 이야기를 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이 이 시대 기독교의 죽음을 되살릴 수 있는 유일한 길이기 때문입니다. 교회의 개혁을 말하며 목사를 제거하고 십일조를 안 해도 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여하히 그리스도인들이 환대의 사람들이 되어 환대의 공동체인 교회를 이루느냐가 관건이라는 사실을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증오와 폭력이 넘치는 적대적인 세상에서 고생하는 분들이 교회에 들어와 설 땅을 얻고, 쉴 공간을 얻어 사람다운 삶을 살게 되는 일을 상상해 보십시오. 그곳이 바로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 아닐까요? 그곳이 바로 이사야서 11장이 말하는 평화의 나라가 아닐까요? 저는 그것이 이 땅에 하나님 나라를 건설하는 것이며 하나님의 뜻이 땅에서도 이루어지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복음이 희망임을 믿습니다. 시대가 어두워질수록, 세상이 각박해질수록, 복음은 더욱 빛날 것입니다. 만일 그리스도인들이 자신들의 정체성이 환대의 사람이며 교회가 환대의 공동체가 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알고 그것을 실천하여 꽃처럼 피어난다면 주님이 선포하신 하나님 나라가 그들 가운데 이루어질 것이며 교회는 '산 위의 동네'가 되어 어두운 세상을 밝히고 절망한 이들의 생생한 희망이 될 것입니다. 그런 환대의 공동체가 된 교회들을 보고싶습니다.